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 교과서 세대라 국사, 그러니까 한국사를 다른 시각으로 이해해 볼 겨를이 없었다. 당시 우리 세대 아이들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봤을 것이다. '아, 신라 나쁘다.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으면 만주가 다 우리 땅이었을 테고, 거기 천연자원도 다 우리나라가 가졌을 텐데.' 뭐 이런 상상 말이다.
고구려는 유목 국가였다. 화하족(한족)이 고대부터 두려워하던 북방의 여러 유목 민족이 혼합된 제국 체제를 유지했다. 이들이 신라의 통일을 기점으로 한반도에 정착하면서 변한(한반도)의 사람들과 섞여 장기간 단일 체제로 역사적 경험을 공유했고, 한민족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대강 이 정도의 역사 인식을 하고 있다.
고구려가 정말 삼국을 통일했다면? 일단 그 당시는 강력한 단일 제국 체제를 유지했을 공산이 크다. 당시 중국은 삼국 시대부터 수백 년간 이어진 내분을 끝내고 막 당 제국 체제로 들어선 시기였다. 오랜 기간 중국과 싸워온 고구려는 통일한 후, 힘을 기른 중국과 맞서기 위해 국방력을 서쪽에 집중시켰을 것이다. 고구려만큼 강력한 북방 국가 체제가 좀처럼 수립되기 힘들었음을 고려하면, 어쩌면 고구려도 요, 금, 원, 청처럼 중국 본토에 들어섰을 수도 있다. 중국을 가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 왕조를 세웠던 북방 계열 국가 중 자기 문화를 여태 간직한 나라가 있던가? 거란, 여진, 돌궐이 사용하던 문자, 언어 체제를 그대로 간직하고 현재까지 남은 독립국 체제가 있나? 몽골 정도를 제외하면 찾기 어렵다. 고구려가 강성했다면, 오히려 우리 민족이 중국에 흡수되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은 무리가 아닌 셈이다.
<말하지 않는 한국사>(최성락 지음, 페이퍼로드 펴냄)는 이처럼 우리 역사에서 누구나 궁금증을 갖기 마련인 이야기 42가지를 추려 뽑아, 우리 역사가 좀처럼 드러내놓고 가르쳐주지 않던 이야기를 던진다. 이야기 일부는 지나친 민족 중심 사관에 지친 사람들이 환호를 보낼 만하고, 일부는 실제 불편한 이야기다. 역사학도는 아니지만, <조선왕조실록> 400권을 모조리 소장한 역사 마니아인 저자 스스로 "불편한 책 한 권이 나왔다"고 말할 정도다.
다시 삼국 통일 시대로 돌아가 보자. 저자는 이 전쟁을 '신라의 삼국 통일 전쟁'으로 보지 않는다.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 전쟁'으로 해석한다. 당나라가 눈엣가시였던 고구려를 멸하기 위해 우선 백제를 무너뜨려 고구려의 방위 전선을 넓히고, 이후 고구려를 멸했다는 이야기다. 신라는 어디까지나 조역일 뿐이다.
백제 멸망 후, 백제 부흥군이 일어난 사실은 우리도 알고 있다. 이때 일본이 무려 함선 400척에 병사 4만 명을 보내 백제를 도왔다. 일본 역사에서는 유한 백강 전투(현재의 금강 부근에서 일어난 전투)다. 이 전투에서 패한 후, 백제 유민 10만여 명이 일본으로 망명했다. 저자도 말했듯, 임진왜란 때 큰 전투였던 한산도 대첩에 일본이 동원한 전함 수는 73척이다. 이 규모만 해도 대전이다. 당시 일본이 백제의 부흥을 위해 가히 국력을 총동원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0만 명에 달하는 난민을 받아들인 일본도 놀랍다. 당시 백제가 신라보다 일본과 정서적으로 더 가까웠던 셈이다. 한민족 개념이 역사 시대를 거치며 사후 형성되었음도 짐작 가능한 대목이다. 관련해 박종기 교수가 쓴 <고려사의 재발견>(휴머니스트 펴냄)을 보면, 한민족 개념은 고려 시대 들어 구체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몰랐던 역사뿐 아니라, 애써 눈감고 지낸 역사적 사실도 이 책은 캐낸다. 한국 전쟁은 북한의 남침이 아니라 사실상 내전 상태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한국인 대다수는 이 주장을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취급한다. 북한이 기습 남침했다는 게 우리의 정설이다. 이 책은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한다. 개전 후, 곧바로 이어진 건 미군 공군의 북한 폭격이었기 때문이다. 북한 육군은 시종일관 남하했으나, 하늘에서는 개전 초기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 공군의 폭격이 이어졌다. 일제가 북한에 세워뒀던 군수 공장이 모두 고철 더미가 된 건 전쟁 초기부터 이어진 미군의 폭격 때문이다. 그렇다면, 북한 사람들이 역사에서 배운 "미제가 한반도를 무력 침공했다"는 주장은 사실일까, 아닐까.
우리는 무궁화가 국화라는 데 의문을 가져본 적 없다. '애국가'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고 한다. 무궁화가 한반도 전역에 다 피어 있다는 소리다. 그런데 실제 우리 강산에 무궁화가 많이 보이나? 봄에는 개나리가 피고,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핀다.
무궁화는 하와이의 꽃이다. 한반도와 관계없다. 미국을 좋아하던 이승만이 그냥 국화로 정한 것 같다. 비슷하게, 북한의 국화가 모란인 이유도 김일성이 단지 좋아했기 때문이다.
곳곳에서는 의문 부호가 붙을 이야기도 나온다. 앞뒤 맥락을 제거한 탓에 자칫 역사를 일방적 관점으로 이해해 버릴 가능성이 있는 부분도 눈에 보인다. 저자는 한국 전쟁 시기 미군의 흥남 철수 작전을 예찬하고, 미군의 원조가 한국의 부흥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를 말하지는 않는다. 미군의 민간인 학살이 대규모로 이뤄졌다는 증거는 이미 노근리 학살 등으로 인해 역사적 사실이 되었지만, 책에서는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이 책만 읽고 "역사가 실은 이랬다"라고 말하는 데는 무리가 따를 것이다. 이 책의 목적 자체가 단편적 사실을 짚고 넘어가는 데 있지, 역사의 전면적인 해석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 모르고 넘어갈 뻔한 이야기가 많은 데다, 상상으로만 그쳤을 가능성에 물꼬를 터주는 이야기가 많아 매력적이다.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강대국이 되기 어렵다는 이야기에는 고개를 끄덕하게 되고, 조선이 얼마나 미개한 국가였는가를 여러 대목에서 다루는 부분에서는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박정희 정권이 화교를 얼마나 강력히 탄압했는가를 다루는 대목 이후, 우리가 과연 일본의 배타적인 외국인 정책을 비난할 자격이 되느냐는 물음이 나올 땐 절로 저자의 입장에 찬성하게 된다.
역사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관점을 가지기 위해서는 이런 단편의 조각을 맞추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책은 일견 변방의 역사로 취급되기 마련이던 이야기들을 끌어와, 현재의 재가공을 위한 재료로 적절히 이용한다. 전근대사부터 현대사까지 두루 다루고, 우리의 문화 의식에 담긴 이야기도 소개한다. 각 단락이 짧아 읽기에 부담 없고, 참고 서적으로 소개된 자료를 통해 더 깊은 역사 이야기로 빠져 들어갈 안내서로서도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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