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4일 역사교과서 국정화 결정 후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은 집필진 명단을 공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집필환경을 보장해야 한다는 이유를 댔다.
[서울, 연합통신넷= 김현태기자] 대신 11월 내로 집필 가이드라인인 편찬기준을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공개 일정이 하염없이 미뤄지더니 오늘(27일)은 약속 자체를 뒤집었다. 이미 기준이 확정돼 집필이 시작됐지만 공개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책이 나오면 확인해 보라는 것이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이영 교육부 차관은 27일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에서 편찬기준 비공개와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에 “(국정교과서에는) 원고본·개고본·심의본·현장 적용본 등 여러 단계가 있다”며 “(지금 공개하진 않지만) 현장에서 점검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국민이 내용을 보고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기본적인 편찬 방향은 객관적 사실과 헌법 가치에 충실하고 북한의 현황에 대해 학생들이 알 수 있게 해 대한민국에 자긍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라면서 “친일·독재 미화 등은 당연히 들어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편찬기준 비공개는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지적한다.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는 “편찬준거안(편찬기준)은 1987년 처음 만들어졌는데, 그 당시에는 국정교과서 편찬준거안 시안 공청회까지 연 뒤에 집필 단계 전에 편찬 기준 확정안을 공개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국정교과서는 단일한 해석을 가진 하나의 교과서를 만드는 작업”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편찬기준을 공개해 다양한 학설상의 차이와 사회적 쟁점이 되는 문제에 대한 의견 수렴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짚었다.
역사학계와 교육계에서는 정부 입맛에 맞는 역사서술을 위한 것 아니냐는 우려를 하고 있다. 도면회 대전대 교수는 “편찬기준을 미리 공개해버리면 국정교과서 집필 완료 이후에 정부 마음대로 뜯어고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공개를 안 하는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준식 역사정의실천연대 정책위원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의 축소는 물론 제주 4·3사건과 광주 민주화운동, 박정희 정권시기 등 근현대사 서술에 있어 논란이 예상되니까 공개를 미루는 것 아니겠느냐”는 분석을 내놨다. 실제 학계에선 편찬기준이 발표되면 이에 대한 분석작업을 하겠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집필기준 공개 없는 집필 시작으로 학술적 논의 여지마저 차단해버리게 됐다.
교육계에서는 기존 검정교과서와 다른 국정교과서를 내놓으면서 현장 교사들한테 미리 새 교과서 내용을 가늠해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태우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은 “선생님들이 편찬기준이라도 미리 보고 내용을 파악한 뒤 수업을 구성해야 하는데 정보공개가 전혀 안 되고 있다”며 “수업을 준비해야 하는 선생님이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고 우려했다.
검증 받지 않은 국정교과서가 외교적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도면회 교수는 “세계사 과정이 포함된 중학교 역사의 경우, 학계의 검증 없이 국정교과서를 만들었다가 자칫 중국·일본과 외교적 갈등을 빚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