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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신영복 교수 누구? 삶 자체가 드라마…“서로 위로하는 ‘작은 숲’ 되라”

온라인뉴스 기자 입력 2016/01/16 10:47
‘담론’ 펴낸 신영복 “소소한 기쁨이 때론 큰 아픔을 견디게 해줘요”


2년에 암투병 끝에 15일 신영복 선생 별세
평화와 공존의 참 의미 전달한 지식인

깊은 성찰 담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큰 반향
‘우리시대의 스승’ 찬사… 삶 자체가 드라마
“과정 자체를 아름답게, 자부심 있게, 즐겁게 만들어라”
“책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생각하면 모든 텍스트는 언제나 다시 읽히는 것이 옳다. 필자는 죽고 독자는 끊임없이 탄생하는 것이다.”

 

지난해 4월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라는 부제를 단 그의 마지막 저서 <담론>에서 그렇게 얘기했던 신영복 교수가 2년여의 암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오랫동안 인간과 생명, 평화와 공존의 참 의미를 전달해 온 교육자이자 저술가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강의를 들으며 삶의 좌표를 가다듬었고 많은 독자들이 그의 책을 읽으며 깊은 성찰의 메시지를 전달받았다. 그는 또한 아름답고 깊은 울림을 가진 글씨와 그림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부박한 일상 속에서 생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반추하는 감동을 느끼게 해 준 서화작가이기도 하다.”

 

지난해 7월 만해문예대상을 받은 그를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는 그렇게 기렸다.

 

하지만 그의 삶은 기구했다. 

 

1941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해 1959년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진학한 그는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학생서클의 구심점이자 지도자로 활동했다. 숙명여대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강의하던 1968년 27살 나이에 그는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사형수가 됐고 20여년 동안 영어의 몸이 됐다. 

 

2008년 7월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통일혁명당에 가입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통혁당은 정식으로 결성되지도 않았다. 서울시당 준비모임이 꾸려져 있었다는 얘기를 나중에야 들었다. 나는 학생운동 차원에서 대학선배가 주도한 모임에 적극 참여했는데, 그 선배 삼촌이 북한에도 갔다 온 모양이었다. 당시 <청맥>이란 잡지에 진보적 소장학자들이 글을 많이 썼는데, 나도 거기에 참여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학생운동 차원이었다.”

 

재판 때 검사는 초등학교 꼬마 6명을 위해 지어준 노래가사 속의 “우리는 주먹 쥐고 힘차게 자란다”의 ‘주먹 쥐고’조차 “국가 변란을 노리는 폭력과 파괴를 의미하는 것”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폭력의 준비를 암시하는 것”이 아니냐고 몰아세웠다고 그는 말했다. 

 

20여년의 기나긴 감옥생활이 그에겐 사회학과 역사학, 인간학을 제대로 배우게 해 준 진짜 대학이 됐다.

 

무기수로 감형된 뒤 1988년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한 그가 평범할 수 없었던 체험과 깊은 성찰을 특유의 문장에 담아내 출간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또 다른 신영복의 탄생을 세상에 알렸다. 

 

“교도소라는 전혀 다른 상황에 내던져진 충격 속에서 어떻게든 당시 생각을 기록해 두면 언젠가 잃어버린 세월을 기억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긴 글은 물론이고 짧은 글조차 통제된 집필 도구와 장소, 시간 등으로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이번 달엔 이런 얘기를 한번 써야지 하고 마음먹으면 한 달 내내 그걸 생각하면서 거의 완벽한 문장 형태를 머릿속으로 미리 정리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그렇게 해서 좁은 엽서 한 장에 빽빽이 적힌 글들로 채워졌다. 우리 사회의 사유의 폭과 깊이를 한 차원 높였다는 평을 받으며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심도 있는 담론들의 등장은 이른바 ‘87년 체제’가 만들어낸 세상변화를 실감하게 만든 하나의 징표였다. 

 

사면복권을 거쳐 2006년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직을 정년퇴임하고 지난해까지 대학원 강의를 하면서 <담론> 출간하기까지 25년간 그의 삶은 더욱 넓어지고 깊어진 10여권 저서와 명강의로 풍성하게 채워졌다. ‘우리시대의 스승’이라는 찬사를 받은 그의 삶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였다. 2008년 50만부가 넘게 팔린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출간 20돌 기념판을 냈을 때 그는 이렇게 자평했다.

 

“가끔 독자들을 만나 들은 얘긴데, 힘든 상황을 겪은 분들이 내 글에서 위로를 받은 것 같다. 일부에선 신영복의 이력에 비해 사색의 전투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를 했고 또 한켠에선 엄청난 전투성이 있다고도 했다. 여러 층위의 반응들이다. 대체로 인문학적 가치, 인간적 고뇌, 인간적인 삶과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이 그런 호응을 불렀다는 평이 많다.” 

 

2015년 펴낸 <담론>에서는 사형수가 됐을 때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햇볕 때문이었다”고 썼다.

 

“겨울 독방에서 만나는 햇볕은 (…) 길어야 두 시간이었고 가장 클 때가 신문지 크기였다. (…) 신문지 크기의 햇볕만으로도 세상에 태어난 것은 손해가 아니었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받지 못했을 선물이다.”

 

그것이 그가 ‘죽지 않은 이유’였다면, 그가 ‘살아가는 이유’는 깨달음과 공부였다. “공부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요,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의 존재형식”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키우는 성찰이며, 그것을 토대로 현실을 바꾸고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는 실천이라고 했다. 세계인식은 왜 필요한가? “세계를 이해하고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실천적 주체가 사람이다.” 그에게 공부의 궁극적 목적은 한마디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것은 “기존의 가치를 지키는 보루일 뿐인 중심부”가 아니라 “변방(변방성)”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공부의 시작은 “우리를 가두고 있는 완고한 인식들을 망치로 깨뜨리는 것”이며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그 끝은 ‘가슴에서 발까지 가는 여행’이라고 신 교수는 강조한다. “우리 강의는 가슴의 공존과 관용(톨레랑스)을 넘어 변화와 탈주로 이어질 것이다. 존재로부터 관계로 나아가는 탈근대 담론에 관해 논의할 것이다.” 이 ‘관계’야말로 신 교수의 인문학 특강 주제요 <담론>의 핵심주제였고 만년의 화두였다.

  

그는 “관계 없이 인식 없다”며 관계를 통해 자신과 주변을 바꿈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했다. 

 

“모든 존재는 고립된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관계 속에 놓여 있는 것이며, 그러한 관계 속에서 비로소 정체성을 갖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정체성이란 내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적극적으로 조직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다. 정체성은 본질적으로 객관적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다. 관계의 조직은 존재를 생성으로 탄생시키는 창조적 실천이다.”

 

<논어>의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를 흔히 알려진대로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하지 않으며, 소인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화목하지 못하다”로 읽지 않고 이렇게 고쳐 읽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이 공자의 화동(和同) 담론에 대한 독특한 해석은 한반도 통일론에도 적용됐다. 신 교수는 정치적 통일(統一)이 아니라 평화 정착과 교류협력을 통해 남과 북이 폭넓게 소통하고 함께 변화하는 화화(和化)로서의 통일(通一)이 돼야 한다고 했다. 그에게 이것은 한민족만의 과제가 아니라 “21세기의 문명사적 과제”라고 했다.

 

이런 화동 개념과 연관시켜 톨레랑스(관용)의 한계도 지적했다. “우리 서로 차이를 존중하고 공존하자”는 톨레랑스는 근대사회 최고 수준의 가치지만, 그것이 자기 변화로 이어지지 않으면 ‘은폐된 패권논리’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관용과 톨레랑스는 결국 타자를 바깥에 세워 두는 것이다. 타자가 언젠가 동화되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강자의 여유이기는 하지만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탈주와 노마디즘은 아니다.” 

 

가을에 나뭇가지 끝에 하나 남겨 둔 ‘씨 과일’을 가리키는 ‘석과불식’(碩果不食)에서 그는 최고의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냈다.

 

“씨 과일은 새봄의 새싹으로 돋아나고, 다시 자라서 나무가 되고, 이윽고 숲이 되는 장구한 세월을 보여준다. 한 알의 외로운 석과가 산야를 덮는 거대한 숲으로 나아가는 그림은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차다. 역경을 희망으로 바꾸어내는 지혜이며 교훈이다.”

 

나무가 뼈대를 드러내며 잎을 떨어뜨려 뿌리를 따뜻하게 덮는 이 석과불식의 요체를 그는 “사람을 키우는 일”이라고 했다. 사람이 곧 뿌리라는 것인데, 바로 신 교수 자신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87년 체제’가 무너지고 ‘보수반동’의 시대가 다시 시작된 2008년 인터뷰 때 그는 말했다. “20년 전 6·29 선언 이후의 민주화가 불완전하고 불철저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사회변혁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운동의 구심, 지도부를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뒤 진보적 정당들까지 등장했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를 키워 온 민주, 변혁 역량을 아우를 수 있는 탄탄한 구심체를 꾸리는 일은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를 ‘불철저한 민주화’ ‘뿌리 깊고 완고한 보수적 구조’ ‘국제금융자본의 진입과 수탈’이라는 세 가지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인조반정 이후 지금까지 서인-노론으로 이어진 정치적 지배그룹의 교체가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김대중·노무현 정권도 언론과 자본, 법조, 사회문화적 토대 등을 장악한 강력한 보수 권력집단으로부터 사실상 배제되고 소외당했다고 봤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 지배 엘리트 재생산 구조가 절대적으로 미국 의존적인 사실을 지적하면서 “미국 위주의 신자유주의적 패권질서에 우리 사회가 올인하는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4일 서울 양천구 목동 자택에서 만난 신영복 선생. 선생은 이날 인터뷰에서 “역사의 변화는 쉽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장기성과 굴곡성을 생각하면서, 가시적 성과나 목표 달성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과정 자체를 아름답고 자부심 있게, 즐거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지난해 이진순 교수와의 인터뷰스물일곱의 신영복(74)은 육군 중위로, 육사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관이었다. 1968년 8월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끌려간 후, 그는 “간첩”이 되었다. 대학의 독서회와 연합서클 세미나를 지도한 이력이 “반국가단체 구성죄”로 “구성”되었다. 1심과 2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무기형으로 확정되었다. 그로부터 20년 20일 동안 그는 수인(囚人)이었다. 스물일곱 음력 생일날 잡혀 들어간 그는, 마흔일곱 음력 생일이던 88년 광복절에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했다. 같은 날, 그가 썼던 옥중서신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제목을 달고 출간되었다. 고대설화 속의 바리데기 공주가 자신을 버린 부모를 살리려고 저승길에서 생명수를 구해 왔듯이, 신영복은 자신을 유폐한 세상의 메마른 영혼들을 촉촉이 적셔줄 정화수(井華水)를 들고 돌아왔다.

 

2006년 성공회대에서 정년퇴직을 한 뒤에도 석좌교수로 강의를 계속해온 그가 최근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라는 부제가 붙은 책 <담론>을 펴냈다. 그의 고전 해설을 묶은 <강의>를 펴낸 지 10년 만이다. 오랜만의 신간이 반가우면서도 ‘마지막 강의’라는 부제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가 투병중이라는 소식도 들렸다. 2014년 겨울학기를 끝으로 강단에 서지 않는다는 그를 어떻게든 꼭 만나고 싶었다. 신영복 선생의 서울 목동 자택으로 찾아간 날, 화창한 햇살 아래 철쭉이 눈부셨다. 그는 단정하게 재킷을 갖춰 입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암 선고받고 낸 책 <담론>에 담은 고백
 

-편찮으시다는 소식 들었는데 안색도 좋으시고 건강해 보이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담당 의사의 말로는, 어떤 경로로 진행될지 아직 자기도 확실하게 얘기할 수 없다고 하거든요. 조심스럽긴 합니다.”

 

지난해 말 암 진단을 받았다. 몇 군데 전이가 된 상태라고 했다. 다행히 최근에 투약하기 시작한 약이 효과를 발휘해 기력도 회복되고 병세도 많이 호전된 상태다.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그동안의 강의 자료들을 모아서 이런 책도 만들었죠. 그 약을 복용하고 난 후에 건강이 훨씬 좋아져서 다시 출판사로부터 원고를 돌려받아서 교정을 한 번 더 봤어요.”(웃음)

 

그렇게 출간된 <담론>은 성공회대학 강의 녹취록을 바탕으로 그의 사상을 집대성한 책이다. 1부에서는 동양고전을 통해 본 세계 인식, 2부에서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다루고 있는데, 사형수 시절의 절망과 막막함, “반목과 불신, 언쟁과 주먹다짐”으로 “하루가 팔만대장경” 같았던 무기수 시절의 이야기 등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진솔한 고백들이 많이 실렸다.

  

남한산성(육군교도소)에서 만난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함께 생활하던 사형수 중 다섯 명이 사형 집행되었고 한 사람은 그곳에서 타살되었습니다. 나도 물론 사형수였습니다.(210쪽)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기만을 바라던 사형수가 막상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나서 자살하기도 합니다…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동굴로 들어서는 막막함에 좌절했습니다.(218쪽)

 

-그간 신영복이라는 어른의 아우라가 너무 커서 ‘이분은 우리 같은 세인들하곤 바탕부터가 다를 거야’ 하는 거리감이 있었는데, 이 책에서 “나의 20년 수형생활은 실수와 방황,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는 대목을 읽으니 왠지 안도가 되던데요.(웃음)

 

“이 책에서 내 편지글이 그렇게 반듯하게 쓰일 수밖에 없는 사정도 조금 밝혔죠. 본의 아니게 그런(늘 반듯하고 정제된 사람이라는) 선입관을 주게 되어 그간 불편한 점도 없지 않았어요.”

 

그의 책을 읽은 사람들은 ‘그 긴 징역살이에서 어쩌면 그렇게 흐트러진 모습 한 번 없이 반듯할 수 있었냐?’고 의아해하지만, 실제 그의 징역살이가 편지글처럼 차분하고 평화로웠던 건 아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염려하는 가족들에게 애달프고 괴로운 사정을 곧이곧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편지를 검열하는 교도소나 국가권력 앞에, 좌절하거나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일체의 필기도구가 금지된 상황에서 그나마 글을 적을 수 있는 기회가 한 달에 한 번 엽서를 쓸 때뿐이다 보니, 한 달 내내 머릿속에서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다듬은 글들이었다.

 

-감옥에서 후회한 적 없으세요? ‘난 통혁당이 뭔지도 모르는데, 이게 뭐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자괴감이나 회한 같은 건?

 

“처음엔 혼란스럽고 종잡을 수가 없었어요. 중앙정보부에서 취조받을 때까진 경황이 없더니, 며칠 뒤 서대문구치소에 들어갔는데, 거기 ‘중앙’(사동 가운데 로비)이라고 있어요. 거기서 간수부장 발을, 재소자 하나가 씻기고 있더라구요.”

 

-(놀라며) 재소자가 교도관 발을요?

 

“노예지 뭐. 교도소 특유의 그 묵직한 악취, 회색 벽과 나이 많은 간수의 발을 씻기는 젊은 재소자. 그 옆에 내가 쪼그려 앉아 있으면서, ‘역사가 썩는 듯한 교도소 냄새, 이 끔찍한 풍경 속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나!’ 그런 암담함을 느꼈죠. 그때는 이게 내 ‘대학시절’이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지.”

 
“계몽주의 노인권력 바탕에 둔
그런 글쓰기는 지양돼야 해요
‘멘토’에 관해서도 부정적입니다
사표나 스승은 당대에 없어요
집단지성 같은 게 필요해요”


나도 어쩔 수 없는 먹물이구나! 참혹한 반성

 

 

신영복은 감옥생활 20년을 “나의 대학시절”이라고 표현한다. 감옥은 그에게 ‘사회학’과 ‘역사학’과 ‘인간학’을 가르친 교실이라는 것이다. 24시간 모든 것이 공개되는 감옥은 “목욕탕처럼 적나라하게” 서로의 실체가 드러나는 공간이며, “메끼(도금) 벗겨진” 인간의 민낯을 “어항 속 붕어처럼”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 속에서 첫 5년여간 신영복은 물 위의 기름처럼 겉도는 존재였다. 그의 눈에 비친 다른 재소자들은 노동 의욕도 변화 의지도 없는 ‘룸펜 프롤레타리아’일 뿐. 신영복은 최대한 친절하게 그들을 대했지만 동료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낌새를 제일 먼저 알아차린 것도 같이 있는 재소자들이었다. 신영복은 자신만 모르는 ‘왕따’인 채로 5년을 보냈다.

 

-5년이 지나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죠?

 

“많은 사람들을 감옥에서 만나고 그들 얘기를 들으면서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죠. 그 과정이 그렇게 단선적이진 않아요. 방황하고 실패하고 우회도 하고…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그때 내 또래, 마흔한 살짜리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이 친구한테 누가 접견을 왔다는 거예요. 모두 깜짝 놀랐죠. 3~4년간 아무도 온 일이 없었는데.”

 

-누가 왔는데요?

 

“누가 왔냐고 물으니, ‘웬 재수없는 녀석이 왔다’고만 하고 말을 안 해요. 나중에 자초지종을 들어보니까 자기가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엄마가 자기를 삼촌네 맡겨놓곤 도시로 돈 벌러 나갔대요. 그리고 소식이 끊어졌는데 동네 사람들 얘기론 ‘너희 엄마 시집갔다’고 했다고. 근데 오늘 접견 온 남자가, 재가한 엄마가 키운 (의붓)아들이라고 그러더래요. 기분이 나빠서 ‘근데 여기 왜 왔냐? 남 징역살이하는 거 확인하러 왔냐?’고 고함을 지르니까 ‘당신 어머니를 우리 어머니로 모시고 오지 않았으면 지금쯤 내가 거기 있고 당신이 밖에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죄송해서 왔다’고 하더래요. 아, 감동이잖아요. 그럼 나는 뭔가? 나도 쟤와 같은 부모, 그런 환경에서 컸다면 지금쯤 같은 죄명으로 앉아 있을 수도 있는데. 나 자신에 대한 반성, 아주 참혹한 반성이 들었어요.”

 

이후 신영복은 교도소 안에서 금지된 내기축구를 하다가 다른 재소자들과 ‘빠따’를 맞았고, 예배 후에 나눠주는 떡 위문품을 받기 위해 줄을 서는 능청스런 ‘떡신자’가 되었다. 가르치려 드는 인텔리의 완고함에서 벗어나니 도처에 스승이 있고 친구가 있었다. 그는 이 변화를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긴 여행”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인가요? 언제나 쉽고 편안한 구어체나 서간체를 즐겨 쓰시는 이유가? 선생님 글은 여느 교수들처럼 딱딱하거나 현학적이지 않고, 동네 할아버지가 느티나무 아래서 들려주는 얘기처럼 물 흐르듯 편안합니다. 그런 문체도 감옥에서 갈고닦은 노력의 산물인가요?

 

“어려서 대학신문에 글 쓰고 할 때와는 많이 달라졌을 거예요. 지식인의 글쓰기에 대해서 반성 많이 했지요. 글 쓰는 필자들은 독자를 배려해야 해요. 자기 글을 쉬운 글에 담아서 공유하는 노력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신영복은 낮은 곳으로 다가가 말을 건네고 소통하는 방법을 부단히 고민하고 실험해 왔다. 서화(書畵)는 많은 사람과 깊이있게 교감할 수 있는 효과적인
매체였다. 그의 서화는 책으로도, 달력으로도 나왔고 손수건이나 티셔츠, 우산으로도 만들어졌다. 그가 직접 그린 삽화에 그가 개발한 어깨동무체 혹은 민체(民體)라 불리는 글씨, 그리고 짧고 강렬한 우화와 잠언들은, 심오한 사상이 아름답고 친근한 예술작품이 될 수도 있고 일상의 실용품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원효는 법당에 앉아 경전을 외는 대신, 마을마다 표주박을 두드리고 춤을 추며 불가의 가르침을 담은 노래를 퍼뜨리고 다녔다. 필요한 곳에 서화와 글씨를 헌사하고 토크콘서트로 전국을 돌아다닌 사상가 신영복의 족적도 그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선생님을 따르는 제자는 많지만 선생님처럼 대중과 직접 소통할 줄 아는 제자는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본인들이 깨닫고 꾸준히 노력해야겠지요. 앞으로 계몽주의적인 노인 권력이 바탕에 깔린, 그런 글쓰기는 지양될 거라고 난 생각해요.”

 

-계몽주의가 왜 나쁩니까?

 

“허허, 그게 잘난 사람들이 하는 거거든요. 계급적 편견이라고 봐야 되죠. 자기 가치를 기준으로 타자(他者)를 끌고 들어가는 거잖아요. 계몽주의 프레임은 허물어야 해요. 그런 면에서 전 ‘멘토’에 대해서 좀 부정적으로 봅니다.”

 

-왜요? 요즘 멘토와 힐링의 시대라는데요.

 

“멘토가 계몽주의의 변형이잖아요. 멘토라는 게 대개 연배가 좀 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가치를 전하는 건데, 지금 젊은 사람들이 앞으로 20~30년 후에 살아갈 세계에 대해서 20~30년 전의 경험을 기준으로 제시한다는 거 자체가 오히려 진보를 방해하는 거 아닌가요?”

 

-많은 이들이 선생님을 ‘이 시대의 대표적 스승, 대표적 멘토’라고 부르는데요.

 

“거대담론도 사라지고 존경했던 사람들의 추락도 많이 보고 하니까 뭔가 사표(師表)로 삼을 만한 대상을 성급하게 구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사표나 스승이라는 건 당대에는 존립할 수 없는 겁니다. 어떤 개인의 인격 속에 모든 게 다 들어간 사표가 있다면 공부하긴 참 편하겠죠. 그렇지만 그건 낡은 생각이에요. 집단지성 같은 게 필요하고 집단지성을 위한 공간을, 그 진지를 어떻게 만들 건가가 앞으로의 지식인들이 핵심적으로 고민할 과제예요.”


한번도 안 바뀐 노론 권력

 

-이번 책에서 제시하신 ‘원형 인식모델’은 우리 사유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 같습니다. 토대와 상부구조를 기계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음과 양, 화(和)와 동(同), 이상과 현실, 좌와 우를 둥근 원 안의 대칭선상에 놓으셨지요. 대비되는 것들은 서로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는 것이라고 하셨고요. 그 말씀엔 다 고개가 끄덕여지는데 막상 현실을 보면 이게 쉽지가 않아요. 카운터파트가 격이 너무 떨어져요. 어느 정도 격이 맞아야 상호보완이고 뭐고 하지 않겠습니까?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탐욕과 독선이 도를 넘은 지 오랩니다.

 

“차이라는 건 단순히 공존하는 데서 끝내는 게 아니고, 자기 변화의 시작으로 삼아야 해요. 차이를 자기 변화의 학습교본으로 삼고 실천하는 것, 그게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에 이은 ‘가슴에서 발(실천)로의 긴 여행’이지요. 근데 우리 현실에서 좌-우, 남-북, 진보-보수, 이런 대비 관계가 과연 상생적인 대비 관계를 이룰 수 있을 것이냐? 너무나 비대칭적이어서 도대체 지양(止揚)을 할 수 있는 상생의 파트너가 아니지 않으냐? 그럴 수 있어요. 근데 어느 나라 역사에도 그렇게 이상적인, 완벽한 평형을 유지하는 대비 관계는 극히 드뭅니다. 우리만 하더라도 분단과 외세, 그리고 임란 이후 한 번도 바뀌지 않은 노론 권력의 오래된 지배구조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해 왔잖아요.”

 
-노론 권력이라고요?

 

“예, 임란 이후에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몰아내고 나서 지금까지 우리나라 지배권력은 한 번도 안 바뀌었어요. 노론 세력이 한일합방 때도 총독부에서 합방 은사금을 제일 많이 받았지요. 노론이 56, 소론이 6명, 대북이 한 사람. 압도적인 노론이 한일합방의 주축이거든요. 해방 이후에도 마찬가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때도 행정부만 일부 바뀐 거지, 통치권력이 바뀐 적은 없습니다. 외세를 등에 업고 그렇게 해왔지요. 대학, 대학교수, 각종 재단, 무슨 시스템 이런 것들 쫙 다 소위 말하는 보수진영이 장악하고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어쩌겠어요? 그렇게 비대칭적으로 자기를 강화하고 군림하는 집단은 다 자기 이유가 있는데. 그런데 그런 중심부 집단은 그게 또 약점이 돼요. 중심부는 변방의 자유로움과 창조성이 없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인류문명의 중심은 부단히 변방에서 변방으로 옮겨왔잖아요. 그런데 이런 역사적 변화는 그렇게 쉽게 진행되는 게 아니에요. 역사의 장기성과 굴곡성을 생각하면, 가시적 성과나 목표 달성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과정 자체를 아름답게, 자부심 있게, 그 자체를 즐거운 것으로 만드는 게 중요해요. 왜냐면 그래야 오래 버티니까. 작은 숲(공동체)을 많이 만들어서 서로 위로도 하고, 작은 약속도 하고, 그 ‘인간적인 과정’을 잘 관리하면서 가는 것!”

 

-그 말씀 들으니 조금 위로가 되네요.(웃음)

 

“저도 말은 이렇게 하지만 아마 이 선생보다 더 속상할걸요, 속으로는.(웃음) 근데 엄청난 아픔이나 비극도 꼭 그만한 크기의 기쁨에 의해서만 극복되는 건 아니거든요. 작은 기쁨에 의해서도 충분히 견뎌져요. 사람의 정서라는 게 참 묘해서, 그렇게 살게 돼 있는 거지요.”

 

큰 아픔을 같이 짊어지고, 소소한 기쁨을 같이 나눌 이웃 만들기, 그게 신영복이 주장해온 ‘더불어숲’의 정신이다. 그 숲 속, 그의 너른 나무그늘 안에 우리 모두 오래오래 머물 수 있기를!

 

 

“역사의 장기성·굴곡성 생각하면
목표달성에 과도한 의미 부여 말고
과정 자체를 아름답고 자부심 있게
그 자체를 즐겁게 만들어야 해요
왜냐면 그래야 오래 버티니까”에서는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말했다.

 

“어쩌겠어요? 그렇게 비대칭적으로 자기를 강화하고 군림하는 집단은 다 자기 이유가 있는데. 그런데 그런 중심부 집단은 그게 또 약점이 돼요. 중심부는 변방의 자유로움과 창조성이 없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인류문명의 중심은 부단히 변방에서 변방으로 옮겨왔잖아요. 그런데 이런 역사적 변화는 그렇게 쉽게 진행되는 게 아니에요. 역사의 장기성과 굴곡성을 생각하면, 가시적 성과나 목표 달성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과정 자체를 아름답게, 자부심 있게, 그 자체를 즐거운 것으로 만드는 게 중요해요. 왜냐면 그래야 오래 버티니까. 작은 숲(공동체)을 많이 만들어서 서로 위로도 하고, 작은 약속도 하고, 그 ‘인간적인 과정’을 잘 관리하면서 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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