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과 19일 국회에서 열린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신년 기자회견에서도 매체별로 기자단이 사전에 질문자와 질의 순서, 내용을 조율한 것으로 밝혀졌다.
전체 기자회견 시간이 한정돼 있어 기자들의 질문이 겹칠 경우 충분한 답변을 얻기 어렵기 때문에 기지회견 각본이 필요하다는 점은 지난 13일 박근혜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 때 청와대 기자단의 설명과 같았다. 국회 출입기자단에 속해 있지 않은 기자들이 질문할 기회가 없었던 점에서도 폐쇄적 성격이 강했다.
다만 국회 출입기자들은 여야 대표의 연설을 듣고 나서 사전 질문 주제에서 벗어난 다양한 ‘돌발 질문’을 던지기도 했고, 청와대와 다르게 국회 여야 대표들은 기자들의 질문을 받는 공식·비공식적 자리가 많다는 점에서 언론의 취재권을 제한했다고 볼 여지는 크지 않다. 그럼에도 전 국민이 지켜보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발표자의 답변에 대한 추가 질문을 받는 등 보다 개방적인 방식 도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앞서 지난 13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한 편의 잘 짜인 각본과 같았다. 청와대 출입기자단은 지난 두 차례의 대통령 신년기자회견에서 질문 순서와 내용을 사전 조율한 것으로 드러나 여론의 질타를 받았는데도 올해 역시 기자회견 ‘연출’은 반복됐다.
이날 청와대 춘추관에서 박 대통령의 대국민담화에 이어 진행된 기자회견에선 모두 13명의 기자들(서울신문·KBS·조선일보·이데일리·헤럴드경제·경상일보·OBS·뉴데일리·JTBC·한국일보·평화방송·일본 마이니치신문·대전일보)이 질문했고, 질문 순서와 내용은 미디어오늘이 사전에 입수한 내용과 대부분 일치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앞서 지난 12일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은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사전에 질문 내용을) 받지 않는다. 질문 순서와 내용도 전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정 대변인은 ‘현장에서 박 대통령과 기자들의 즉각적인 문답이 이뤄지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그렇다”며 “13일 오전 10시30분부터 시작하는데 박 대통령의 답변 시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고 밝혔다.
거짓말이었다. 미디어오늘이 이날 기자회견이 시작되기 전 대통령의 대국민담화와 기자회견을 생중계하는 방송국들에 확인한 결과, 방송국에선 이미 질문하는 기자들의 명단과 예정 시간을 파악하고 있었다. 한 방송국 관계자는 “90분 동안 기자회견을 진행한다는 것과 13개 매체에서 질문을 받는다고 알고 있다”고 밝혔다.
이날 기자회견이 각본대로 진행됐음은 전 국민이 지켜보는 기자회견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정 대변인은 “지금부터 기자 여러분들의 질문을 받도록 하겠다. 지명을 받은 분들은 소속과 이름을 밝히고 질문해 주시기 바란다”며 한 기자의 질문이 끝나면 “네 다음 질문 받겠습니다. 손을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미리 질문 순서가 정해졌음에도 여러 기자들이 손을 들었고, 정 대변인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질문 순서에 맞춰 해당 기자를 지목했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정해진 기자회견 시간 내에서 질문 주제가 겹치지 않게 현안을 골고루 질문하려면 어느 정도의 조율은 필요하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질문자로 선정되지 못한 청와대 기자들도 마치 기자들이 여기저기 손을 드는 장면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이날 12번째로 질문한 요네무라 고이치 마이니치신문 기자는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손을 들었는데, 그는 자신이 질문자였다는 것은 통보받았지만 본인의 순서를 몰랐던 것으로 전해졌다. 요네무라 기자를 제외하곤 누가 몇 번째로 질문할지 알고도 손을 들었던 것이다.
결국 이날 기자회견에서 어떤 기자가 어떤 질문을 할지 청와대가 미리 파악을 하고 있었음에도 박 대통령과 정 대변인은 ‘즉문즉답’인 것처럼 연출했다. 특히 박 대통령은 기자회견 도중 “아까 질문을 한꺼번에 여러 개 하셔가지고. 제가 머리가 좋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기억을 하지, 머리 나쁘면 이거 다 기억 못 해요. 질문을 몇 가지씩이나 하시기 때문에”라고 말해 폭소를 자아냈다.
또한 비록 기자회견은 각본대로 진행됐더라도, 질문한 기자들이 기자회견 후 쓴 기사에선 청와대의 폐쇄적인 기자회견 방식이나 예기치 못한 불편한 질문에 답변을 꺼리는 박 대통령의 태도를 지적하는 내용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되레 일부 기자들은 박 대통령의 옷차림과 화법, 청와대 기자회견 방식을 띄워주기까지 했다.
최상현 헤럴드경제 기자는 “박 대통령은 이날도 결연한 의지를 표현할 때 즐겨 입는 붉은색 재킷을 입고 회견장에 들어섰다”며 “이날 행사장인 춘추관 2층 브리핑룸에는 ‘권위’를 탈피하고 ‘소통’을 확보하려는 청와대의 노력이 눈에 띄었다”고 보도했다.
최 기자는 이어 “대통령과 기자들 좌석 사이의 거리도 지난해에 비해 훨씬 가까워졌다. 지난해 3m에서 올해는 거리가 2m로 1m가 줄어들었다”면서 “국민과의 거리가 30% 정도 가까워졌다. 자리 배치는 권위적인 모습을 탈피하고 소통을 늘리겠다는 박 대통령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는 청와대 관계자의 말을 전했다. 기자들과 거리가 1m 줄어든 게 눈에 띄는 ‘권위’ 탈피와 ‘소통’ 확보로 보였는지, 어딜 봐서 국민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는지 갸우뚱한 대목이다.
이준기 이데일리 기자는 “‘제가 머리가 좋아서..’ 여유 되찾은 朴대통령” 제목의 기사에서 “박 대통령은 기자들이 한번에 많은 질문을 던지자 ‘제가 머리가 좋아서 다 기억하지 머리 나쁘면 기억을 못 한다’고 말해 회견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 기자는 위안부 할머니와 만남 계획 등 ‘머리 좋은’ 대통령이 명확히 대답하지 않은 사안이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 대한 개인적 평가 등 민감한 질문을 농담으로 넘기려 한 점에 대한 지적보다는 “여유가 묻어났다”고 평가했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짜고 치는 고스톱’과 같은 폐쇄적 기자회견 방식과 대통령의 답변에 항상 너그러웠던 것은 아니다. 지난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참여정부 출범 100일을 맞아 연달아 두 번의 기자회견을 했을 때, 당시 청와대를 출입했던 김정훈 동아일보 기자는 “회견 말미에 사회자가 ‘질문이 더 없느냐’고 묻기도 했으나 대통령 기자회견에서는 예정된 기자들만이 질문하는 것이 관행으로 돼 있다”며 “일각에서는 ‘차제에 완전 자유질문 제도로 바꾸거나 충분한 질의시간을 보장해주는 방향으로 운영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노 대통령에게 질문했던 고태성 한국일보 기자는 “대통령의 이중잣대”라는 칼럼을 통해 “노 대통령이 국민을 향해선 ‘탈권위’라는 미래의 문화를 얘기하다가 (언론이) 자신의 거친 화법에 대해선 적절히 걸러주는 관행, 즉 과거의 문화로 돌아간 것이라면 그야말로 이중잣대”라며 “걸러준다는 것 자체가 노 대통령이 지향하는 언론과의 건전한 긴장관계에 적합한 것이냐는 의문도 제기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