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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김덕권칼럼] 평상심시도..
오피니언

[덕산 김덕권칼럼] 평상심시도

김덕권 기자 duksan4037@daum.net 입력 2018/06/28 08:27 수정 2018.07.05 09:47
세상 사람은 도라고 하면 특별한 것 또는 보통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기특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원불교문인회장

평상심시도

어제 밤 우리 축구대표 팀이 세계 1위 독일과 러시아 월드컵의 마지막 대회를 치렀습니다. 참으로 통쾌했습니다. 세계 1위 독일을 무려 2대 0으로 이겼습니다. 대부분 질 것이란 예상을 뒤엎고 최선을 다한 대표 팀이 여간 자랑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저는 2002년 서울 월드컵 4강에서 맡 붙었던 독일과의 대회전(大會戰) 때 ‘황태자의 첫사랑’의 무대,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있었습니다.

점심을 겸해 대형 식당에서 독일 사람들과 우리 한국인들이 두 편으로 갈려 열띤 응원전을 벌렸습니다. 그런데 이 응원전이 과열 되어 큰 싸움이 날 번 한 것이 생각납니다. 애국심이 이런 것인가 봅니다. 평상심을 유지 하지 못하고 흥분한 것이 싸움의 원인이었지요. 그 때의 울분을 이제야 삭인 것같습니다.그런데 이번 월드컵에서 유난히 페널티킥으로 승패가 좌우된 일이 잦았다고 합니다. 우리도 스웨덴 전과 멕시코 전 때 두 번씩이나 당했었지요.

노르웨이의 스포츠심리학자 가이르 요르데 박사의 조사에 따르면 스타급 선수의 페널티킥 성공률(60%)은 무명 선수들의 성공률(75%)보다 훨씬 낮았다고 합니다. 영국 오픈대학 존 빌스버리 박사는 “스타 선수일수록 심리적 부담이 크고, 킥의 스타일이 잘 알려져 있어 페널티킥 성공률이 떨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마치 재주 있는 사람이 일 그르치기 쉽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것은 평소에 학교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 대학 입시라든지 큰 시험에서 낭패하는 사례와 유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평상심을 쓰는 공부가 되어 있지 않은 증거일 것입니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옛날 한 승려가 마조도일선사(馬祖道一禪師)에게 ‘어떤 것이 도인가’를 물었을 때 ‘평상심시도’라고 한 데서 유래합니다. 세상 사람은 도라고 하면 특별한 것 또는 보통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기특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도란 바로 범부(凡夫)가 일상 생활하는 그 마음을 여의고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천명한 것이지요. 마음에 번뇌가 없고, 일상생활의 하나하나에 몰두할 수 있는 마음이 바로 도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평상심시도’를 매우 중요시하여 도의 궁극적인 경지와 수행의 과정을 이 평상심에 두고 있습니다.

원불교의 2대 종법사를 역임하신 정산(鼎山) 종사께서도 “어느 곳에 있으나 어느 때를 당하나 항상 일심을 놓지 않는 것이 평상심을 운용하는 원동력이 되나니, 공부하는 이가 평상의 진리를 깨치면 능히 생사고락에서 해탈하는 묘법을 얻을 것이요, 평상의 마음을 운용할 때에는 능히 성현의 실행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일본 야구계에서 불멸의 타자 한 사람을 친다면 한국인 교포 장훈을 드는 데 주저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생애통산 9666타수 3085안타(.319), 504홈런 1676타점 319도루의 불멸의 기록을 남긴 ‘안타제조기’는 1990년 일본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 올랐지요.

그런데 그가 홈런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홈런은 치고 싶다고 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홈런을 쳐야 한다고 생각하면 몸이 굳어져서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치고 싶지 않다고 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 몸이 늘어져서 불가능하다. 홈런을 치고 싶지도 또한 홈런을 치고 싶지도 않은 상태 즉, 중도의 심리상태에서 홈런이 나온다.”라고 야구선수에게 평상심의 중요성을 강조한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평상심은 허공처럼 확 터져있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도(道)란 현존하면서 규정되지 않는 생명입니다. 어느 날 조주(趙州 : 778~897) 선사가 남전보원(南泉普願 : 748-834)선사에게 도가 무엇인지를 묻자 “평상의 마음이 그대로 도”라고 답했습니다. 조주는 다시 “그곳에로 다시 애써 나아갈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그곳에로 나아가려 애쓰는 즉시 도에는 어긋난다.”고 말했지요.

그러자 조주는 “나아가고자 애쓰지 않고 어떻게 도를 알 수가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남전은 “도는 앎에도 속하지 않고, 알지 못함에도 속하지 않는다. 앎은 잘못된 깨달음이요, 알지 못함은 무기(無記)이다. 만약에 참으로 의심이 없는 도에 이른다면 마치 커다란 허공과 같고 확연(廓然)하게 툭 터져있다. 어찌 억지로 시비를 하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조주는 문득 깨달은 것입니다.

도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억지로 다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도란 허공과 같아서 확연하게 확 눈앞이 뚫린 마음(廓然洞豁)입니다.

무엇에 의해서 물들지 않는 채로 고요한 가운데 청정하면서 밝게 깨어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평상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선과 악의 이원론적인 관점에서 벗어난 초월된 마음이고, 세간을 초탈한 본성(本性), 불성(佛性)을 말함입니다. 결코 세속적인 마음이 아니지요.

둘째, 도는 앎의 문제가 아닙니다.

도는 어떤 대상을 인식하여 안다는 논리적이고 언어적인 판단이 아닙니다. 일상의 개념적인 이해는 일종의 지식이지요. 밝게 깨어있음은 언어적인 개념에 의한 사유도, 지적인 앎도 결코 아닌 것입니다.

셋째, 도는 인위적인 노력에 의해서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노력은 애착이거나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게 됩니다. 행위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도란 가는 길 자체로서 작용합니다.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지요. 노력은 필요하지만 인위적인 노력은 오히려 진리에 대한 인식을 방해합니다. 진리는 내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진리가 내게로 닥쳐오는 것이 아닌가요?

넷째, 도란 지금 여기의 현존입니다.

도는 규정되지 않는 생명입니다. 규정하는 순간에 소멸되는 매우 조심스런 ‘처음마음’입니다. 익숙하여진, 숙달된, 정해진 어떤 패턴이나 형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런 형식을 깨뜨림으로서 드러난 날개 짓입니다.

도란 자유이고 해탈입니다. 마음을 지나치게 급히 묶으려 하지 말고 간단없는 마음으로 서서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집심(執心)과 관심(觀心)과 무심(無心)을 번갈아 하되, 처음공부는 집심을 주로 하고, 조금 익숙하면 관심을 주로 합니다. 그리고 좀 더 익숙하면 무심을 주로 하고, 궁극에 가서는 능심(能心)에 이르러야 평상심시도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지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6월 28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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