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경찰·깡패…그리고 기자. 어느덧 한국영화에서 기자는 빈번하게 등장하는 직업군으로 떠올랐다. 보통은 조연인 경우가 많다. 주연이 멋지게 사건을 처리하면 벌 떼처럼 달려들어 요란하게 보도하는 이들이다. 최근에는 기자가 주연인 영화도 제법 눈에 띈다. 거대한 사회악에 맞서 싸우거나 거대권력과 한 통속으로 등장하는 식이다. 때론 기자가 거대권력에 무력한 사회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기억해야 할 한국영화 속 ‘참기자’와 ‘기레기’를 모아봤다.
▲ 이윤택 기자.
‘변호인’ 부산신문 이윤택 기자
1980년대, 송우석 변호사(송강호 분)의 고교동창으로 ‘땡전뉴스’ 앞에서 유독 말이 없는 이윤택 기자(임성민 분)는 데모하는 대학생을 두고 “공부하기 싫어 저 지랄 한다”며 비난하던 송우석 변호사와 돼지국밥집에서 대판 싸운다. “네 말대로 잘난 서울대 나온 쟤들이 왜 저렇게 데모하는지 그 이유는 생각해 봤냐.” 이 기자가 쓰는 시국사건 기사는 번번이 지면에 못 나가고,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연신 담배만 입에 문다. 송 변호사가 국밥집 아들의 시국사건 변호를 맡으며 인권 변호사로 변모한 뒤 계란 투척 봉변을 당하자, 화장실에서 자신의 셔츠를 벗어 친구에게 건넨다.
▲ 이방우 기자.
‘모비딕’ 명인일보 이방우 기자
이방우 기자(황정민 분)는 1994년 발암교 폭발사고가 ‘모비딕’이라 불리는 거대권력에 의해 조작된 사실을 알게 된다. 검찰총장은 모비딕의 지시에 따라 사건을 “북한 대남간첩 테러”로 규정하고, 기자들은 이를 제일 먼저 받아쓰는 걸 특종이라 착각한다. 그는 모비딕의 온갖 방해공작 속에서도 “이런다고 니네 세상이 올 것 같아? 이 세상에 기자가 나 하나뿐이냐!”라며 진실을 쫓아 외롭게 싸운다. 기자로서 무력하다는 후배에게 그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라고 말한다. 이윽고, 기사를 써낸다. 기자 지망생들이 한번쯤 꿈꿔볼만한 낭만적 결말을 보여준다.
▲ 이강희 논설주간(왼쪽).
‘내부자들-디오리지널’ 조국일보 이강희 논설주간
“아무런 팩트 없이 지껄이는 곳, 걔네들이 노는 곳이 바로 SNS 아닙니까?” “어차피 대중은 개·돼지입니다. 적당히 짖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 이강희 논설주간(백윤식 분)은 조국일보의 미래자동차 전면광고를 위해 노동조합을 음해하는 칼럼을 쓰고, 국무총리라는 개인의 목표를 위해 킹메이커를 자처하는 셈법에 능한 인물이다. 정치·자본과 결탁한 이강희 주간은 그들과 나체로 섹스파티를 벌이며 검은 유착관계를 형성한다. 안상구(이병헌 분)에 의해 오른손이 잘려나간 뒤엔 이렇게 말했다. “오른손이요? 까짓것 왼손으로 쓰면 되죠.” 그는 끝까지 이 사회를 조롱한다.
▲ 윤민철PD.
‘제보자’ NBS 윤민철PD
‘PD추적’ 윤민철PD(박해일 분)는 세계 최초 인간배아줄기세포 추출에 성공한 이장환 박사(이경영 분)와 함께 줄기세포 연구를 해온 심민호(유연석 분)팀장으로부터 이 박사의 논문이 조작됐다는 사실과 실험과정에서의 비윤리적 행위를 듣게 된다. “PD님, 진실과 국익 중에 어느 것이 우선인가요.” PD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진실이 우선이죠. 그게 국익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명의 제보자를 만난 뒤 방송을 내보내기까지 감내했던 수많은 어려움, 그리고 그 끝에 모두가 믿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보도해내는 장면에선 전율을 느끼게 한다.
▲ 윤영화 기자.
‘더 테러 라이브’ SNC 윤영화 기자
윤영화 기자(하정우 분)는 한 때 잘나가는 언론인이었으나 부적절한 스캔들 이후 아침라디오로 좌천됐다. 라디오를 진행하던 어느 날 자신을 폭파범이라 밝힌 전화를 장난으로 넘겼지만 이내 마포대교가 폭발하며 ‘특종’을 직감한다. 그는 경찰에 신고하는 대신 테러범과의 단독인터뷰 독점 생중계를 택한다. 윤 기자는 시청률을 가늠하며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말한다. 그에게 참사는 특종 기회에 불과했다. 그러나 SNC 차대은 보도국장(이경영 분)은 윤영화 기자에게 테러범을 더욱 자극하라고 요구하며 윤 기자는 갈등에 휩싸이고, 특종에 대한 욕망은 비극적 결말을 맺는다.
▲ 이장호 기자(가운데).
‘노리개’ 맨땅뉴스 이장호 기자
메이저 방송사에서 해고당한 뒤 인터넷방송 ‘맨땅뉴스’를 운영하는 이장호 기자(마동석 분)는 배우 정지희(민지현 분)씨의 사망을 둘러싼 의혹을 추적하며 연예인의 성상납 스캔들을 들춰낸다. 그 과정에서 언론권력 현성봉 한국신문 회장을 향해 “회장님 성상납 받으셨죠?”라며 돌직구를 날린다. 이장호 기자는 “어떤 식으로든 세상은 변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열혈기자다. 그러나 그의 노력으로도 거대악은 심판받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세상은 변하지만, 그 세상은 이장호 기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간다. 그야말로 맨땅의 해딩이다.
▲ 공수경 기자.
‘소수의견’ OO일보 공수경 기자
공수경 기자(김옥빈 분)는 철거반대 농성을 취재하다 박재호(이경영 분)살인사건에 몰입한다. 박재호 소송을 담당하는 윤진원 변호사(윤계상 분)는 공 기자의 주요 취재원이다. 윤 변호사가 경찰이 박재호의 아들을 살해했다는 주장을 입증할 녹음파일을 극적으로 확보해 들려주자, 공 기자는 기사를 쓰겠다고 뛰쳐나간다. “당신 기사가 박재호씨에게 얼마나 불리할지 모르고 그러는 거야? 특종하나 건지려고 우리랑 여기까지 온 거야?” 공 기자는 말했다. “기잔요… 누군가한테 미안해지기 시작하면 기사 못써요.” 기자가 플레이어인지 기록자인지, 되묻게 하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