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뒤 야권 인사들 가운데 집중적 조명을 받은 인물이 손학규 전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이다. 손 전 고문은 김 전 대통령 빈소가 차려진 지난 22일부터 나흘째 서울대 병원 영안실을 찾고 있다. 그는 서강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93년 김 전 대통령에 의해 발탁된 ‘와이에스(YS) 키즈’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지난해 7월 재보궐선거 패배 뒤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전남 강진에 칩거하다가 서거 소식이 알려진 22일 급히 상경했다. 서울 구기동 자택과 빈소를 오가며 26일 장례식 때까지 서울에 머무를 계획이라고 한다. 빈소에서도 손 전 고문은 조문객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와 인사를 나누는 사람마다 근황과 함께 정계복귀 계획을 물었다. 25일 오후 김동주 전 의원은 “이제 토굴에 들어가지 말고 같이 사십시다. 일할 사람이 토굴에 들어가니 할 사람이 없다”고 했고, 손 전 고문은 웃으며 아무말 하지 않았다. 전날에는 김종인 전 의원이 손 전 고문에게 “왜 거기(강진) 가 있느냐. (정치권으로) 나오셔야지”라고 복귀를 권유했다. 손 전 고문은 말 없이 웃기만 했다. 두 사람은 독일의 강소기업인 ‘히든 챔피언’ 프로젝트에 대해 잠시 대화를 나눴다. 정치인이 아닌 일반 조문객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조문을 마치고 나오다 손 전 고문과 마주친 한 시민이 그의 손을 잡고 “속 시원하게,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고 밝히고 (서울로) 올라오라”며 안타까워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손 전 고문은 빈소에 머무는 내내 정계 복귀와 관련된 질문에는 입을 다물었다. 출마설을 “소설”이라며 부인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여야의 현직 정치인은 물론 기자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정치권 안팎에선 ‘김영삼의 정치적 아들’을 자임하며 빈소를 지킨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함께 손학규 전 고문을 ‘김영삼 서거 정국’의 수혜자로 꼽는다. 새정치연합의 한 관계자는 “김 전 대통령에게 호감을 가진 중도보수 성향의 여권 지지자들에게 ‘김영삼이 발탁한 정치인’, ‘의리를 아는 정치인’의 이미지를 확실히 심어준 것 만으로도 성과 아니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그의 ‘빈소 정치’가 추후 정치 행보에 ‘플러스 요인’으로만 작용하지 않을 것이란 관측도 있다. 또다른 야당 관계자는 “야당의 핵심 지지층에겐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부각되는 게 손해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DJ와 YS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에 나선 김대중 후보는 겨우 90여 만 표 차이로 박정희 후보에 밀려 고배를 마셨다. 그때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헌법을 유린하는 시대가 펼쳐졌고, 명맥을 유지한 군사정권은 ‘80년의 봄’ 이후 거의 8년 간 수많은 국민들을 학살하며 반 민주화의 길로 치달았다.
박종철에서 이한열로, 다시 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진 민주화투쟁의 역사는 새로운 시대를 끌고 나갈 제13대 대통령(1987.12.16)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가장 큰 관심사는 ‘대통령 직선제’였고, 선거에 나선 후보는 김대중(이하 DJ), 김영삼(이하 YS), 김종필(이하 JP), 노태우, 그리고 백기완이었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고 했던가. 정권이 붕괴될 위기를 629선언으로 정면 돌파한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제일 먼저 치고 나가는 가운데, 민주화운동 진영이 맞닥뜨린 도전은 DJ와 YS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였다.
민정당 총재에 취임한 노태우 후보가 미국과 일본을 방문하면서 ‘인정받기 퍼포먼스’를 펼치는 동안, 민주화운동 진영은 후보 단일화 문제를 놓고 본격적인 분열의 와중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당시 유리한 쪽은 YS였다. 민주당 내 분위기가 DJ보다 더 유리한 상황에 있었고, DJ가 직선제 개헌만 된다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언(1986.11.15)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YS는 후보 단일화 문제를 민주당의 내부문제로 다루고자 했다.
그러나 선명성과 진보성, 그리고 대중연설에서 상대적으로 앞서 있던 DJ는 자신의 불출마 선언을 번복했다. 번복의 변은 ‘변화된 상황’이었고, 논거는 전두환 대통령이 직선제를 자발적으로 수용할 경우에 한해 불출마 선언이 유효한데, 그것을 거부하는 413호헌조치가 발표되는 순간 무효가 되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DJ는 후보 단일화 문제를 민주당 밖으로 끌고 나가고자 했다.
그해 10월, DJ가 광주와 목포, 대전, 인천에서 지지세를 과시하는 동안, YS는 민주당의 후보 자격으로 대통령 출마를 공식 선언한 후, 부산 수영만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그리고 10월 말, DJ는 대통령 출마를 위해 평화민주당 창당대회를 열었다. 11월 들어 JP 역시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대선 레이스에 뛰어들었다.
만약에...
이 시기는 2015년의 대한민국을 여전히 망령처럼 떠돌고 있는 지역구도가 노골적으로 표면화된 시기였다. 왜냐하면 당시 각 후보들이 가장 공을 많이 들였던 선거 전략이 다름 아닌 지역주의였기 때문이다.
노태우 후보는 대구와 경북, 즉 TK지역에 의존했고, YS는 부산과 경북, 즉 PK지역에 의존했으며, DJ는 호남 지역주의에 근거해 ‘DJ가 호남과 서울에서 이길 수 있으므로 YS와 JP가 노태우 후보의 표를 분산시킨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4자 필승론’에 의존했다.
그러나 세 사람 중 선거에 가장 전략적으로 임한 이는 노태우 후보였다. 그는 영호남이 대립하도록 구도를 짜면 야당에 대한 지지가 분산될 것이라 확신, 마음껏 써먹을 수 있는 TV 등 친 정부 언론을 활용해 영호남의 지역감정을 부추겼다. 그리고 그가 내건 기치는 ‘안정론’이었다.
이후 DJ가 여의도 광장과 보라매공원에 각각 130만과 150만 인파를, YS가 여의도 광장에 130만 명을 동원하며 기세를 올렸고, 노태우 후보 역시 여의도 광장에 130만 명을 동원하며 맞불을 놓았다. 만일 그 상태로 선거가 치러졌다면, 어쩌면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1월 29일, 노태우 후보에게 천운과도 같은 호재가 발생했다.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향하던 KAL 858편 여객기가 공중 폭파되는 참사였다. 폭파범 마유미가 선거 하루 전날인 12월 15일 김포공항에 도착하는 모습이 TV에 대대적으로 방영되었고, 그것으로 노태우 후보의 ‘안정론’은 깔끔하게 완성되었다.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단어가 없다지만, 당시 후보 단일화가 이루어졌더라면, 그래서 ‘문민정부’나 ‘국민의 정부’가 그때 들어섰더라면, 절차적 민주화조차 퇴행기를 맞고 있는 이 땅의 민주주의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보곤 한다.
DJ와 YS를 통합할 인물은?
내년의 총선과 2017년 대선을 앞둔 지금, 전직 대통령 YS가 남긴 정치적 유산의 면면을 살펴보며 대선 후보를 점쳐보는 일도 적지 않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실 DJ가 남긴 유산 역시 살펴야겠지만, 그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상대로 선거를 치를 정도로 오랜 연륜을 가졌고, 그의 뒤를 따른 정치인 중 현실 정치에 관여하는 이가 박지원 의원 정도인 터라, 예측의 의미가 반감되는 것이 아쉽다.
이쯤에서 야합이라는 비난까지 들어가며 감행했던 ‘3당 합당’ 당시, YS가 내질렀던 일성을 되새겨보자.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해석하자면, 호랑이는 전두환에 이은 노태우 정권이고, 호랑이를 잡으려는 사냥꾼은 그가 그때까지 몸담았던 진영, 즉 민주화 진영이다. 그리고 호랑이 굴은 민정당이다.
그의 일성은 청와대 입성 후 인사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최형우, 김동영, 안상수, 정의화 등 많은 정치인들이 그를 거쳐 갔고 또 정치를 하고 있지만, 지금의 정치판도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는 인사들을 분류해 보면, 그가 호랑이 굴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가 비교적 선명해진다.
노무현, 손학규, 김문수, 이재오, 홍준표, 이회창, 이인제, 이명박
좌측에 명기된 네 사람은 진보, 우측에 명기된 네 사람은 보수로 분류된다. 이름만 들어도 화려한, 이른바 YS 키즈들이다.
현 시점에서, 이들 중 누가 YS가 남긴 정치적 유산의 적임자가 될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누가 이번 대선의 적임자일까? 이미 대통령을 지낸 두 사람과 대선에서 고배를 마셨던 두 사람을 제외하면, 손학규 전 상임고문,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이재오 전 의원,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남는다.
그러나 홍준표 지사는 보수 진영 인사이니 제외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YS가 키워낸 보수 진영 인사들 중 친박의 서청원, 비박의 김무성이라는 막강 실세들이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때 구로구 노동운동의 신이라 불렸던 김문수 전 지사 및 민주화운동 진영의 강자였던 이재오 전 의원 역시 보수 쪽으로 갈아탔으니 제외다.
남은 이는 손학규 전 상임고문뿐. 문재인 대표의 리더십이 심각한 곤경에 처해 있는 지금, 야당을 통틀어서 민주화운동 경력을 바탕으로 진보와 보수를 아우를 수 있는 리더십을 가진 인물, 그래서 YS의 정치적 아들을 자칭하는 김무성 대표와 정치적 대부를 자칭하는 서청원 최고위원의 ‘무턱대고 오른쪽’을 상대로 ‘DJ와 YS의 통합’을 이루어낼 만한 인물이 누가 있을까? 안철수 전 대표? 김한길 전 대표?
YS가 호랑이 굴로 들어갔던 이유는 호랑이를 죽여 버리려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YS 말기에 혜성과 같이 등장했던 이인제 전 후보처럼 전혀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호랑이 굴에서 호랑이를 생포해낼 수 있는 인물은, 지금으로서는 손학규 전 상임고문, 한 사람뿐이다.
그러려면 DJ가 그랬던 것처럼, 정계은퇴를 번복해야 한다. 과연 번복할까? 번복한다 해도 좌측으로만 달리는 사람들과 우측으로만 내빼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마르크스의 ‘대립물 통합의 법칙’이라도 구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년에 펼쳐질 여우 사냥에 총대를 메고 뛰어드는 무리수도 두지 않아야 한다. 이런 시나리오, 현실화될 수 있을지... 답은 물론 천심, 즉 민심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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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동안 멋지게 개혁할끼다”라며
유신체제의 딸 밑에서 충성하려 경쟁
이인모 송환뒤 색깔론 극성
“어제 갔다. 옛날 상도동 사람들 여럿을 봤는데 그 가운데 제일 반가워하고 나를 껴안고 울먹이는 사람은 최형우였다. 나도 최형우의 뺨을 어루만지면서 탄식했다. ‘와이에스(YS) 왼쪽에 김동영이가 살아 있고, 오른쪽에 당신이 건강하게 있었더라면 와이에스가 역사에서 더 빛나는 삶을 보여주었을 텐데…’ 그렇게 말하면서 내 마음이 찢어지더라.”
-왜 그리 가슴 아팠나?
“지금 완전히 유신체제로 돌아갔다. 유신의 딸이 아버지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노력이 끈질기다. 그런데 와이에스한테 정치를 배웠다는 사람들, 스스로 정치적 아들이니 제자니 말하는 사람들이 하는 행태를 보면 와이에스의 과감하고 뚝심있는 개혁 정치인으로서 모습들은 다 망가지고 말았다. 와이에스를 국회에서 제명하고 탄압했던 유신체제의 딸 밑에서 충성을 다하려고 서로 경쟁하고 있지 않나. 정치적 허무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정치적 후퇴로 인해서 우리가 또 당해야 할 고통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 세대에서 이 고통은 끝났으면 좋겠다. 와이에스를 정치적 대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와이에스를 가장 모르고 오해하고 있다.”
-수십년을 모셨던 분들인데.
“코끼리 만지는 셈이다. 와이에스의 정치역정 가운데 와이에스가 스스로 자랑스럽게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유산은 안 보고, 물려주고 싶지 않은 유산만 확대재생산해서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서 활용하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육문회(育文會)라는 게 있었다. 서울대 문리대를 육성하자는 문리대 출신 인사들의 모임이다. 여기서 와이에스를 1970년대초에 만났다. 여백의 미랄까, 소탈한 게 참 좋았다. 79년도에는 이철승씨와 당권경쟁을 벌일 때인데, 이철승씨가 미국에 가서 유신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해 조선일보 칼럼에다 ‘야당의 당수냐, 여당의 선전부장이냐’는 글을 썼다. 이철승씨 쪽으로부터 협박도 많이 당했는데, 와이에스가 격려를 많이 해줬다.”
-93년에 통일원 장관 겸 부총리가 되셨다.
“애초에는 비서실장을 제안하셨다. 1월초 신라호텔에 불러서 갔는데 ‘한 박사 나 도와줘야지’라며 비서실장 얘기를 꺼냈다. 서동권 안기부장의 건의사항을 전하는데, 인화단결하려면 이홍구, 밀어붙이려면 최병렬, 정말 개혁하려면 한완상을 쓰라는 거야. 그러면서 ‘서 부장 말이 논리가 있고 맞아. 마누라한테도 얘기하면 안 돼’ 그러는 거야. 겁이 덜컥 났지. 감당할 수 없었어. 최형우가 냄새를 맡고 와서 ‘잘 모셔야 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조심해라’고 말을 했어. 최형우 예감대로 됐지. 결국 그 사람들이 중요한 자리를 다 차지했어.”
-그때 맡으셨으면 김영삼 정부도 많이 달라졌을 텐데.
“하하 그럴지도 모르지.”
-통일부총리 시절 이인모 송환 문제 등으로 공격을 많이 받으셨다.
“3월2일 조찬을 했다. 통일문제를 물으시길래 ‘대통령도 기독교 장로 아니냐,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면 원수 속의 악이 근원적으로 약화되는 거다’라고 했더니 팍 알아들으시더라. 이인모를 북한 품으로 보냄으로써 인도주의의 힘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건의했다. 가만히 듣기만 하셨는데, 9일 갑자기 언론사 사장들과의 만찬에서 기분이 좋으셨는지 ‘특종 줄게’ 하면서 이인모 북송을 발표해버렸다. 차곡차곡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그렇게 불거지니 내가 총대를 멜 수밖에 없었다.”
-와이에스에게 섭섭하지 않았나?
“조선일보 등이 나를 친북좌파로 몰 때 대통령이 한두번쯤은 전화로 위로해주실 줄 알았다. 한 부총리 애쓴다고. 그런데 일체 없었다. 나도 아무 말 않고 있다가, 97년 12월 청와대 들어오라고 하길래 가서 말을 했다. ‘왜 특정 언론사 색깔론에 한마디 안 하셨나요.’ 어린아이처럼 웃으시면서 ‘한 박사 쫓아내라고 수백통씩 편지가 오는데, 참 어렵더라’고 하시는 거야. 그러니 뭐 더 말할 게 없지.”
-주변사람만의 책임인가?
“와이에스가 적대적 공생관계를 깨달았으면 그렇게 안 하죠. 체제의 권력 엘리트들은 남북 모두 악화를 빌미로 해서 자기 권력을 강화하려고 한다. 그 사람들은 남북관계 악화를 기다리는 거야. 그 프레임에 대통령이 갇힌 거야. 남북관계가 악화되면 민주화 인권실현 복지 경제민주화 등 모든 개혁의 내용이 좌절된다는 진실을 와이에스가 몰랐어. 진실을 깨달을 만한 가슴이나 머리의 능력이 있었다면 달라졌겠지. 냉전수구 세력들의 여러 가지 참새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한 거야. 나중에는 냉전수구 세력들이 ‘와이에스는 드디어 우리 손안에 잡혔다’고 환호작약했지. 그래도 와이에스는 여백이 있는 인간이니, 주변에 정말 철학과 비전, 용기 있는 사람이 채워졌으면 달라졌을 텐데, 수구냉전 세력이 그 여백을 메워버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