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보수, 10년 전부터 “자학사관” 검인정 흔들기…“유신 회귀” 역풍
검인정 역사교과서는 2003년부터 교육현장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제7차 교육과정에서 고등학교 2, 3학년들이 배우는 ‘지리’는 필수 과목으로, ‘역사’는 선택 과목으로 결정됐다. ‘한국 근현대사’는 6종의 검인정 교과서가 채택됐다.
2004년 한나라당과 조선일보는 갑자기 검인정 ‘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했다. 한국 정부에는 비판적이면서 북한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특히 독재정부에 대한 비판은 ‘자학사관’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자학사관’이라는 용어는 일본의 극우파들이 기존 역사교과서를 비판할 때 사용하는 용어였다.
검인정 역사교과서 집필에 적극 참여했던 역사학계는 ‘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한 비판은 아무런 근거가 없고, 정치적·사상적인 공세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보수 언론은 특히 금성출판사의 교과서를 타깃으로 비판을 이어갔다. 이런 비판은 2005년 교과서포럼의 조직으로 이어졌다.
■교과서포럼이 만든 ‘대안교과서’
교과서포럼은 “역사를 바로 씀으로써 미래세대를 올바르게 인도하고, 각종 근현대사 교과서를 분석·비판하면서 대안을 제시하겠다”는 목표 아래 조직됐다. 교과서포럼에는 한국사를 전공하는 역사학자들이 거의 참여하지 않아 교과서를 비판하는 데 많은 한계가 있었다. 교과서포럼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6년 2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책세상)을 출간했다. 이 책 1권은 기존 한국 역사학계의 민족주의·국가주의적 경향을 비판하는 학자들에 의한 일제강점기 관련 분석이 주된 내용이었고, 2권은 교과서포럼 관련자들의 현대사 인식을 뒷받침하는 글들로 구성됐다. 제목을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재인식)이라고 한 것은 1979년 10월에 첫 출간된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재인식>에 참여한 필자들의 성향에는 큰 편차가 있었고, 이를 의식한 교과서포럼의 이영훈은 2007년 <대한민국 이야기>(기파랑)를 펴내기도 했다.
2006년 교과서포럼은 ‘대안교과서’를 출간하겠다고 선언했다. 그해 11월29일 열린 교과서포럼의 심포지엄에서 4·19혁명동지회와 4·19유족회 등 5개 단체 회원들이 포럼 참석자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사태가 발생했다. 교과서포럼의 대안교과서 시안에 4·19 혁명을 4·19 학생운동으로, 5·16 쿠데타를 5·16 혁명으로 기술했기 때문이었다.
교과서포럼을 지지하고 있었던 뉴라이트 계열의 자유주의연대 등 5개 단체는 대안교과서에 대해 “일부 소수자의 사견이 조직 방침인 양 유포된 교과서포럼의 시안은 산업화에 대한 지나친 미화와 민주화에 대한 평가절하라는 오류와 편향을 보이고 있다”며 “잘못된 시안 발표로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4·19 등의 관계자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뜻을 전한다”는 성명을 내놓기도 했다.
2008년 이명박 정부의 출범은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의 진행 방향을 바꿔놓았다. 우선 교과서포럼은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2008년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를 출간했다. 이 책은 교과서는 아니었지만, 기존의 교과서를 대체하는 역할을 하겠다는 의미에서 ‘대안교과서’라는 이름이 붙었다.
대안교과서는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근대 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근대 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라고 규정하는 한편, 현대사를 해방과 국민국가의 건설, 근대화 혁명과 권위주의 정치, 선진화의 모색이라는 3부로 구성됐다. 같은 해 5월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대안교과서 출판기념회에서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뜻있는 이들이 현행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청소년들이 잘못된 역사관을 키우는 것을 크게 걱정했는데 이제 걱정을 덜게 됐다”고 축사를 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쟁의 출발점이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한국의 대학교수들이 포함된 뉴라이트가 만든’ 이 교과서가 일제강점기를 찬미하고 있다고 하면서 조선일보의 보도를 인용해 “균형 잡힌 역사 교육의 첫걸음”이란 논평을 내놓기도 했다.
■대안교과서의 역사적 사실 왜곡
역사학계에서는 그해 6월 열린 학술토론회에서 “교과서포럼의 대안교과서가 편향돼 있다”는 비판을 제기했다. 역사학자들이 거의 참여하지 않은 가운데 역사적 사실의 오류가 적지 않으며,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 강조하면서 항일운동을 이승만을 중심으로 축소했고, 친일 문제에 대해서는 친일이 불가피했다는 점과 전 국민이 친일을 했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기독교와 재벌 중심의 서술이라는 비판을 제기했다. 김구가 일본 상인을 군인으로 오인해 살해하였다고 서술한 점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됐다.
대안교과서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자 검인정 교과서 참여로 국면이 전환되었다. 교과서포럼은 ‘한국현대사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교학사에서 역사교과서를 발간해 2013년 검인정을 통과했다. 학계와 시민사회의 많은 비판 속에서도 교학사 교과서가 검인정에 통과한 것이다. 하지만 지난해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곳은 부산 부성고교뿐이었다. 이는 일본에서 일본 극우세력이 편찬한 교과서 채택률보다 낮은 것이었다.
교학사 교과서에 대한 논쟁이 진행되는 동안 이명박 정부는 기존의 ‘근현대사’ 검인정 교과서에 대한 수정을 요구했다. 2009년부터 시작된 수정 요구는 6종의 검인정 교과서에 모두 해당되는 것이었지만, 보수 언론이 비판의 타깃으로 삼았던 금성 교과서에 대한 수정 요구가 논쟁의 초점이 됐다. 교과서 집필진이 수정을 거부하면서 정부의 교과서 수정 요구는 법원으로 넘어갔고, 법원은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2009년 제7차 교육과정을 수정해 ‘근현대사’ 교과목을 없애고 ‘한국사’로 통폐합했다. 통합 ‘한국사’ 교과서는 2011년부터 사용하도록 해 2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졸속으로 교과서를 펴내야 했고, 정부는 새 교과서에 대한 철저한 집필 지침을 내리고 검인정 과정을 강화했다.
기존 교과서 내용은 수정됐고, 2011년부터 사용된 한국사 교과서는 정부의 검인정을 거쳤는데도 지난해부터 이들 교과서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다. 현행 한국사 교과서의 내용은 청와대에서도 이미 검토한 것이라는 전 국사편찬위원장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전격적으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했다. 1973년 유신체제의 국정 교과서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국정 교과서 체제로의 회귀는 2005년 시작된 교과서 논쟁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교과서포럼과 보수 정치인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종착점이기도 하다.
■역사교과서 논쟁의 기원
93년 ‘박정희와 김영삼의 화해’ 조갑제 글로 촉발
‘단계론’ 역사평가 주장…이승만 띄우기로 이어져
1993년 11월 ‘월간조선’에는 조갑제의 ‘박정희와 김영삼의 화해’라는 글이 실렸다. “모택동(毛澤東)을 보호한 등소평(鄧小平)의 역사관이 중국 개방의 성공을 보장했다. 한국 현대사와 역대 대통령에 대한 김영삼 대통령의 부정적인 역사관은 그의 국정운영에도 반영되어 국기(國基)의 수호와 대통령의 역할과 관련된 심각한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다. 건국-반공-경제발전-민주화로 이어진 국가건설의 흐름이 아니라 투쟁과 반대의 노선에 정부 정통성의 입각점을 두고 있는 김 대통령은 특히 박정희 지지세력의 반발을 사고 있고 자신의 권력기반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과거와 화해한 바탕에서만 미래로, 세계로 나갈 수 있다.”
이 글은 보수진영 역사관의 바이블 같은 역할을 했다. 한국현대사를 건국, 산업화, 민주화, 선진화의 네 단계로 나눠 각각의 시기마다 지도자들이 적절한 역할을 한 점에 대해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과오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공헌을 감안해 과오를 덮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1995년을 전후해 보수 신문에 의한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라는 캠페인으로 연결됐고, 2000년대 교과서포럼과 보수 정치인들이 내놓은 주장의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어느 나라든 건국과 산업화, 민주화는 각각의 단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진행된다. 건국은 국가를 수립하는 시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정체성을 갖는 과정 전체를 의미한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주장이다. 대한민국이 북한에 비해 정통성을 갖는 것은 지난 70년 동안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통해 성공적인 건국을 진행해오고 있기 때문이지 1948년 정부 수립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왜 각각의 단계를 구분하려는 것일까? 과거의 잘못을 덮고자 하는 것이다. 과거를 성찰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 역사는 홍보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