당하기만 하는 ‘을’(乙)은 더이상 없다.
[연합통신넷, 서울= 김민지기자] 도시락 프랜차이즈업체인 A사의 매장에는 최근 ‘공정서비스 안내문’이 내걸렸다. 업체 대표의 서명이 담긴 안내문에는 ‘직원이 고객에 무례한 행동을 했다면 직원을 내보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직원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시면 고객을 내보내겠습니다’라고 적혔다. 이어 ‘우리 직원들은 훌륭한 고객들에게 마음 깊이 감사를 담아 서비스를 제공하겠지만 무례한 고객에게까지 그렇게 응대하도록 교육하지는 않겠습니다’라고 강조했고 이는 높은 호응을 얻었다.
온라인 화장품업체인 B사는 지난달 29일 회사 홈페이지에 “영업방해 형태로 하는 모든 행위는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공지를 띄웠다. 상담원에게 일방적인 요구를 하다 욕설을 하고 비방 글을 게시한 진상 고객에 대한 경고였다. B사는 “향후 담당 상담사에게 욕설 등을 하는 경우에는 따로 공지 없이 법적 조치를 취하고 통보하겠다”며 “우리 직원들의 정신 건강이 확보돼야만 소비자들에게 좋은 상담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을’ 감싸는 착한 ‘갑’ 운동 확산돼야
‘손님은 왕’이라며 직원들에게 무조건적인 서비스를 강요했던 과거와 달리 기업이나 기관이 감정노동자 보호에 적극 대응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노동계와 전문가들은 이런 분위기를 환영하면서도 개별 기업·기관의 움직임을 사회 전반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감정노동자는 전체 임금근로자 10명 중 3∼4명에 이르는 560만∼740만명으로 추산된다. 지난 6월 전국민간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에서 실시한 감정노동자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2202명 응답자의 55.2%인 1216명이 근무 중 마음의 상처를 입거나 퇴근 후까지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지속되는 감정 부조화 및 손상 증상을 겪는다고 호소했다. 지난달에는 신세계백화점 인천점에 입점해 있는 귀금속 매장 직원이 고객에게 무릎 꿇고 사죄를 한 영상이 공개돼 충격을 줬다.
●우울증 산업재해 인정됐지만 제한적
산업재해의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에 우울증, 적응장애를 추가하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안이 입법예고 되는 등 개선방안이 마련되고 있지만 여전히 ‘반쪽짜리 대책’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수십 가지 정신질환 중 일부 질병에 한정된 보상조치는 제한적일 뿐 아니라 근본적인 피해예방이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기업의 감정노동자 보호 의무 등의 내용을 담은 관련법이 지난 7월 발의됐지만 파행 국회에서 낮잠만 자고 있다. 이성종 감정노동네트워크 위원장은 9일 “감정노동자가 악성민원인을 고발하는 등 개인적으로 대응하는 데엔 한계가 있다”며 “업체나 기관 차원에서 대응 체계를 마련하는 등 근로자 보호를 의무화할 제도적 근거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해 2월 서울시가 120다산콜센터 상담사에게 한 번만 성희롱을 해도 바로 법적 조치를 취하는 ‘원스트라이크 아웃제’를 실시한 후 악성민원이 하루 평균 2.3건으로 줄었다. 지난해 1월 하루 평균 31건이었던 것에 비하면 놀라운 감소다.
●“소비자·감정노동자 권리 함께 가야”
일각에서는 기업의 단호한 대응을 장려하는데 소비자도 함께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인임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연구원은 “기업·기관에서 불완전한 상품을 제공하는 등 소비자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은 채 그 공백을 감정노동자의 친절 서비스로 메우려고 하는 게 문제”라며 “소비권이 보장되면 노동자가 업체 과실의 총알받이가 될 확률도 준다는 점에서 소비자와 감정노동자의 권리는 함께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례1. 2012년 12월 17일 오전 0시 10분, 부산 서면 지하철역 고객센터에서는 커다란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A(66)씨는 집으로 가는 막차를 놓쳤다는 이유로 “월급을 500만원이나 쳐 받는 것들이 하는 일도 없이 서민을 우롱한다”고 부산교통공사 직원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는 “집에 공짜로 보내주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겠다”며 55분간 소란을 피웠습니다.
사례2. 2010년 5월 22일 오전, 수원의 한 대형마트를 방문한 할머니 B(78)씨가 “택시비 1만원을 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B씨는 전날 마트를 방문하면서 물품보관소에 짐을 맡겼는데 깜박하고 찾아가지 않아 다음날 다시 마트를 방문했습니다. B씨는 마트 측이 자신의 물건을 챙겨주지 않아 다시 오게 됐으니 택시비를 받아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마트 측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B씨는 고성을 지르고 마트를 방문한 다른 손님들에게도 욕설을 내뱉었습니다.
산업의 발달과 함께 서비스업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고객에 대한 친절’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릎을 꿇리는 등 비상식적인 행동을 일삼는 이른바 ‘갑질 고객’도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죠. 전문가들은 “소비자의 정당한 권리를 벗어나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항의하면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사례1의 A씨와 사례2의 B씨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된 혐의는 바로 위력에 의한 업무방해죄입니다. 형법 314조에는 허위의 사실을 유포하거나 기타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사람의 업무를 방해하는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업무방해죄에서 말하는 위력이라는 것은 사람의 자유의사를 제압할만한 유·무형의 힘을 말합니다. 정혜선 법무법인 이산 변호사는 “업무가 불가능할 정도의 빈번한 전화나 욕설, 고객센터에 드러눕는 등의 행동 등은 업무방해죄가 성립될 수 있는 위력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에 따라 부산지법은 막차를 놓쳤다는 이유로 욕설을 하고 소란을 피우는 등의 위력을 쓴 사례1의 A씨에게 벌금 50만원이 선고했습니다. 또 수원지법은 직원과 손님을 가리지 않고 욕설과 고성을 지르고 고객센터 민원처리 업무를 방해한 사례2의 B씨에게 벌금 15만원을 내라고 명령했습니다.
항의를 표시하기 위해서 업체에서 빌려준 물건을 돌려주지 않는다거나 성적으로 수치심을 줄 수 있는 말을 내뱉게 되면 업무방해죄 외에 다른 혐의도 더해져 더 무겁게 처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SUV차량을 구입한 C씨(38)는 2012년 4월 20일부터 같은 해 6월 30일까지 차량 제조회사의 고객센터로 욕설을 섞어가며 314통의 항의전화를 걸었습니다. 엔진소음 점검 차 차량 제조사의 서비스센터를 방문해 시운전을 하던 중 직원이 자신의 양해 없이 사적인 전화를 받았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는 다른 사업부에도 전화해 “사장 번호를 달라. 사장이 내려와서 사과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또 차량 제조회사가 수리기간에 쓰라고 빌려준 차량을 수십 차례 독촉을 받고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C씨는 업무방해죄 외에도 횡령 혐의가 더해져 기소됐고 대법원은 지난달 C씨의 업무방해죄와 형령죄를 모두 인정, 벌금 200만원을 선고한 항소심 판결을 확정했습니다. 2심을 심리한 대전지법은 “C씨가 차량제조사의 반환요구를 거절할 정당한 사유가 없었다고 봄이 상당하므로 이 같은 반환거부행위는 대여차량에 대한 불법영득의사를 실현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홈쇼핑 콜센터와 의류매장 고객센터로 1100회에 걸쳐 항의전화를 하고 또 불특정 다수의 상담원을 상대로 성적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킬 수 있는 말을 한 운전기사 D씨(54)는 업무방해와 함께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위반(통신매체이용음란)까지 더해져 기소됐습니다.
1심을 심리한 대전지법은 D씨에게 징역 1년의 실형과 함께 성폭력치료프로그램 80시간을 선고했습니다. 화들짝 놀란 D씨는 “형이 너무 무겁다”며 항소했으나 2심을 맡은 대전지법은 “피해자들과 합의하거나 피해가 회복된 사정이 없다”며 지난 1월 D씨의 항소를 기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정당한 고객의 항의는 어디까지로 봐야할까요. 정 변호사는 “법적으로 정확한 기준은 없다. 사회통념, 상식, 경험칙 이런 부분을 모두 포함해 판단하게 될 것”이라며 “항의하는 방식이 사회적으로 수용할만한 합리성이 있는지와 행위로 인해 직원이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등을 모두 살펴봐야 한다”고 설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