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애자 장편소설 〖모델하우스〗제95회
앵무새 소리
애춘은 고개를 저으며 만약 거꾸로 채성이〈아내〉를 주제로 그림을 그린다면 생명과 감각이 마비된 플라스틱 인형을 그렸을 것 같았다. 늘 꽃과 나비의 둘레를 맴돌며 자신의 몸을 조각하는 어느 방탕녀의 모습을 그렸을 것이다. 붓대를 멈추고 망설이다가 애춘은 화실에서 나왔다. 내일부터는 화실에서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이 훌륭한 그림을 잘 보관하시고 가끔 제가 댁에 구경하러 가도 괜찮겠지요? 그리고 더 훌륭한 명화가 탄생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총기와 지혜가 어린 커다란 눈동자를 반짝이며 자신을 고무시키던 지선의 모습이 애춘의 눈에 아른거렸다. 모델하우스에 자신의 모든 삶을 물질과 함께 투자하며 살고 있는 지선이 진정 부자였다. 참으로 위대하게 여겨졌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창가에서 지켜본 장면들이 눈앞에 스쳤다. 애춘은 안방에 들어가 곧바로 보석함을 꺼냈다. 다이아몬드의 목걸이와 반지, 진주 목걸이 등등이 번쩍거렸다. 자신의 진가를 이것들로 의지하며 줄기차게 착용하고 다녔던 지난날 들이었다. 애춘은 이제 그것들을 상자 채 보자기에 싸 매어두었다. 아마 현금으로 바꾸려는 듯했다.
오늘 이른 새벽에 자신이 새로운 세상에 접하는 듯 기분이 묘했다. 다시 침실에 돌아와 고호의 해바라기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이곳에 이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깊이 자세히 바라보지를 못했다. 침실 바로 맞은편에 위치하여 부착한 것도 지선의 집을 방문하고 나서였다. 지선의 거실에 환하게 자리 잡은 커다란 크기의 고호의 해바라기가 돋보이고 어울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림 자체의 아름다움이 전부는 아닌 듯싶었다. 아마 그 의미를 더욱 즐기는 듯한 지선이었다.
‘저 해바라기를 바라보세요. 그렇게 썩 싱싱하고 보기 좋은 해바라기의 모습은 아니지요. 그렇지만 늦가을처럼 완숙하며 고개가 젖혀져 숙연함과 누렇게 무르익은 느낌이잖아요. 고개가 늘 태양을 향하고 열망하고 있잖아요. 전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아니, 모델하우스가 절망적으로 느껴질 때마다 태양을 갈망하는 고호를 생각하지요. 그러면 삶의 중심을 잡고 다시 우뚝 서서 힘을 공급받는 듯합니다.”
그때 자신은 별 감동 없이 지나쳤던 그림이었다. 그런데 이 새벽에 바라보는 고호의 해바라기는 애춘에게 매우 생소하며 새롭게 다가왔다.
‘그림은 실내의 화병에 꽂혀 있다. 해바라기는 태양을 향해 갈망한다. 그 결과 성숙과 영근 모습이다. 병들고 시든 듯한 모든 존재도 태양을 갈망하면 열매를 맺는다고. 어느 그윽한 실내에 꽂혀져 의미를 주고 있구나. 병들고 지친 나에게 삶의 의미를 찾도록 하는구나!’
어쩌면 고호는 인간의 내면의 두 가지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지 모른다. 생명의 배추색과 메마르고 지치고 병든 모습의 어두운 노란색 두 색채가 대비된 모습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늦가을의 성숙한 열매의 수확이었다. 태양을 끊임없이 갈망한 자취가 엿보였다. 갈망하는 정열은 영혼의 열매를 맺게 되고 풍성한 기름을 공급하는 것과 같다! 이제 지선과 함께 하는 삶 속에 자신의 삶이 약동하고 꿈틀거리고 있다. 삶의 원동력이 자신의 내부에서 건축되는 듯했다. 갑자기 송문학 박사가 말하는〈마음의 모델하우스〉가 바로 이것이 아닌가!
채성은 요즘 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다시 애춘은 ‘자신’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이젠 채성에게 매달리는데 지쳐 있었다. 남자를 벗어나 진정 자신의 삶을 찾고 싶었다. 애춘은 그림에 전심하기 시작했다. 지선의 말에 힘을 얻었는지 위대한 작품을 창작하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삶을 감동케 하며 인생을 배우고 선과 진실을 만나게 하는 그런 맑은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열정이 내부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