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는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으로부터 왕권을 양위 받아 1392년 7월 17일 왕위에 오른다. 고려의 잔재들과 반발세력을 잠재운 뒤 1393년 9월 새 도읍지로 한양으로 결정한다.
이 보다 먼저 1393년 1월2일 권중화가 계룡산의 도읍 지도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미 이성계는 1392년 11월29일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면서 권중화에게 새 도읍지 선정에 대해 언질을 주었을 가능성이 여기서 포착된다. 아마도 밀실(?)정치로 계룡산이 신도읍지로 선정되었지만, 신진사대부들은 아마도 한양을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계룡산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공사를 중지할 명분이 없었던 차에 하륜의 상소가 그 동기를 만들어 준 것이다. 하륜은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의 가신이었다. 아마도 이성계의 의중을 간파한 이방원의 계책에 의해서 하륜이 상소를 올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계룡산 아래에 도읍지를 정하여 공사를 하다가 하륜의 상소를 접수하자 곧 바로 중단하다. 이것은 하륜의 주장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한양으로 도읍지를 변경한다는 은밀한 결정이 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 국가 창건 후 빠른 의사결정도 중요하지만 중지를 모으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때 내밀하게 무학대사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에 더 큰 무게를 둔다. 이성계는 개성과 계룡산 신도읍지를 오가면서 수시로 회암사에 들러 무학대사를 만났다. 무학대사는 신 도읍지로 한양을 추천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야사이다.
이렇듯 이성계는 자신의 주도로 일을 추진하지만 주위의 의견을 많이 듣고 결정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성계는 지금보다 더 좋은 방안을 찾는데 주저하지 않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미 공사를 하고 있었던 계룡산에서 한양으로 결정을 수정하는 것도 매우 신속하였다. 그의 이러한 빠른 판단력은 조선창건의 밑거름이었을 것이다.
이성계의 이런 결정은 그의 신후지지를 구하는데도 유감없이 재능을 발휘한다.
애초에 이성계의 신후지지는 현재 남재 묘였다. 그럼에도 그 자리가 성에 차지 않았다. 이미 남재의 신후지지가 좋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성계는 날을 잡아서 무학대사와 남재를 데리고 자기의 신후지지를 둘러 본다. 그리고 가까운 거리에 있던 남재의 신후지지(지금의 건원릉)를 보고 마음에 들어서 끙끙거리자 남재는 큰마음을 먹고 그 자리를 양보한다. 이성계는 너무나 기뻤다. 아무리 신하의 신후지지이지만 몇 년전까지만 해도 동지였던 사이였기에 이성계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자기의 신후지지를 남재에게 넘겨준다.
“불암산은 문필봉이라고는 하지만 성정이 외골수이고 고집불통이고 주위 사람들에게 왕따 당하는 모습이잖아요. 후손들이 모함을 받을까 두렵습니다. 이미 정해진 왕의 자리에 시신을 묻으면 역모로 몰려 죽는 후손이 태어난다는 말도 있으니 걱정이 태산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집안 전체가 몰살당할 수도 있는데...”
“아! 이 사람아 걱정도 팔자일세. 허 허 참 알았어! 만약에 자네 후손 중에서 모반을 꾀했다고 해도 당사자만 죄 값을 치르도록 내가 유훈으로 남겨둠세. 되었는가? 이제 자네나 나나 걱정거리가 없어졌으니 이 고개를 ‘망우리’라고 하면 좋겠구만...”
이런 내용을 남재의 신도비(10대손 남구만撰), 행장(11대손 남반撰), 묘표(15대손 남공철撰)에서 기록하고 있다.
정사에서는 하륜이가 태종 이방원의 명을 받고 건원릉을 선정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무학대사를 싫어한 태종 이방원의 조작일 가능성도 있다.
신후지지를 맞 바꾸었다는 이야기는 자칫 불충에 해당되기 때문에 쉽게 만들어 기록하기 힘든 내용이다.
어쨌든 다른 신도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내용들이다.
이러한 여정들을 볼 때 이성계는 풍수를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균형감각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풍수실력보다도 좋은 것을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한 것이다.
열려있는 의사소통과 의사결정 과정 그리고 신속한 방향전환은 이 시대에 너무나 필요한 정치적 자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