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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증 앓는 전(前) 농구 국가대표 김영희 선수의 이야기..
사회

거인증 앓는 전(前) 농구 국가대표 김영희 선수의 이야기

온라인뉴스 기자 입력 2016/01/12 23:47
5152만9338명.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 이웃의 숫자입니다(2015년 12월 기준). 아파트에선 경비원 아저씨, 회사에선 청소부 아줌마, 식당에선 아르바이트생을 쉽게 마주칩니다. 요즘엔 얼굴

5152만9338명.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 이웃의 숫자입니다(2015년 12월 기준). 아파트에선 경비원 아저씨, 회사에선 청소부 아줌마, 식당에선 아르바이트생을 쉽게 마주칩니다. 요즘엔 얼굴색이 다른 이들도 지하철에서 자주 보입니다. 이들이 '나와는 다르다'고 생각되지는 않나요. '더나은미래'는 청년 기자들과 함께 '좀 다를 것 같은' 우리 이웃 50명을 만났습니다. 거인증을 앓는 전(前) 농구 국가대표 김영희 선수의 이야기를 커버 스토리에 담았고, 존중받지 못하는 노동으로 힘겨워하는 사람들, 한국이 낯선 사람들, 놓아버리기엔 너무 안타까운 미래 세대를 찾아갔습니다. 더불어 행복한 삶을 위한 1%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입니다. 편집자




"너무 커서 무섭죠?"

커다란 손이 불쑥 눈앞에 나타났다. 키 205㎝. 국내 최장신 여자 농구 선수이자 전 국가대표인 김영희(52·사진)씨가 악수를 청하며 건넨 첫 인사였다. "우리 동네에선 '거인 아줌마'로 불려요(웃음). 처음엔 아이들이 매일같이 저희 집 앞에 몰려와서 '거인, 나와라~' 하고 놀려댔어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집으로 아이들을 불러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했죠. '아줌마 착한 사람이야. 농구선수 아줌마야. 아줌마 놀릴 때마다 가슴이 너무 아프다. 앞으로 아줌마 안 놀리면 나갈 때마다 맛있는 것 줄게' 하고요. 그때부터 주머니 가득 사탕, 과자를 넣고 다녀요. 이젠 절 모르는 사람들이 '거인이다~ 남자야? 여자야?' 하고 수군대면, 아이들이 먼저 나서서 '아니야, 마음씨 착한 거인 아줌마야. 농구선수 아줌마야'라고 말해줘요. 얼마나 예쁘고 고마운지 몰라요."




김씨는 80년대 명실상부한 농구계 스타였다. 그녀가 세운 한 경기 최다 득점(52점) 기록은 깨지지 않는 전설로 남았고, 1984년 농구대잔치에선 득점왕·리바운드왕·자유투상·인기상·최우수상 등 5관왕을 차지할 정도로 코트 위를 주름잡았다. 구기 종목 최초로 우리나라가 올림픽 메달을 획득한 1984년 LA 올림픽에도 출전해 은메달리스트가 됐다. '코끼리 센터'라 불리며 사랑받던 그녀의 삶은 그로부터 3년 뒤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거인병(말단비대증)'으로 쓰러져 선수 생활을 마감해야 했던 것. 그 후로 생사를 넘나드는 투병생활이 이어졌다. 거인병은 성장호르몬이 과도하게 분비돼 손·발·턱·코·귀·혀 등 인체의 말단 부위가 비정상적으로 커지고, 신체의 장기가 커지는 병이다(농구스타 한기범, 배우 신은경의 아들 역시 거인병을 앓고 있다). 한동안 '거인병을 앓는 농구선수'로 알려지면서 주변의 도움이 이어졌지만, 그 후로 10년 넘게 그녀의 이름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있었다. 지난 5일, 경기도 부천시 오정동에서 만난 김씨는 "나누는 삶이 외로움을 견디게 했다"며 인생의 전환점이 된 숨겨진 사연들을 한 올 한 올 풀어냈다.

◇'코끼리 센터'는 다섯 살부터 아팠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그녀의 걸음은 느리고 힘겨웠다. 심호흡을 한 뒤에야 조심스레 문턱을 넘었고, 양손을 지탱해줄 난간이 없인 계단을 오르기 버거웠다. 빨간 벽돌집 2층으로 올라가 간신히 집 안에 들어섰다. 5평 남짓한 단칸방. '코끼리 센터'가 17년간 외로움과 싸우며 버텨온 공간이었다.

"그동안 많이 아팠어요. 내장이 계속 커지고 있대요. 심장이 커지다가 터지면 죽어요. 얼마 전 대장이 꼬이고 폐에 물이 차서 실신했는데, 주변 이웃 분들이 구급차를 부른 덕분에 살았어요. 3개월 넘게 병원에 입원해 있었죠."

태어날 때만 해도 작고 여려, 잔병치레가 많은 그녀였다. 그런데 다섯 살 때부터 키가 부쩍 자라더니 또래에 비해 머리 하나가 더 커졌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키가 180㎝였단다. 큰 키 덕분에 열세 살 때부터 운동부로 유명한 학교들로부터 잇따라 '러브콜'을 받았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전국 단위 스카우트 경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일부 코치는 다른 팀에 뺏길까 봐 그녀를 밤 12시까지 방에 숨겨놓고, 새벽에만 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18세 국가대표 선수 발탁 이후 청소년 대표로 대통령 표창을 받고, 아시안게임 은메달을 딴 공로로 체육훈장 백마장을 받는 등 승승장구를 이어갔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키가 커서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지, 정작 제가 운동을 좋아하진 못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릴 때부터 집안 형편이 어려웠어요. 아버진 결핵으로 요양원에 입원해 계시고, 엄만 품팔이를 해서 생계를 간신히 유지했거든요. 1년간 매일같이 국수만 먹었어요. 집안에 보탬이 되고 싶어 시작한 농구였어요. 당시 제안받은 월급이 제겐 엄청난 돈이었거든요. 매년 키가 7㎝씩 자라길래, 농구부에서 잘 먹어서 그렇겠거니 생각했어요. 알고보니 이미 다섯 살 때부터 거인병이 진행됐던 거죠."

1984년 LA 올림픽이 끝난 직후 증상이 급작스레 악화되기 시작했다. 체중 120㎏까지 몸이 불어났다. 훈련을 받기 어려울 정도로 몸이 무거워지자, 소속팀에선 체중 감량을 요청했다. 물 한 방울조차 먹을 수 없었다. 합병증으로 당뇨까지 오자 압박은 더욱 커졌다.

"어느날 샤워를 하고 빗질을 하는데 머리에 감각이 없는 거예요. 다음 날엔 팔에 감각을 잃었어요. 목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두통이 와서 훈련 때마다 진통제를 다섯 알씩 먹었어요. 농구가 너무 싫었어요. 그렇게 몇 년을 방치하다가 1987년 어느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캄캄했어요. 앞이 전혀 안 보였어요. MRI를 찍어보니 뇌의 커다란 혹이 시신경을 눌러서 눈이 안 보였던 거였어요. 뇌수술 해주신 의사 선생님이 '이틀만 늦었으면 시각장애인 될 뻔했어. 고통이 엄청 심했을 텐데 어떻게 참아냈어?'라고 말씀하시는데 가슴이 울컥하더라고요. 남은 혹을 없애기 위해 방사선 치료를 계속 받았어요. 여기 제 머리 양옆을 보시면, 뭔가에 눌린 듯 쑥 들어갔죠? 아직까지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아요. 그 후유증 때문이에요."

◇희망을 잃은 그녀를 일으킨 이웃의 손길



수술 직후 훈련을 시작했지만 다시 쓰러졌다. 병원에선 '생명이 위독하다'고 했다. 김씨의 선수 생명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때부터 20년 넘게 그녀는 집에만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녀의 유일한 벗이던 어머니마저 59세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마저 2년 뒤 암으로 돌아가셨다.

"우울증으로 4~5년간 매일 울기만 했어요. 자살 기도까지 했죠. 7개월 동안 물 한 모금 제대로 안 먹었어요. 130㎏이던 체중이 70㎏까지 빠져서 뼈가 흉측하게 드러날 정도였어요. 죽기 일보 직전에 병원에 실려가서 겨우 살아났죠. 그리고 지금 이곳으로 이사 왔어요. 이 방에서도 4년간 우울증을 앓았어요. 너무 외로웠어요. 영하 15도로 뚝 떨어진 날씨에 난방도 안 틀고 무서워서 문을 다 열어놨어요. 밤새 울다가 동이 트고 나면 그때에야 마음이 안정되더라고요. 대문 앞에 앉아있으면 사람들이 전부 피해갔어요. 인상도 험한 거인이 무서웠던 거죠. 1000원짜리 어묵 한 봉지로 끼니를 때우면서 하루하루 간신히 살아냈어요. 제일 견디기 힘든 건 외로움이었어요."




2002년 KBS '추적 60분' 방송팀이 그녀를 찾아왔다. 국가대표였던 그녀의 어려운 삶을 카메라에 담아간 것. 방송팀과 함께 병원에 간 김씨는 자신이 '거인병'에 걸렸단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고 했다. 은퇴 당시까지도 뇌하수체 종양으로 몸이 불편한 줄만 알았던 것. 당장 수술을 받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말에 그녀는 절망했다.

"당시 국가대표 선수 연금으로 매달 받는 20만원이 전 재산이었어요. 당연히 수술비도 없었고, 간병해줄 사람도 없었어요. 하늘이 왜 내게 이런 아픈 시련을 또 주는 건지 서러워서 주저앉아 울었어요. 병원에선 3일 동안 수술 여부를 결정해달라고 하셨어요. 3일 뒤 그냥 죽음을 택하겠다고 했습니다. '밖에 나가도 사람들이 다 저를 피합니다. 너무 큰 몸 때문에. 지금 제 모습이 너무 싫습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고요. 그랬더니 병원에서 저와 비슷한 거인증을 앓던 남성이 약물 치료로 나은 사례가 있다면서 수술 말고 약물 치료를 권했어요. 매달 주사 한 번 맞고 약 타는 데 300만원씩 들어요. 감사하게도 병원에서 '10년간 국가대표 선수로 국위 선양한 만큼 도움을 주자'고 결론내렸고, 치료비를 지금까지도 계속 지원해주십니다. 그분들의 나눔으로 제 생명이 연장되고 있는 거죠."

그녀를 향한 도움의 손길은 이어졌다. 한 택시기사는 10년 넘게 몸이 불편한 김씨의 운전기사 역할을 자처했고, 집주인은 '평생 전세금을 올리지 않을 테니 이곳에서 편하게 오래오래 살라'며 배려했다. 쌀·음료 등 식재료가 떨어질 때마다 몰래 채워주기도 한다. 제주도에서 겨울마다 한라봉을 보내주는 따뜻한 이웃도 있었다.

"선수 시절 혼자 경기를 보러 오는 휠체어 장애인이 한 분 계셨어요. 수시로 음료수나 물을 갖다드렸었는데, 제 소식을 들으신 뒤 매달 5만원씩 성금을 보내주셨어요.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그때 돌아가신 엄마가 제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셨던 이야기가 생각났어요. '네가 나중에 늙어 걷기도 힘들 때 누가 널 도와주겠니. 네가 먼저 고개 숙이고 베풀어야만 다른 사람들도 너를 돌봐주지 않겠니. 항상 나눠야 한다'는 말씀이었어요. 이렇게 제 생명을 살려주는 분들이 많은데, 받기만 하는 건 도리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 시설들을 찾아나섰습니다."

◇나눌수록 채워지는 삶…더불어 사는 행복을 찾다



나눔이란 목표가 생긴 뒤부터 김씨는 부업을 시작했다. 매달 받는 선수연금 20만원은 생활비로도 빠듯했기 때문. 면도날 끼우는 작업, 전자제품 조립, 양말 실밥 제거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렇게 하루 버는 돈은 1만원도 안 됐지만, 그녀는 행복했단다.

"면도날 끼우는 부업을 오래 하다보니 손가락이 전부 갈라졌어요. 제가 손이 크다보니 전자제품 조립 같은 정교한 작업을 하기 너무 어렵더라고요. 그래도 했어요. 한 달에 30만원씩 악착같이 벌어서 모았어요. 지금은 수당이 올라서 75만원까지 벌어요. 부업하면서 만난 양말 공장 사장님께 '더 열심히 할 테니 혹시 남는 양말을 기부해줄 수 있느냐'고 요청드렸는데, 선뜻 수면양말을 내주셨어요. 그렇게 모은 100만원과 양말 박스를 들고 장애인 시설을 찾아갔습니다."

승합차에 과자, 음료수, 떡, 양말을 가득 싣고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중증 장애인 시설을 찾았다. 그녀가 문에 들어서자 50명의 장애 아이들이 겁을 내며 달아났다. 처음엔 쭈뼛쭈뼛 다가오지 않던 아이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친구가 됐다. 김씨는 아이들이 신고 있던 낡은 덧버선을 예쁜 수면양말로 바꿔 신겼다. 다리와 발가락이 휘어져 양말을 신기조차 어려운 친구를 만났을땐 눈물이 흘러내렸다. 김씨는 "내가 가진 아픔은 아무것도 아닌데, 혼자서 끙끙 앓던 모습이 부끄러워졌다"면서 "돈을 열심히 모아서 아이들 만나러 가는 게 삶의 낙이었다"고 말했다. 헤어질 때면 손을 꼭 잡고 '가지 말라'던 아이들 모습이 항상 눈에 아른거렸다.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 시설이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양손 가득 물품을 들고 찾아갔다. 그렇게 김씨가 다녀간 장애인 시설 및 보육원만 4곳이다. 그녀의 모습을 본 동네 주민들도 하나둘 나눔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인근 중국집 사장은 "혼자 좋은 일 하지 말고 같이 하자"며 70인분 자장면을 들고 장애인 시설을 방문했다. 십시일반 성금을 걷어 전달하는 이들도 있었다. 증상이 악화된 이후부터는 독거 노인을 위한 나눔을 시작했다. 장애인 시설을 방문하기엔 걷는 것조차 버거웠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에 혼자 사는 노인 분들이 많아요. 보름을 굶었다는 할아버지께 갈비탕을 사드린 적이 있었어요. 제 눈치를 보면서 뼈에 붙은 살코기를 손톱으로 긁어 드시는데, 이분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걸 찾아보자는 마음이 들었어요. 동네 독거 노인 분들을 저희 집에 매일 모셔서 음식을 대접하고 있어요. 호박죽도 만들고 가락국수도 만들고요. 남는 음식은 용기에 담아 싸드리고요. 한번은 팥죽을 끓였는데 쌀을 너무 많이 넣어서 팥밥이 됐어요. 그런데도 너무 맛있다며 칭찬해주시더라고요. '운동만 했을 텐데 요리를 언제 배웠냐'면서요. 그럼 제가 '손이 하도 커서 오른손 세 번, 왼손 세 번만 움직이면 음식이 완성되지요' 하고 말씀드려요. 그때부터 제 별명이 '거인 아줌마'에서 '이쁜이'로 바뀌었어요(웃음). 우리 집은 동네 사랑방이 됐고요. 지금도 이웃분들이 '아픈데 없냐''밥은 먹었냐'며 매일 찾아오시고 음식도 나눠주세요. 혼자 사는 어르신들과 한가족처럼 서로 의지하며 지내요. 덕분에 외로움도, 우울증도 떨쳐냈죠. 이웃의 따뜻함이 이런거구나 싶어요."

52년간 미혼으로 살아온 그녀지만, 아이들에 대한 애정만큼은 남다르다. 아래층에서 조부모와 함께 사는 어린 자매에게 김씨는 또 다른 '엄마'였다. 성금이 들어올 때마다 생활비, 병원비는 물론 컴퓨터 등 필요한 학용품도 사줬다. 그렇게 8년간 아이들을 키웠다. 고민 상담도 그녀의 몫이었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계속 돈을 가져오라고 한대요. 안 그러면 엄청 맞는다면서 우는데, 더는 안 되겠다 싶었죠. 학교 교장선생님께 전화를 걸어서 학교 폭력을 해결해달라고 강력하게 항의했죠. 담임 선생님이 찾아와서 아이 이야길 천천히 듣고는 해결을 약속하셨어요. 이젠 성인이 됐고, 지금도 '이모 보고 싶다'며 연락이 와요."

방 안을 가득 채운 농구공도 장애인 시설이나 보육원 아이들에게 기부한다. 프로농구팀에서 농구공을 보내줄 때면 공마다 일일이 바람을 넣고 포장을 한다. 거인병 증세로 목과 어깨뼈가 붙어버려 고개를 움직이기 힘든데도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힘이 난다고 했다. 최근엔 자신처럼 희귀 난치병을 앓는 아이들을 위한 기부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요즘 가톨릭대 성모병원에 강의를 나가요. 의대 학생들에게 거인병 증상 및 경험을 공유해 임상을 돕는 시간인데요. 그때마다 희귀 난치병으로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치료를 받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어요. 희귀 난치병 환아를 위한 모금을 위해 병원과 머리를 맞대고 있습니다."

인터뷰 말미 김씨는 하얀 종이를 꺼내들었다. 직접 지은 시(詩)라고 했다. '내가 먼저 아픔을 경험하면 남의 아픔을 이해할 줄 안다' '곧게 뻗은 나무는 가지도 곧게 뻗고, 휘어진 나무는 가지도 휘어진다' 등 자신의 경험을 담은 글귀들도 담겨 있었다. 그중 희망을 담은 시는 액자에 끼워 동네 고3 학생들에게 선물하고 있다. '공부하기 힘들 때마다 보면서 힘을 내라'는 격려도 함께 전한다. 덕분에 오정동 고3 학생들 사이에선 '시인 아줌마'란 별명도 붙었다.

"제가 좋아하는 시에 이런 문구가 있어요. '사랑도 훨~훨. 미움도 훨~훨. 하늘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훨~훨. 성냄도 훨~훨. 물같이 바람같이 그렇게 살라 하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에 키가 큰 여자가 있었는데, 마음은 솜사탕이더라'는 기억을 남기고 싶어요. 그거면 충분해요. 나눔요? 이 덩치에 마음이 좁으면 안 되잖아요(웃음). 이웃을 향한 작은 관심이야말로 나눔의 시작이라 생각해요. 절망 속에 있던 제가 이렇게 일어선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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