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지난 12일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 뒤 자신이 지원했던 대학의 논술고사를 포기하려던 김모(18)양은 14일 갑자기 시험을 치르느라 곤욕을 치렀다. 입시업체가 공개했던 ‘등급 컷’(커트라인)을 믿었던 게 화근이었다. 수능 가채점 결과 김양의 영어 영역 점수는 100점 만점에 94점(원점수)이었다. 당시 입시업체들이 내놓은 1등급 컷은 95~97점. 국어 A 영역마저 망친 터라 김양은 지원 대학이 요구하는 수능 최저기준을 맞추지 못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논술고사를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13일 오후부터 입시업체의 등급 컷 수치가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94점까지 내려왔다. 이대로라면 김양은 1등급이다. “마무리 준비를 못하는 바람에 더 못 본 것 같아요. 입시업체들이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닌가요.”
#2.대입 지도만 20년 넘게 해 온 서울 강남구의 한 고교 3학년 부장교사는 수능 다음날인 13일 진땀을 뺐다. 학생들과 상담을 하는데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학생 수십명이 자신의 가채점 점수를 갖고 14~15일 대학의 논술고사에 응시해야 하는지를 물었지만,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수능이 교육부의 말과 달리 어렵게 나와서인지 입시업체들의 등급 컷 수치가 제각각이었어요. 심한 경우 등급별로 5점 이상 차이가 났습니다. 제각각인 정보로 상담을 하려니 ‘장님’이 된 느낌이었죠.”
대학 합격의 문, 논술로 열 차례
수능 종료 후 첫 주말부터 수시모집 논술·면접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른바 ‘깜깜이’ 입시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문제가 예상 외로 어렵게 출제되면서 입시업체들이 내놓은 원점수별 수능 등급을 가리키는 등급 컷이 중구난방으로 나오면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15일 서울신문이 각 입시업체가 내놓은 ‘12일 수능 직후’와 ‘15일 오후’의 등급 컷을 비교분석한 결과 3일간 등급 컷이 큰 폭으로 출렁거린 것으로 드러났다. A사의 경우 수능 직후 “영어가 지난해처럼 쉽게 출제됐다”며 1등급 컷을 97점으로 잡았다. 하지만 15일 오후 3시 등급 컷은 94점으로 3점이나 낮췄다. B사 역시 수능 직후엔 영어 1등급 컷을 97점이라고 발표했지만 15일에는 94점으로 내렸다. 이 업체는 자연계 학생들이 주로 치르는 수학 B 영역의 1등급 컷을 100점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현재 B사의 수학 B 영역 1등급 컷은 96점이다. C사는 다른 입시업체들과 달리 국어 B형의 1등급 컷을 93점에서 94점으로 올리고 수학 A는 93점에서 94점으로 1점씩 높였다. 다른 업체들이 1등급 컷 점수를 낮춘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이렇다 보니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느냐’는 목소리가 나온다. 신종찬(휘문고 교사) 서울시교육청 대학진학지도지원단 전략기획부장은 “수능이 끝난 직후 10개 정도의 입시업체가 저마다 등급 컷을 발표하는데 결과가 제각각이어서 혼란이 극심하다”고 말했다. 그는 “1, 2점을 가지고 다투는 상황에서 등급 컷 점수가 큰 폭으로 차이가 나 일선 교사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며 “이런 혼란이 커질수록 학생을 비롯해 교사는 사교육 업체들에 더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입시업체의 등급 컷은 수험생들이 수능 직후 각 입시업체 홈페이지에 자신들의 가채점 결과를 입력하고 입시업체가 이를 취합해 만들어진다. 수능 직후부터 다음날까지만 적게는 5000명, 많게는 5만여명이 자신의 점수를 입력한다. 입력하는 학생이 점차 늘면서 시간이 갈수록 정교해지지만, 수능 직후 수십곳의 대학이 잇달아 수시 논술고사를 치르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수시에 합격하면 수능을 잘 봤더라도 정시에 지원할 수 없다. 수험생은 수능 가채점 결과를 가지고 입시업체의 등급 컷을 예상하고 이미 지원한 수시모집에 집중할지 아니면 수시를 포기하고 정시모집에 지원할지를 불과 하루 이틀 만에 결정해야 한다.
김진훈(숭의여고 교사) 좋은교사 진학교사연구회 대표는 이런 문제에 대해 “대학들이 경쟁 대학과 다른 날 논술고사를 보려고 눈치 경쟁을 심하게 벌이면서 생기는 문제”라며 “교육부가 지침 등을 통해 대학의 수시 논술고사를 수능 직후에 치르지 않도록 조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 12일 치러진 201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의 문항·정답과 관련된 이의신청 건수가 총 900여 건으로 최종 집계됐다. 그러나 일부 영역에서 출제오류 시비가 계속되고 있는 만큼 이를 둘러싼 논란은 최종 정답이 발표될 때까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수능 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 홈페이지에 마련된 '2016학년도 수능 문제 및 정답 이의신청 게시판'에는 마감 시점인 16일 오후 6시 현재 △국어영역 165건 △수학영역 31건 △영어영역 159건 △사회탐구 180건 △과학탐구 356건 △직업탐구 2건 △제2외국어/ 한문 16건 등 전부 909건의 각종 의견들이 접수됐다.
출제오류 논란에 휩싸인 국어 A형 19번 문항.
특히 과탐에서 이의신청이 몰린 지구과학Ⅰ 4번 문항은 2010년 미국 멕시코만의 석유시추시설 폭발을 포함해 각종 환경오염 사례를 제시하고 이와 관련해 옳은 설명을 고르는 2점짜리 문제다. 정답은 석유시추시설 폭발로 인해 '해수의 생화학적 산소요구량(BOD)은 증가한다'인 4번이다.
수험생들은 "무기물인 원유가 흘러나와 물고기가 폐사하고, 이를 분해하기 위해 BOD가 증가한다고 'BOD증가'가 답이면 나비 날갯짓이 폭풍을 일으킨다는 논리와 뭐가 다른가"라며 명백한 문제오류라고 주장했다.
반면, 이 문제를 맞춘 수험생들은 "2013년도 수능특강 지구과학Ⅰ 교재 해설에 기름이 유출되면 이것을 분해하기 위해 더 많은 산소가 필요하기 때문에 해양의 BOD가 증가한다'가 분명히 나와 있다"며 평가원의 당초 정답으로 채점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국어에서는 A/B형 공통문항인 사전 활용법을 묻는 14번에 대한 문제제기가 집중됐다. 이 문제는 '같이'와 '같이하다' 보기를 제시하고, 선택지에서 적절하지 않은 것을 찾는 내용으로 2번이 답이다. 이의를 제기한 수험생들은 "같이하다의 문형 정보 및 용례를 보니, 같이하다는 두 자리 서술어로도 쓰일 수 있고, 세 자리 서술어로도 쓰일 수 있다고 나와 있다"고 정답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원준 메가스터디 국어 강사는 국어 A형 19번이 명백한 출제 오류라고 문제 삼고 나서기도 했다. 이 문항은 에벌렌치 광다이오드에 관한 지문의 내용과 일치하는 선택지를 고르라는 것으로, 정답은 2번 '에벌렌치 광다이오드의 홀수층에서 전자-양공 쌍이 발생하려면광자가 입사되어야 한다'이다.
그러나 이 씨는 "두 문장의 뜻은 'must'와 'can'의 차이로 해석할 수 있다"며 "지문은 '광자가 입사되면 전자와 양공 쌍이 생성될 수 있다'는 가능성(can)의 의미를 담고 있는 반면, 선택지는 '광자가 입사돼야 전자-양공 쌍이 발생할 수 있다'며 필요성(must)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출제 오류"라고 주장했다.
이밖에 수학 30번과 사탐 윤리와 사상 18번, 영어 33번 등에도 수험생들의 문제제기가 잇따랐다.
평가원 관계자는 "매년 수능을 칠 때마다 이 정도 규모의 이의신청이 올라오기 때문에 통상적인 수준으로 보고 있다"며 "외부 위원 등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이의신청 내용을 따져보고 최종 정답을 확정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평가원은 이번 수능 문제·정답에 대한 이의신청을 토대로 검토하고, 오는 23일 오후 5시 최종 정답을 발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