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것은, 이 기록영화가 메르켈 독일 총리의 연설로 시작되고 또 마무리되고 있는 점이다. 첫 장면은 2014년 베이징 방문 시 “독일인들은 전쟁 중에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를 성찰해야” 할 것을 강조한 연설로, 마지막 장면은 2015년 도쿄 방문 시 “역사를 정직하게 대면해야 할” 필요성을 말한 메르켈의 연설로 채워져 있다. 중국인들이 다큐멘터리를 이렇게 구성한 이유는 명백하다. 즉, 식민지 지배와 전쟁범죄를 부인하고, 역사 교과서를 왜곡하고, 피해자들에게 사죄는커녕 끊임없이 모욕과 상처를 입혀온 전후 일본(국가)의 태도를 부각시키려 한 것이다.
다 아는 얘기지만, 독일과 일본은 과거사를 대하는 기본자세에서 신기할 정도로 대조적이다. 독일은 흔쾌히 과오를 인정했다. 그런 자세 때문에 유럽연합이라는 공동체의 성립이 가능했고, 그 결과 지금 독일은 유럽의 중추국가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반면에 유태인 학살 못지않은 잔혹한 범죄와 악행을 저지른 일본(국가)은 단 한 번도 선선히 반성하고 사죄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의 지배층과 그들에 의해 길들여진 젊은 세대 다수는 국제적 압력하에서 정부 고위층이 마지못해 행한 형식적인 ‘사과’에 대해 국내외적으로 비난과 비판이 가해지면 “대체 언제까지 사과를 반복하란 말이냐?”라고 볼멘소리를 하기 일쑤였다.
과거사에 대한 두 나라의 이처럼 뚜렷한 차이는 물론 ‘민족성’ 따위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매우 복합적인 요인과 배경에서 연유한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두 나라가 처한 국제정치적 환경의 차이인지 모른다. 즉, 독일은 이웃 나라들과 화해를 하지 않으면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서 국가·국민으로서 생존할 수 없다고 느꼈고, 일본은 자신들이 충실한 대미(對美) 의존 국가로 남아 있는 한,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는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전쟁이 끝나자 중국은 공산화되었고, 식민지에서 해방된 한반도는 둘로 쪼개져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한심한 사회가 돼버렸다. 원래 이들 ‘미개한’ 민족·백성들을 그나마 ‘근대화’시켜준 것이 일본제국이었는데, 왜 사죄를 해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때문에 일본인의 의식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그것으로 바뀌어버렸다. 그 결과, 일본은 서양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아시아를 보호하기 위해 식민지를 확보하고,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논리가 어느새 주류가 돼버렸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객관적 정세나 외부적 요인보다 국가 지도층 혹은 엘리트들의 자질인지 모른다. 예컨대 전후 독일의 사상적·정신적 흐름을 규정한 결정적인 단초는 나치스 치하에서 교수직을 잃고 침묵을 강요당하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가 종전 직후 1946년에 행한 강연(‘죄책의 문제’)이었다. 그는 전범들이 단죄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독일 국민 전체가 죄인 취급을 받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우선 일괄적으로 독일인 전체가 책임이 있다고 접근하면, 죄의 경중을 가려 엄히 심판해야 할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구분을 없앤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독일인에게 책임이 있다는 얘기는 사실상 독일인 그 누구도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얘기가 되기 쉽다. 그러므로 정말 필요한 것은 독일인 개개인이 자신이 지은 죄만큼 마땅한 형벌을 받거나 책임을 져야 하며, 혹은 반인륜적인 범죄에 눈을 감고 있었다는 사실이나 적어도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에 양심적 가책을 느끼고 반성하는 자세이다(그래서 그는 죄의 종류를 법적인 죄, 정치적인 죄, 도덕적 죄, 형이상학적 죄로 나누어 설명했다).
야스퍼스가 세세히 나눈 죄의 범주에서 자유로운 독일인은 존재할 수 없었다. 비록 적극적인 악행에 가담하지 않았을지라도 독일인은 누구나 내면적으로는 죄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독일인 각자는 치열한 내면적 성찰을 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세계의 시민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다는 게 야스퍼스의 생각이었다.
이와 극명히 대조적인 생각이 1945년 패전 직후 일본에서 나온 ‘일억총참회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후 최초의 (황족 출신) 총리 히가시쿠니노미야가 ‘일본 재건의 첫걸음’으로서 제창한 1억 인구 전체의 참회라는 이 논리에는 ‘타자’에 대한 죄의식은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패전이라는 ‘통탄스러운’ 결과를 초래한 일본 국민 자신의 나태함, 불성실을 참회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철저히 내향적인 논리, 자폐적인 논리였다.
이것은 패전 직후 일본에서 나온 거의 모든 ‘책임론’의 기조였다. 좌파, 우파 간 별 차이도 없었다. 전후 최고의 민주주의 사상가로 평가받는 마루야마 마사오도 예외가 아니었다. 1946년 5월호 <세카이>에 발표된 논문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는 어떤 점에서 독일에서 야스퍼스가 행한 강연의 일본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논문에서 마루야마는 일본을 지배해온 초국가주의는 천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국민을 통제하려 했던 위정자들의 ‘논리’와 그것을 수용한 국민의 ‘심리’가 결합된 결과라고 논한다. 그러나 마루야마는 이런 초국가주의가 일본의 외부에 끼친 가해 책임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는다. 초국가주의 혹은 파시즘으로 망가진 일본 내부의 상황에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독일과 일본의 지성인·사상가에서 드러나는 이 차이는 그대로 정치지도자들의 행태로 연결된다. 물론 독일에도 반동적인 사상가나 정치가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의 죄를 끊임없이 기억해야 한다는 입장은 독일에서 확실한 주류를 형성해왔다. 그런 흐름이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가령 바이츠제커 대통령처럼 뛰어나게 양심적인 정치엘리트 덕분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는 이스라엘을 직접 방문하여 눈물을 흘리며 참회했고, 독일 공군의 폭탄세례로 폐허가 된 영국의 옛 성당을 찾아서 깊이 사과했다. 그의 논리는 명쾌했다. “과거에 대해 눈을 감는 자는 현재에도 눈을 감는다.” 즉, 현실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 과거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1970년에 빌리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의 유태인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지만, 독일 정치 지도자들의 이런 자세는 정파, 정당을 초월한 것이었다. 지금 메르켈 총리의 ‘아름다운’ 모습도 결국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