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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김덕권칼럼] 진리와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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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김덕권칼럼] 진리와의 사랑

김덕권 기자 duksan4037@daum.net 입력 2018/03/23 11:16 수정 2018.03.26 09:01

진리와의 사랑

많은 사람들이 “언제 행복을 느끼느냐?”는 질문에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언제 불행을 느끼느냐?”는 질문에는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할 때’라고 말하지요. 이와 같이 사랑은 참 많은 사람들을 행복의 구름 위로 띄웠다가 불행의 나락(奈落)으로 곤두박질치게 합니다.

저도 젊은 시절 많은 사랑을 해 보았습니다. 한 여인에 목숨도 걸어보고 하룻밤 풋사랑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인간간의 사랑엔 언제나 종말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순수하고 조건 없는 사랑은 없는 것일까요?

어떤 사랑이나 사랑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어느 순간 불행으로 바뀌는 이유는 소유하고 지배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괴로워질 때는 사랑의 대상을 원망하기에 앞서 내가 상대방을 소유하고 지배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를 먼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집착 대신 순수한 영혼의 사랑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 옛날 유마거사(維摩居士 : ?~808)가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물었습니다. “진리로 들어가는 문은 하나 밖에 없다는데 어떻게 해야 그 진리의 문으로 들어가겠습니까?” “진리는 말로 설명 할 수 없고 보여 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모든 언어와 시시비비를 떠난 것이 곧 진리입니다." 라고 문수가 답을 했지요.

이어서 문수가 유마에게 진리가 무엇인지를 한 말씀 해 보라고 했습니다. 유마는 한 참을 침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침묵을 지켜보던 문수가 “유마거사의 침묵은 천둥소리가 들어 있습니다.”라고 찬탄을 했다고 합니다.

그럼 침묵이면 침묵이지 천둥 같은 침묵은 뭘까요? 의사 전달의 수단인 말보다 더 확실한 방편(方便)이 침묵언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나 지식을 말이나 글로써 모두 전달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된 진리는 절대 말로써 전달해 주거나 전달 받을 수가 없지요. 문자로 진리를 세울 수 없다는 ‘불립문자(不立文字)’도 침묵의 언어를 상징하는 뜻이 아닐까요?

한 외도(外道)가 부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말 있음으로도 묻지 않고 말 없음으로도 묻지 않을 때가 어떠합니까?”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양구(良口=침묵)’하셨습니다. 수행자가 찬탄하며 “세존께서 대자대비 하여 저의 미혹(迷惑)함을 일깨워주시고 깨달음에 들게 하셨습니다.” 하고 물러났습니다.

이 광경을 보던 제자 아난타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수행자가 무엇을 증득하였기에 ‘깨달음에 들었다’고 합니까?” 부처님이 “세상에 좋은 말은 채찍의 그림자만 봐도 달리는 것과 같으니라.” 그 수행자는 부처님의 천둥과 같은 침묵에서 말 있음과 말 없음에 양자를 어우르는 무언의 답을 간파한 것이지요.

이렇게 말 있음과 말 없음의 양변에 취우치지 않는 것이 중도(中道)이고, 우주의 본성이며, 우리가 찾고자 하는 내면의 참 진성(眞性)이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참 진리는 말로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 이전에 한 소식을 침묵으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진리와의 사랑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진리의 사랑은 말 없는 가운데 느낄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천방지축(天方地軸) 사랑을 찾아 헤매다가 비로소 진리에 귀의(歸依)하고 진리의 진정한 사랑을 얻은 것 같습니다. 그 진리의 사랑을 우리는 대자대비(大慈大悲)라고 합니다.

소태산(少太山) 부처님께서「부처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는 저 태양보다 다습고 밝은 힘이 있나니, 그러므로 이 자비가 미치는 곳에는 중생의 어리석은 마음이 녹아서 지혜로운 마음으로 변하며, 잔인한 마음이 녹아서 자비로운 마음으로 변하며, 인색하고 탐내는 마음이 녹아서 혜시하는 마음으로 변하며, 사상(四相)의 차별심이 녹아서 원만한 마음으로 변하여, 그 위력과 광명이 무엇으로 가히 비유할 수 없느니라.」하셨습니다.

대자(大慈)라 하는 것은 저 천진난만한 어린 자녀가 몸이 건강하고 충실하여 그 부모를 괴롭게도 아니하고, 또는 성질이 선량하여 언어 동작이 다 얌전하면 그 부모의 마음에 심히 기쁘고 귀여운 생각이 나서 더욱 사랑하여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대비(大悲)라 하는 것은 저 천지 분간 못 하는 어린 자녀가 제 눈을 제 손으로 찔러서 아프게 하며, 제가 칼날을 잡아서 제 손을 상하게 하건마는 그 이유는 알지 못하고 울고 야단을 하는 것을 보면 그 부모의 마음에 측은하고 가엾은 생각이 나서 더욱 보호하고 인도하여 주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우리의 마음과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진리와 합일하는 것, 그것이 진리와의 사랑입니다. 진리는 사랑입니다. 진리는 미움을 멀리하고 사랑을 가까이 하라고 가르칩니다. 나를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세상을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더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따라서 진리를 공부하는 사람은 진리와 뜨거운 사랑을 속삭여야 합니다.

진리와의 사랑이 무르익어가는 만큼 우리의 사랑도 깊어갑니다. 진리는 미움마저도 사랑으로 돌리는 힘이 있습니다. 악을 선으로 원수를 동지로 돌리는 것도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사람을 감싸 안고 따뜻하게 포용합니다. 진리에 눈을 뜬 사람은, 세상을 사랑으로 볼 수 있는 눈이 떠져야 합니다. 진리의 길을 가면서, 마음속에 사랑의 눈이 떠지지 않았다면 진리의 길은 아직도 멀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크고 작은 산이 많이 있으나 그 중에 가장 크고 깊고 나무가 많은 산에 수많은 짐승이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크고 작은 냇물이 곳곳마다 흐르나 그 중에 가장 넓고 깊은 바다에 수많은 고기가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 사람이 다 각각 세상을 지도한다고 하나 그 중에 가장 덕이 많고 자비(慈悲)가 너른 인물이라야 수많은 중생이 몸과 마음을 의지하여 다 같이 안락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랑을 합시다. 진리와의 큰 사랑을 속삭여 대자대비를 갖추는 큰 사람이 되면 어떨 까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3월 23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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