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있어 신영복 교수의 '글씨'는 철거민, 매 맞는 여성들, 산동네 빈민을 위한 작품이었다."
빈민활동가 송경용 성공회 신부가 지난 15일 타계한 신 교수를 추억하며 남긴 말이다. 송 신부는 20여 년간 고인의 서예 작품을 팔아 빈민 활동에 쓴 성직자로, 신 교수의 제자 1호다. 신 교수가 1989년 성공회대 교수로 부임하면서 제자로 인연을 맺었다.
송 신부는 17일 기자와 만나 "약 20년에 걸쳐 노숙자들을 만날 때, 매 맞는 여성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갈 곳이 없을 때, 장애인, 빈자들이 있을 때마다 보금자리를 위해 고인이 글씨를 기탁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화랑가인 서울 인사동 등지를 전전하며 고인의 서예를 팔아 마련한 빈민활동 자금이 1억 5000만~2억 원 선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온갖 노동활동가, 사회학자 등을 위한 기금마련에 쓰인 액수까지 합치면 액수는 일부에 불과할 것"이라고 봤다. 고인이 빈자를 위해 자신의 작품을 선뜻 잘 넘긴 데다 '글씨값'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서다.
고인은 2006년 소주 ‘처음처럼’의 로고 붓글씨를 쓰면서 글씨 사용료를 고사했고, 두산주류는 고인의 뜻을 존중해 1억 원을 성공회대 장학금으로 기부했다. 송 신부는 "봉천동 산동네 철거민촌의 행사 때마다 글씨를 주셨다"며 "기증 작품에는 감옥에서 썼던 당신의 좌우명 등이 그 안에 있었다"고 했다.
"일껏 붓을 가누어 조신해 그은 획이 그만 비뚤어 버릴 때 저는 우선 그 부근의 다른 획의 위치나 모양을 바꾸어서 그 실패를 구하려 합니다…" 지난 16일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에 차려진 고인의 빈소 인근 ‘고(故) 우이 신영복 선생 추모 작품 전시회’에 걸린 이름 없는 서예 작품의 첫 문장이다.
그의 서예에서 실패한 한 획은 다른 획의 도움을 받아 '어깨동무'하며 전진했다. 고인은 정적이고 귀족적인 '궁체'와 대비된 동적이고 담백한 필법을 지녀, '어깨동무체'라는 고유 서체를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