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이틀 앞둔 그곳은 여전했다. 번쩍이는 네온사인 사이로 이미 술에 취한 이들이 삼삼오오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2차, 3차 술자리로 향했다. 길가에 주저앉아 정신을 잃은 여성과 그 옆에 침을 뱉는 남성, 차가 달리는데 무단 횡단하는 젊은이와 “택시가 없다”며 경찰에게 소리치는 중년들로 서울 도심은 비틀대고 있었다.
29일 오후 7시부터 30일 오전 3시까지 본보 기자 5명이 서울 종각역, 이태원역, 홍익대, 영등포시장, 논현역 일대를 돌아보며 만난 사람들은 해마다 그렇듯 똑같은 모습이었다. 요란하게 한 해를 마무리하느라 거리에 남긴 흔적을 지우는 건 환경미화원의 몫이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송년회는 올해도 어김없이 술과 무질서로 얼룩졌다. 29일 밤 경찰이 서울 마포구 홍익대 근처에서 만취해 주저앉은 남성을 살펴보고 있다(위쪽 사진). 비슷한 시각 술에 취한 남성이 이태원의 차도에 서서 택시를 잡고 있다(가운데 사진). 이런 사람들이 떠난 30일 새벽 이태원 골목에 쓰레기가 수북하게 쌓여 있다. 심희정 김판 기자비틀대는 송년회
“잠시 술 좀 깨고 들어가려고요.” 29일 오후 11시25분 서울 논현동 먹자골목의 곱창집 앞. 회사원 진모(33)씨가 흰색 와이셔츠만 걸친 채 문 앞에 나와 있었다. 회사 동료들과 송년회 중이라는 그는 소주와 맥주를 섞어 이미 여러 잔 마신 상태였다. 바로 옆에선 양복차림의 남성이 주저앉아 먹은 것을 게워내고 있었다.
양말만 신은 남성이 경찰의 부축을 받고 들어섰다. 송년회를 마친 뒤 이미 손님이 있는 택시에 올라타서 ‘왜 합승을 안 해주냐’며 시비를 걸다 끌려왔다. 파출소가 떠나가라 고함치던 그는 경찰이 신원을 확인하려 하자 “주민번호가 너무 길어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만 반복했다. 1시간 후 데리러온 부인에게 이끌려 파출소를 떠났다.
‘젊음의 거리’라는 홍익대 부근도 상황은 비슷했다. 오후 11시56분 홍익지구대로 한 남성이 쓰러져 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현장을 찾은 김동성 경사가 “집이 어디냐”고 물었지만 남성은 대답하지 못했다. 신분증을 확인하니 주소지가 강원도 춘천이었다. “어떻게 가려고요” 하자 “가야죠. 갈 수 있어요” 하며 경찰 손을 뿌리치고 걸어갔다.
누워있다는 신고가 많이 들어온다”고 했다. 동승한 순찰차 내비게이션에는 5∼10분 간격으로 ‘술 취한 손님이 택시에서 내리지 않는다’는 신고가 떴다. 서울경찰청은 29일 밤부터 30일 새벽까지 음주운전 92건을 적발했다. 평소보다 20%쯤 늘어난 수치다.
경찰이 ‘봉’?
자정이 지나 날이 바뀌자 비틀대는 사람은 더 늘어났다. 30일 오전 1시20분쯤 종각역 4번 출구 근처에서 의경 임진환(22)씨가 경광봉을 들고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술 취한 중년 남성이 임씨에게 다가와 소리쳤다.
“왜 이렇게 택시가 안 잡히는 거야? 당신들 나와 있는 게 이런 거 정리하라고 있는 거 아니야? 어떻게 손 좀 써보라고!”
한참 동안 남성을 달랜 임씨는 “오후 9시부터 근무 중인데 시민들에게 꽤 많은 욕을 먹었다”며 “그러려니 한다”고 했다. 종각역 부근에선 의경 14명이 안전관리를 했다. 다른 의경들도 술김에 ‘공격적’이 된 시민의 욕설과 시비에 시달리고 있었다.
영등포 중앙지구대 앞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30일 오전 1시45분쯤 술에 취한 신모(46)씨가 지구대 앞에 앉았다. 경찰관이 “집에 들어가셔야죠” 하자 그는 “나 안 취했다”며 갑자기 경찰관에게 달려들었다. 실랑이가 벌어졌고 결국 신씨에겐 음주소란 혐의로 5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됐다.
“취한 사람은 절대 자극하면 안 돼요. 공무집행방해죄는 나중에 적용되는 거고, 폭행당할 위험은 당장 눈앞에 있는 거니까.” 한 경찰은 이렇게 하소연했다.
그들이 떠난 자리
인적이 좀 뜸해진 30일 오전 1시30분쯤 형광색 작업복을 입은 고성범(54)씨가 종각역 부근 거리에 나타났다. 청소업체 소속인 그는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봉투를 옮기며 한숨을 쉬었다. 송년회 시즌이면 쓰레기 양이 2배 가까이 늘어난다. 오후 8시30분부터 다음날 오전 5시까지인 그의 작업시간은 최근 오전 6시까지로 연장됐다. 허리를 굽혀 쓰레기를 옮기는 그의 바로 옆에서 술 취한 행인들이 연신 담배꽁초를 버렸다.
새벽이 되자 이태원 해밀턴 호텔 뒤편에는 아예 맥주병을 들고 나와 돌아다니며 마시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빈 맥주병과 담배꽁초가 어지럽게 거리를 굴러다녔다. 미화원 김모(41)씨는 “누군가의 즐거운 연말이 누군가에겐 고통스러운 시간”이라며 “송년문화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던데 우리가 느끼기엔 별로 달라진 게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