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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서 가장 강한 사람, 가장 위험한 사람은…..
사회

법정에서 가장 강한 사람, 가장 위험한 사람은…

문유석의 미스 함무라비 기자 입력 2016/01/16 11:41


문유석의 미스 함무라비 (16) 사법부 신뢰, 해법 논쟁(하)
(지난주 내용 요약 : 민사재판만 하다 형사재판을 겸하게 된 44부. 첫 공판은 재단이사장 장남인 사립대 교수의 준강간 사건. 평소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법원이 되면 된다”고 간단명료하게 사법부 신뢰의 해법을 제시했던 박 판사와 한세상 부장판사 간에 논전이 펼쳐지는데…)

 

변호인석에 첫 기일에는 보이지 않았던 얼굴이 눈에 띄었다. 백발의 노변호사였다. 로펌의 고문이자, 전직 대법관이다. 임바른 판사는 살짝 놀랐다. 법정에 직접 출석하는 일은 거의 없는 변호사이기 때문이다. 짚이는 것이 있어 기억을 더듬어보니 노변호사는 피고인이 있는 대학 출신 법조인 중 대표 격인 인물이다.

 

먼저 실시된 여관 종업원에 대한 증인신문은 큰 소득 없이 끝났다. 돈 받고 방 키를 내주었을 뿐 피해자 모습은 제대로 못 봤다는 진술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검사가 경찰에서 진술할 때에는 여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남자에게 안기다시피 하여 비틀거리며 가더라고 진술하지 않았냐고 추궁했다. 종업원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에유, 밤에 한잔하고 여관 들어오는 커플 열 중 아홉은 그런 모습이에요. 경찰에서 한 얘기는 그만큼 별 특별할 것 없었다는 소리죠. 완전 뻗은 여자를 남자가 업고 가거나 질질 끌고 갔으면 제가 유심히 봤겠죠. 그날 본 커플은 여자가 좀 비틀거리긴 해도 제 발로 걷는 것 같던데요?”


일식집 주인은 재판에 왜 왔을까
 

다음으로 피고인과 피해자가 여관에 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피해자의 대학원 동기 여학생이 증인석에 앉았다. 여학생의 증언은 조금 달랐다. 피고인이 피해자를 부축하다시피 하여 끌고 가고 있었고 피해자는 머리를 피고인의 어깨에 기댄 채 힘이 하나도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변호인이 반대신문에 나섰다. 지난번에 피해자에게 공격적인 질문을 던지던 젊은 변호사다.

 

“증인은 학부 시절 학생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었지요?” “네? 그게 이 사건이랑 무슨 상관이죠?” “상관있어서 여쭤보는 것이니 답변해 주시죠.” “네. 그랬었어요.”

 

“증인은 당시 학교 재단에 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집회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였지요?” “네.” “당시 재단 비리를 주장하다가 해고된 교수의 복직 투쟁에도 앞장선 바 있지요?” “…네.” “재단이사장 장남인 피고인에 대해 평소 그리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을 듯한데, 어떤가요?” “변호사님!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 거죠? 제가 누굴 모함이라도 한다는 말씀인가요? 변호사라고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건가요?” “아무 말이나 할 여유는 없지요. 저는 피고인의 변호인으로서 증언의 신빙성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제기할 만한 말을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랍니다.”

 
시니컬한 말투에 옆자리에 앉은 노변호사가 눈살을 찌푸리고 젊은 변호사를 쳐다보았다. 눈초리를 느낀 젊은 변호사는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했다. “증인께 다시 묻습니다. 아까 말씀하신 대로 피해자가 늘어진 채 피고인에게 끌려서 여관에 들어가는 상황이었다면 피해자의 신상에 위험이 있을 것을 걱정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동기 여학생이 위험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무얼 하셨죠? 보고만 있은 후, 며칠 지나서 친구에게 두 사람이 술 먹고 여관에 들어가는 걸 봤다고 얘기한 게 전부지요? 그 결과 학교에 소문이 다 났고 말이죠.”

 

증인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제가 잘못한 거예요. 그때 도와줬어야 하는데.” “증인은 최소한 당시 뭔가 위험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는 판단하지 않은 것 같은데 아닌가요?” “….”

 

“답이 없으시군요. 증인은 피고인과 피해자가 함께 여관에 들어가는 상황에 대해 당시 전혀 달리 해석하신 것 아닌가요? 증인은 평소 피해자에게도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면서요. 실력도 없으면서 얼굴 하나 믿고 교수에게 아양 떨어서 유학 가려는 꼴이 역겹다, 난 어차피 학부 때 찍힌 몸이라 이 학교에서는 희망 없다. 증인이 동기 여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하신 적 있다던데 아닌가요?” “….” “정의감 투철한 증인이 당시 가만있었던 것은, 피고인과 피해자가 합의하에 여관에 들어가는 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 아닌가요?” “그, 그건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변호사는 유능했다. 증인은 이미 패닉에 빠져 횡설수설할 뿐이었다.

 

추가 증인이 한명 있었다. 변호인 측이 신청한 증인으로, 일식집 여종업원이다. 그녀가 묘사한 식사 자리의 모습은 화기애애했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피고인이 호탕하게 계속 건배를 외치면 피해자는 단숨에 잔을 비우곤 했다는 것이다. 방에 들어가 보니 거나하게 취한 피고인이 폭탄주를 만들어 러브샷을 하자고 소리치자 여학생은 망설이지 않고 피고인의 팔에 자기 팔을 걸더라고도 했다. 나중에 피고인이 식사비를 계산하는 동안 여학생은 취기가 오르는지 빈 의자에 잠시 앉아 있었지만 피고인이 다가오자 일어나 함께 가게를 나갔다고 했다.

 

주의 깊게 듣고 있던 박차오름 판사는 증언이 끝나고 증인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자 한세상 부장판사에게 뭐라고 나직이 속삭였다. 한 부장은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주심판사가 증인에게 추가로 몇 가지 묻겠습니다. 증인은 자리에 앉으세요.”

 

증인은 놀라 판사석을 쳐다보았다가 얼른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 앉았다. 박 판사가 입을 열었다. “증인, 증언하실 때 대답을 마친 후 무심코 고개를 돌려 방청석을 쳐다보시던데 누구를 보신 건가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정하게 세번 그러시더군요. 누구를 보신 거죠?” “아니, 저는 그런 기억이….”

 

박 판사는 방청석을 쳐다보며 말했다. “증인과 함께 오신 분이 어느 분이죠? 끝줄에 앉으신 양복 입으신 분, 증인이 그쪽을 쳐다보는 것 같던데 증인과 어떤 관계시지요?”

 

중년 남성이 쭈뼛거리며 일어섰다. 그는 증인이 일하는 일식집 주인이었다. 박 판사는 다시 증인에게 물었다. “증인, 사장님이 이 재판과 관련해서 뭐라고 얘기한 적 없나요?” “에구, 사장님은 가게에 잘 나오지도 않으셔요.” “그건 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네요. 사장님이 재판 출석 전에 뭐라고 하신 적 없나요?” “전 법원에 왔다 갔다 하는 것 자체가 싫은 사람이에요. 여기가 뭐 좋은 데라고….”

 

‘사립대 교수 준강간’ 두번째 공판
변호사의 날카로운 반대신문에
피해자 동기 여학생 증인은 패닉
또 다른 증인 일식집 여종업원은
자꾸 뒤를 보며 쭈뼛거리는데…

 

긴 설명 끝 한 부장의 한마디
“피고인을 징역 4년에 처한다”
나무토막처럼 쓰러진 피고인
박 판사는 머리가 복잡해서
다음 재판에 집중이 안됐다

 

그날 온 노변호사에 관한 의심

 

임 판사는 전에 본 책을 떠올렸다. 전직 시아이에이(CIA) 수사관이 심문 경험을 토대로 쓴 책인데, 인간은 숨기고 싶은 부분에 대해 직설적인 질문을 받으면 단순명쾌한 부정 대신 자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등 간접적인 변명으로 자기방어부터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반면 실제로 그런 일이 없는 경우에는 대체로 망설이지 않고 명쾌하게 부인한다.

 

박 판사의 날카로운 질문이 이어지자 결국 증인이 입을 열었다. “그냥 이런 말씀은 하셨어요. 교수님이야 신사 중의 신사이신데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사장님이 피고인을 잘 아시는가 보죠?” “…워낙 단골이시니까요. 이 대학 근처에서 저희 집이 제일 고급 식당이라 자주 오세요.” “큰손님이군요. 게다가 대학 재단 후계자이기도 하고. 혹시 피고인 쪽에서 누가 찾아오지는 않았나요?” “….”

 

박 판사가 재차 물으려는 순간, 변호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피고인의 부인이 식당을 찾아간 일은 있습니다만, 그건 증인이 한사코 출석하지 않으려 한다고 하기에 출석을 부탁하러 간 것뿐입니다. 증언 내용에 대해 불법적인 청탁을 한 일은 없습니다.” “변호인, 지금 증인에게 묻고 있습니다!” 박 판사의 날카로운 음성에 변호인은 얼른 자리에 앉았다.

증인이 입을 열었다. “변호사님 말씀이 맞아요. 제가 무서워서 나가기 싫다는데 그때 식사 자리 분위기에 대해 있는 그대로만 얘기해 달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어요. 사장님도 그러시고….” “증인, 있는 그대로 얘기한 것 정말 맞나요? 그럼 왜 그리 한사코 나오지 않으려 하셨죠? 아까 선서한 내용 기억하죠? 법정에서 거짓말하면 위증죄로 처벌받습니다. 혹시 사실과 다르게 말한 부분이 있더라도 증언을 마치기 전에 바로잡으면 처벌받지 않아요.” 뚫어져라 쳐다보는 박 판사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증인은 고개를 숙였다.

 

“전 진짜 거짓말한 거는 없어요. 아까 드린 말씀은 다 사실이에요. 단지….” “단지 뭐죠?”

 

“그냥 묻지 않으셔서 말씀 안 드린 게 하나 있는데요….” “말씀하세요.”

 

“식사들 하실 때, 제가 소변이 마려워서 화장실에 갔었는데, 여학생이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더라고요. 토했었나봐요. 제가 놀라서 흔들어 깨우니까 눈을 뜨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더라고요. 괜찮은가 걱정했는데, 나갈 때 보니 또 괜찮은 것 같기도 해서….”

 

그 외에 새로운 증언은 없었다. 피고인은 최후 진술 때 종전 주장을 되풀이했다. 자기도 취하고 피해자도 취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신을 잃을 만큼 만취한 건 아니었다. 술이 오르자 부끄럽지만 남자의 본능 때문에 흑심을 품게 된 것은 인정한다. 뭔가를 기대하고 술을 자꾸 권하고, 여관 쪽으로 이끈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절대로 필름이 끊긴 상태의 피해자를 끌고 간 것은 아니다. 취하기는 했지만 피해자도 못 이기는 척 자기가 이끄는 대로 따라오는 상황이었다. 한 부장은 선고기일을 지정하고 재판을 마쳤다.

 

일주일 후 피고인 측은 피해자를 위해 3천만원을 공탁했다는 서면을 제출했다. 비록 준강간죄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수로서 취한 학생을 고이 귀가시키지 않고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것은 맞으므로 도의적인 책임을 느껴서 공탁한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박 판사는 분개하여 사실상 범행을 자백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지만 한 부장은 고개를 저었다. 한 부장은 몇 번이나 의문점을 제기하면서 기록을 구석구석까지 재검토하자며 최종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지친 박 판사는 임 판사에게 말했다. “부장님, 좀 이상하지 않아요? 이런 생각 하면 안 되지만, 저 자꾸 엉뚱한 생각이 들어요. 예전 판결문 검색해보니 그날 들어온 노변호사님, 우리 부장님 초임 배석일 때 함께 일한 재판장이셨더라고요.” “박 판사, 무슨 그런 소릴 해요? 우리 부장님이 그럴 분은 아니잖아요?” “네. 저도 답답해서….”

 

선고를 3일 앞두고 결국 한 부장도 마음을 정했다.

 

선고기일, 피고인은 창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 있었고, 방청석에는 피해자와 그녀의 남자친구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길고 긴 설명 끝에, 한 부장의 한마디가 떨어졌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피고인을 징역 4년에 처한다. 실형을 선고하므로, 피고인을 법정구속합니다. 피고인, 구속 사실을 누구에게 통지하면 될지 말씀하세….”

 

그 순간, 피고인은 나무토막처럼 쿵 소리를 내며 자리에 쓰러졌다. 당황한 교도관들이 달려와 다친 곳이 없는지 살펴보고 정신을 차리게 한 뒤 데리고 나갔다. 피해자는 무표정하게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떤 사형 선고와 ‘메멘토 모리’

 

선를 마친 뒤 한 부장은 태연히 다른 재판을 진행했지만, 박 판사는 머리가 복잡해서 재판에 집중할 수 없었다. 피고인이 쓰러지는 모습, 백지장처럼 창백하던 얼굴, 그걸 지켜보는 피해자의 무표정한 모습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검토하여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한 사건이지만, 비합리적 의심이 아무 이유 없이 뭉게뭉게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느낌 때문에 심장이 조여오는 것 같았다.

 

재판을 모두 마친 뒤, 판사실로 돌아오던 한 부장은 부장실 앞에서 잠시 멈춰 있더니, 잠시 들어오라며 방문을 열었다. 두 판사를 세워둔 채 자리에 앉은 한 부장은 책상 맨 위 서랍에서 뭔가를 꺼냈다. 두툼한 편지 몇 통이었다. 발신인 주소란에 비뚤비뚤한 글씨로 어느 교도소 주소가 쓰여 있었다. 잠시 침묵하고 있던 한 부장이 불쑥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은 내게 사형을 선고받은 피고인이오.” 박 판사와 임 판사의 놀란 표정은 아랑곳 않고 한 부장은 독백하듯 말을 이었다. “세명의 여성을 잔혹하게 살해한 연쇄살인범으로 기소된 사건이었지. 증거는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어. 울부짖는 유족들을 보며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 내 의무라고 생각했지.” “….”

 

 

 

“항소심 진행 중에 세명 중 두명을 살해한 진범이 잡혔어. 결국 한명만 이 사람의 소행이었지. 내 판결은 파기되었고, 징역 17년이 선고되었어. 이 사람은 해마다 1월1일이면 내게 편지를 보내오고 있어. 7년째. 정중한 말투로, 언젠가 찾아뵙고 싶다는 인사말로 마무리하지.” 임 판사는 문득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라틴어 경구를 떠올렸다. 죽음을 기억하라.

 

한 부장은 다른 봉투 하나를 꺼내 보였다. “이건 그때 항소심 선고 후 법원장에게 제출했던 사직서야. 극구 만류하면서 반려하시더군. 난 이 사직서와 해마다 날아오는 편지를 내 몸 가장 가까운 곳에 두고 일하고 있어.”

 

한 부장은 박 판사를 응시하며 말했다. “박 판사, 저번에 얘기한 강자와 약자 얘기, 틀리지 않았어. 박 판사의 생각, 옳아. 딱 한가지만 빼고 말야.” 박 판사는 홀린 듯이 한 부장을 마주 보았다. “법정에서 가장 강한 자는 어느 누구도 아니고, 바로 판사야. 바로 우리지. 그리고 가장 위험한 자도 우리고. 그걸 잊으면 안 돼.” 한 부장은 조용히 편지를 집어넣고 서랍을 닫았다.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개인주의자 선언>, <판사유감> 저자. 원래 ‘우리 이웃의 분쟁’을 보여주는 실제 사건에 관해 쓰려다가 사생활 보호 문제 때문에 픽션으로 방향을 틀었다. 인간사 갖가지 분쟁과, 이를 법정에서 중재하고 판결하는 판사들 내부의 풍경을 그린다. 소설은 처음 써보는 거라 떨고 있다. ‘미스 함무라비’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신조로 삼는 열혈 정의파 초임 여성 판사가 주인공이다. 초보인 작가만큼이나 소설 속의 미숙한 그녀를 응원해주시길.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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