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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김덕권칼럼] 시진핑의 국수..
오피니언

[덕산 김덕권칼럼] 시진핑의 국수

김덕권 기자 duksan4037@daum.net 입력 2018/04/24 09:33 수정 2018.07.05 09:07

시진핑의 국수

누가 저에게 “남은 인생 하고 싶은 일이 더 있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 까요? 인간은 사랑을 주는 존재이고, 사랑을 받는 존재입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밥만 먹고 살 수 없습니다. 먹지 않으면 허기가 지는 것처럼 사랑받지 않으면 외로워지는 법입니다. 사랑을 받으면 행복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받기만 하고 베풀지 않으면 병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바로 그 병이 외로움이 아닐까요? 외로움은 사랑을 받지 못해서 생긴 병이기도 하지만 주지 못해 생기기도 합니다. 사랑받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 원활해야 행복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남에게 사랑받지 못 하는데, 어떻게 사랑을 주느냐? 가진 것이 있어야 남에게 베풀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 했습니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는데 돈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돈 안드는 그 사랑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을 받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진리이지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사랑을 베풀면 행복이 오고, 베풀지 않으면 행복이 없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입니다.

중국의 시진핑 국가 주석의 어릴 적 일화가 있습니다. 시진핑은 누가 뭐래도 중국 13억 인구 중에서 제일 성공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성공의 밑바탕에는 훌륭한 아버지의 교훈이 있었습니다. 시진핑은 어렸을 때 매우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아이였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친구들이 하나둘 곁을 떠나고 외톨이가 되어있는 데도 시진핑은 그게 자신의 잘못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국수 두 그릇을 삶아오셨습니다. 한 그릇은 계란이 한 개 올려 져 있고, 다른 그릇에는 계란이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계란이 매우 귀했던 시절이었지요. 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것을 먹겠느냐?” 시진핑은 당연히 계란이 있는 그릇을 골랐습니다. 그런데 거의 다 먹어 갈 즈음 아버지 그릇에는 국수 밑에 두개의 계란이 있었습니다.

화가 나서 후회하는 시진핑에게 아버지는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눈에 보이는 게 다가아니다. 남을 쉽게 이기려면 오히려 네 가 지는 법이다.” 다음날 아버지가 국수 두 그릇을 식탁위에 올려놓고 아들을 불렀습니다. 한 그릇은 계란이 있고 한 그릇에는 없었습니다. “고르거라!” 이번에는 당연히 계란이 없는 그릇을 골랐는데, 아무리 국수 밑을 찾아봐도 계란이 한개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웃으시면서 또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아들아! 너무 경험에 의존하지 마라. 삶이 너를 속일 것이다. 그럴 땐 화를 내거나 실망하지 말고 교훈으로 삼아라.” 또 다음날 아버지는 국수 두 그릇을 중 하나를 고르라 하셨습니다. 이번엔 아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가족을 위해 희생을 해오셨으니 아버지께서 계란이 있는 국수를 드시는 게 당연합니다. 저는 계란이 없는 국수를 먹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신의 국수에 계란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의 국수 밑에는 계란이 두개나 들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또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남에게 베풀어라! 그러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너에게 되돌아온다는 걸 잊지 말거라!” 시진핑은 아버지가 주신 이 세 가지 교훈을 명심하고 살아왔고 솔직히 오늘의 성공은 이 교훈 덕택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베풀되 티를 내고 베풀면 안 됩니다. 상(相)을 내지 않고 베푸는 것을 불가(佛家)에서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고 합니다. 베풀되 주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그냥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주는 것이 보시이지만 결국 자기 자신에게 주는 것이 보시인 것이지요.

우리가 베풀면 보시공덕이 따릅니다. 보시하는 것이 곧 아름다움을 보시하는 것이고, 행복을 보시하는 것이며, 힘을 보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에게 보시를 하면 결국 자신에게도 베푸는 것이 되기 때문에, 자신도 역시 아름다움과 행복 그리고 힘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보시는 ‘회향(回向)’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은 모든 공덕을 이 세상을 살다 간 모든 ‘유주무주(有主無主)의 고혼(孤魂)’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보시공덕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물질과 재물은 나누면 줄어들지만, 보시공덕은 아무리 나누어도 줄어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누면 나눌수록 더 커지는 것이 보시공덕입니다. 어떤 사람이 얼마쯤 원불교에 기증하면 공덕이 있다고 하냐고 물어 왔습니다. 아무리 기증을 많이 해도 공덕은 없습니다. 얼마쯤 기증해야 공덕이 있다고 평가되느냐고 질문을 하는 순간에 공덕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무얼 바라고 보시하는 것을 원불교에서는 유상보시(有相布施)라고 합니다.

유상보시는 작은 복은 될지언정 큰 공덕은 되지 못합니다. 항상 보시는 무상보시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유상보시가 될 경우 그것이 오히려 화(禍)가 될 수도 있습니다. 소태산(少太山) 부처님께서는 ‘유상보시’와 ‘무상보시’의 공덕의 차이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시를 하는 것이 비하건대 과수에 거름을 하는 것과 같나니, 유상보시는 거름을 위에다가 흩어 주는 것 같고, 무상보시는 거름을 한 후에 묻어 주는 것 같나니라. 위에다가 흩어 준 거름은 그 기운이 흩어지기 쉬운 것이요, 묻어 준 거름은 그 기운이 오래가고 든든하나니, 유상 보시와 무상 보시의 공덕의 차이도 또한 이와 같나니라.」

그런데 남을 위해 베푸는 것에는 물질 외에도 세 가지 공덕이 있습니다. 첫째는 심공덕(心功德)이고, 둘째는 행공덕(行功德)이며, 셋째는 법공덕(法功德)입니다. 그리고 정신 육신 물질로 도덕회상(道德會上)을 크게 발전시키는 공덕 이상의 큰 공덕은 없습니다. 바로 이 무상공덕(無相功德)이 ‘맑고 밝고 훈훈한 세상을 펼쳐가는 덕화만발 가족의 공덕’이며, 제가 이 생명 다하는 날 까지 그처럼 하고 싶은 일이 아닐 런지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4월 24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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