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은 한국 경제상황이 1997년 외환위기 때와 흡사하다는 '위기론'에 대해 "유사점이 적지 않지만 그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고 말한다.
한계기업이 급증하고 전 산업군이 암흑의 터널에 갇혀 있는 형국이지만 외환위기 당시 한보와 기아 대우 등 대기업들이 연쇄부도에 처한 것처럼 도미노 기업부실 사태로 이어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것이다.
외환위기 당시 기업 구조조정을 담당했던 금융업계 한 관계자는 "과도한 부채에 허덕이는 '좀비기업'이 늘고 한국 경제를 둘러싼 외부환경이 외환위기 때보다 좋지 않은 측면이 있다"면서도 "국내 기업들의 전반적인 펀더멘털(기초체력)은 그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튼튼해진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한국 기업의 기초가 외환위기 때보다 훨씬 단단해졌다는 사실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국내 30대 그룹의 평균 부채비율은 519%에 달했다. 반면 올 상반기 말 유가증권시장 상장기업의 평균 부채비율은 123% 수준으로 당시의 1/4 수준에 불과하다. 외환위기 직후 정부 주도의 강력한 기업 구조조정의 영향으로 1998년 4월 당시 804개에 달했던 30대 그룹 계열사는 1999년 1월 703개로 100개 이상 줄었다. 1998년 30대 기업집단이 분사시킨 회사도 277개에 달했다.
이에 반해 국내 대기업들의 자발적 구조조정이 시작된 작년 11월 국내 상호출자제한 대기업집단의 계열사 수(1675개)와 지난 11월 현재 계열사 수(1668개)는 큰 차이가 없다. 외환위기 때처럼 대대적인 계열사 매각 작업이 이뤄질 정도의 상황은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위기 경고음이 점점 커지고 있는 건 기업을 둘러싼 대내외 경영환경이 외환위기 때에 준할 정도로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의 저성장 구조 고착화, 중국의 경제성장 둔화와 저유가 기조, 최근 미국의 금리인상 이후 신흥국 경제불안과 수출경쟁력 악화 우려 등으로 실제 기업들의 체감경기는 한파에 가깝다. 외환위기 때나 지금이나 무리한 사업 다각화와 차입 구조가 기업들을 벼랑 끝으로 몰았다는 점도 비슷하다. 한보그룹은 과도한 외부차입을 통해 당진제철소 건설 등 사업확장을 시도하다 된서리를 맞았다.
해태는 중장비와 소비가전 시장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부실화됐다. 대우그룹도 부채로 쌓은 세계경영의 모래성이 무너지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대마불사'식 사업 다각화와 덩치키우기에 집착하다 부도 사태를 맞은 셈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사업 다각화와 덩치불리기에 나섰던 경영위기에 처한 기업들도 외환위기의 악몽이 재연되는 걸 막기 위해 뼈를 깎는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다. 사업재편은 물론 계열사 매각, 인력감축 등 전방위적으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일상화되는 추세다. 경험이 전무한 해양플랜트 사업을 확대하다 벼랑 끝에 몰린 대우조선해양과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등 조선 3사는 고강도 구조조정 작업을 진행 중이다.
포스코의 경우 2013년 70개까지 늘었던 계열사 수를 지난 10월 말 현재 46개 수준으로 대폭 정리했다. 본업인 철강업과 무관한 비핵심 사업군을 정리해 수익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다.
삼성그룹도 선제적 구조조정에 나섰다. 지난해 11월 한화그룹에 삼성테크윈과 삼성토탈 등 4개사를 매각하는 '빅딜'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사업재편을 진행했다. 현대차그룹도 현대제철과 현대하이스코를 합병하는 사업구조 개편을 단행했으며 현대중공업은 계열사인 현대종합상사와 현대씨앤에프를 매각해 계열분리하기로 결정했다.
희망퇴직 등 인력 구조조정에 나서는 기업도 늘고 있다. 두산인프라코어는 올해 희망퇴직 프로그램을 통해 1532명을 내보냈고 현대중공업도 1300여 명에 대해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대우조선해양은 부장급 이상 300명의 인원을 감축했다.
정부가 직접 나서 구조조정을 독려하는 업종도 있다. 수년간 이어지고 있는 해운업 침체로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현대그룹 계열 현대상선이 대표적이다. 시장에선 현대상선과 한진해운 혹은 다른 대기업의 '인수합병설'이 끊이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