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의 총선 압승이 구체화되면서 미얀마의 선거혁명이 가시화되고 있다. 비록 미얀마 헌법상 군부가 의회 권력과 무관하게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국민 70% 이상이 지지하는 민주화의 열망을 또다시 파괴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미얀마 민중의 환호 앞에서 정작 드는 것은 박근혜 정부와 관변 학자들은 미얀마의 오늘을 어떻게 기록할까라는 의문이었다. 53년 전 민주정부를 전복한 네윈과 군부세력은 1988년 시민들의 민주혁명이 일어나자, 신군부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지금까지 군부독재를 계속해오고 있다. 이 정권의 사관은 이 사태를 군부독재의 종식이라고 기록할 것인가 아니면 군사혁명에 대한 반란이라고 기록할 것인가. 그들의 시각대로라면, 무지몽매한 군중이 건국세력을 배반한 것이요, 자랑스러운 조국 미얀마에 대한 자학이자 자해행위라고 기록해야 한다. 이 땅의 쿠데타 세력과 독재자들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미얀마 군부는 5·16쿠데타 세력에게 배운 바 컸다. 그들은 한국에서의 군사쿠데타 이듬해 조국에서 민주정부를 전복했다. 1988년 등장한 신군부는 시민의 분노에 놀라 물러선다고 했지만, 역시 박정희 유신의 변종체제를 이식시켜 지금까지 군사정권을 유지했다. 유신헌법에서 대통령이 국회 의석 3분의 1을 임명했던 것처럼, 미얀마 군부는 의석 4분의 1을 지명한다. 군부는 또 3인의 대통령후보 가운데 1인을 추천하고, 대통령이 누가 되든 권력의 핵심인 국방장관과 내무장관 그리고 국경관리 장관을 지명한다. 이 더러운 헌법을 개정하기 위해선 재석 75% 이상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사실상 개정이 불가능하다. 유신헌법에서 헌법 개정 최종 결재권자는 대통령이었다.
박근혜 대통령과 관변 학자들은
미얀마의 오늘 어떻게 기록할까
수치와 같은 반열에 오르고 싶었지만
2012년 <타임> ‘독재자 딸’ 표제처럼
아버지 남긴 과거에서 한 발도 못 나가
아웅산 수치는 2010년 인터뷰에서 “군사정권의 통치를 겪은 한국이 버마(수치는 미얀마가 아니라 버마라고 부른다) 민주화 투쟁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도울 수 있을 것”이라며 “버마 상황이 나아질 수 있도록 한국이 도움을 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나라는 그럴 염치가 없다. 물론 한국의 민주시민은 짧은 현대사 속에서 4·19혁명과 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6월항쟁 등 민주화의 금자탑을 쌓았다. 그러나 민주시민만큼이나 많은 수구세력들은 전제왕조나 독재체제의 복원을 꿈꾸고 그렇게 추진해왔다. 이씨 왕조를 다시 부활하려던 이승만을 건국의 대통령으로 추앙하는가 하면, 4·19 시민혁명을 전복시킨 5·16쿠데타를 군사혁명으로 칭송하고, 쿠데타에 이어 북한체제에 버금가는 유신체제로 영구집권을 도모한 박정희를 신격화하려고까지 한다. 나아가 식민지 근대화론이란 이름 아래 일제의 강점을 미화하려 한다. 일제는 36년간 이 땅에서 자원을 수탈하고 정신을 말살시키려 한 것은 물론이고, 어린 소녀 수십만명을 일본군 성노리개로 끌고 갔고, 남정네는 총알받이나 강제노역장으로 끌고 갔다. 그런 일제에 부역했던 자들을 건국세력으로 포장하려는 것이다.
수치의 아버지 아웅산 장군은 조국 버마를 집어삼킨 영국, 그리고 영국에 이어 조국을 병탄하려던 일제와 맞서 조국 독립에 평생을 바쳤다. 그는 한국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해방을 앞두고 암살당했다. 그런 아웅산의 딸이 군부독재의 매국의 망령을 불러들이려는 이 나라에서 도대체 무엇을 배우고 무슨 도움을 받을 수 있겠는가. 박근혜 정부의 한국은 모범이 아니라 반면교사일 뿐이다.
박 통령은 한때 수치와 같은 반열에 서고 싶어했다. 2012년 대선에서 당선되자 수치를 초청했고, 이듬해 1월29일 서울 통의동 당선자 집무실을 방문한 수치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랜 세월 동안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희생을 감내하며 헌신한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합니다. … 나는 내 개인의 행복을 포기하고 국민을 가족 삼아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역시 수치처럼 그렇게 살아왔다는 뜻이었다! 과연 그럴까? 소도 하품할 자랑이지만, 그것이 앞으로의 희망이라면 다행이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두 사람을 한 번씩 표지에 실었다. 2011년 1월10일치엔 수치를 ‘투사’라는 표제 아래 ‘자유 없는 나라를 비추는 자유의 횃불’이라는 부제와 함께 실었다. 18대 대통령선거를 열흘가량 앞둔 2012년 12월7일치엔 박 대통령을 ‘독재자의 딸’이란 표제 아래 ‘아버지가 남긴 스캔들과 과거를 넘어설 수 있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실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몹시 씁쓸한 대조였다.
그러나 더 씁쓸한 것은 <타임>의 의문이 지금 현실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그는 많은 물의와 변칙 속에서 당선됐고, 지금까지 아버지의 과거를 넘어서는 게 아니라 반대로 36년 전 폐기된 과거를 되살리는 데 전념했다.
산다르 윈은 미얀마 군부독재의 원조 네윈의 딸이다. 그는 1988년 시민혁명이 일어나기까지 아버지 밑에서 26년간 권력을 행사했다. 혁명이 일어나고, 네윈이 “군은 국민에게 총구를 겨누어라”라는 저주를 남기고 은퇴하자, 산다르는 신군부와 손을 잡고 수치를 포함한 민주세력을 탄압했다. 신군부는 네윈의 말대로 그해 시민 6000여명을 죽였다. 산다르는 ‘세계 최악의 독재자의 딸’로 불렸다. 박 대통령은 누구를 닮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