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국정화 행정예고 여론 수렴 마지막 밤 무슨 일이
역사교과서 국정화 행정예고가 마감된 지난 2일 밤부터 3일 새벽 사이 교육부는 급박하게 움직였다. 2일 오후 11시쯤 ‘올바른 역사교과서 국민운동본부’ 스티커가 붙여진 50여개 상자를 실은 트럭이 세종시 교육부 청사에 도착하기 전 교육부 상당수 직원이 ‘집합’ 문자메시지를 받았고, 퇴근한 직원들까지 다시 출근해 분류 작업에 동원됐다. 그러나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 야당 의원 보좌관들이 11일 교육부 창고에 있는 국민의견서와 서명지를 확인한 결과, 2일 밤의 작업은 정부의 국정화 추진과는 거꾸로 밀려가는 여론을 억지로 메우려 찬성 의견을 조작·동원한 흔적이 역력했다.
■의견서 분량·형식·이유 판박이
창고에 들어간 보좌관들은 일반인·단체가 제출한 62개 상자 중에 10~62번에 담겨 있는 의견·서명지가 한눈에 띌 정도로 너무 비슷했다고 전했다. 한 보좌관은 “찬성 의견서 대부분은 한 사람당 A4용지 9~10장 정도로 분량이 동일했고, 이름·신상명세·찬성이유 등을 쓴 동일한 양식에 인용한 사진까지 비슷했다”며 “10장짜리 개인의견서를 내면서 묶지도 않고 낱장으로 컴퓨터에서 출력한 채로 새 종이처럼 깨끗하게 박스에 들어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반대 의견서들은 손으로 쓰거나 팩스로 보내는 등 양식도 다양하고, 편지글·영어의견서 등 형식·분량도 제각각이며, 전달 과정에서 종이가 손상된 것도 많았다고 했다. 보좌진은 “찬성 의견서들이 담긴 53개 박스가 2일 밤 트럭에 실려온 것들”로 추정하고 있다. 누군가 공통양식을 만들고 이름만 바꿔 출력했을 가능성을 주목하는 것이다. 특히 62번 박스에는 국정화 지지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의 의견서도 동일한 분량·형식으로 들어 있었으나, 김태년 의원 측이 곽병선 한국장학재단 이사장에게 공개질의한 결과 “의견서를 낸 적 없다”는 회신을 받았다.
무더기 대필 서명 의혹도 제기된다. 2~3장짜리 수십명의 이름과 주소, 연락처가 한 사람의 필체로 깨끗하게 정리된 서명지는 이례적이다. 한 사람 필체인 찬성 서명지가 많았고, ‘박○○로 시작되는’ 수십명의 명단은 복사돼 서류 뭉치 사이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같은 아파트에서 동별로 보낸 서명지나 “방범대원님 부탁드립니다”라고 써 있는 표지도 보였다. 서명지를 촬영해 출력해서 보냈거나, 엑셀명단을 보내온 것도 있다. 다른 데 사용됐던 명단을 ‘재사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부분이다. 일부 서명용지는 한 사람의 필체로 이름·전화번호는 다르지만 주소는 ‘〃’ 표시로 동일하게 적은 것도 있었다. 한 주소는 민간기관 건물로 확인됐다. 행정예고 마감 후 서울 여의도의 한 인쇄소에서 찬성 의견을 무더기로 출력해 박스째 실어 날랐다는 소문도 돌고 있다.
■찬반 의견수렴 발표 자의적
교육부 측은 내용·분량이 판박이식으로 비슷한 의견서, 같은 필체 서명지 등의 조작·동원 의혹을 제기하는 보좌진에게 “시간이 없어서 내용은 제대로 못 봤다” “필적검증을 하지 않아서 모르겠다” 등의 답변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문제가 제기된 의견서·서명지들은 모두 집계에 포함됐다. 무효를 가르는 유일한 기준은 서명지에 이름이 명확히 기재되고, 전화번호나 번지까지 들어간 전체 주소가 있는지 여부였다. 야당 보좌관들은 “지역별로 광범위한 서명운동을 전개한 야당이나 시민단체 서명용지엔 아예 전화번호란을 만들지 않은 것도 많고, 주소도 동까지만 적은 게 많아 모두 신원불명 처리됐다”며 “새누리당에서 제출한 의심스러운 명단 서명지는 대부분 집계에 포함됐다”고 지적했다.
지난 3일 교육부는 홈페이지에 행정예고 의견 취합 결과를 찬성 15만2805명, 반대 32만1075명으로 발표했다. 당시 교육부가 e메일로 의견 접수를 하지 않은 데다 단 한 대인 접수 팩스마저 먹통이고 전화조차 받지 않아, 폭주하는 반대 의견을 듣지 않으려는 속셈이라는 비판이 거셌다. 당시 새누리당은 국정화 찬성 의견을 늘리기 위해 막판에 당력을 총동원한 사실도 드러났다.교육부는 자신들이 가른 10여가지의 국정화 찬반 유형 외에 제출된 의견에 대해서는 요구가 있으면 검토하겠지만 현재로선 답변을 따로 보내지 않을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