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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김덕권 칼럼] 인자무적의 큰 울림..
오피니언

[덕산 김덕권 칼럼] 인자무적의 큰 울림

김덕권 (원불교문인회장) 기자 duksan4037@daum.net 입력 2018/07/31 02:45 수정 2018.08.01 07:48
아무리 난세(亂世))라고 해도 따뜻한 사랑으로 뭉친 조직은 절대로 붕괴되지 않습니다. ‘인’은 어떤 것 보다 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지요.

인자무적의 큰 울림
인자무적(仁者無敵)이라는 말의 뜻은 ‘어진 사람은 널리 사람을 사랑하므로 천하(天下)에 적대할 사람이 없음’을 이르는 말입니다.《맹자(孟子)》<양혜왕장구상편(梁惠王章句上篇)>에 나오는 이 말은 양(梁)나라 혜왕이 맹자에게 혼란한 정국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데서 시작됩니다.

맹자는 양혜왕에게 “인자한 정치를 해서 형벌을 가볍게 하고, 세금을 줄이며, 농사철에는 농사를 짓게 하고, 장정들에게는 효성과 우애와 충성과 신용을 가르쳐 부형과 윗사람을 섬기게 한다면, 몽둥이를 들고서도 진(秦)나라와 초(楚)나라의 견고한 군대를 이길 수 있다”고 대답한데서 인자무적이라는 말이 비롯되었습니다.

사랑을 베푸는 사람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인(仁)은 동양의 지도자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덕목이었습니다. 특히 맹자는 ‘인’을 기반으로 한 사랑의 정치로 무엇보다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추구한 사상가였습니다. 아무리 난세(亂世))라고 해도 따뜻한 사랑으로 뭉친 조직은 절대로 붕괴되지 않습니다. ‘인’은 어떤 것 보다 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지요.

그 ‘인’을 기반으로 사랑의 정치를 펼쳐오던 한 정치인이 지난 7월 23일 아침 가셨습니다. 아마 한국정치사상 노회찬(盧會燦) 의원만큼 큰 울림을 준 정치인도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 큰 울림의 현장이었던 고 노회찬 의원 26일 추모제와 27일 국회에서 거행한 국회장(國會葬)에서 오열(嗚咽)하는 추모객들의 발언을 모아보았습니다,

26일 저녁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대강당에 마련된 추모식장에 미처 들어가지 못한 시민들이 들머리 계단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진보정치의 역사’ ‘서민들의 친구’라고 일컬어졌던 노 의원의 생전 영상이 이어지자, 시민들은 눈물을 닦거나 고개를 떨구면서 영상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사회를 보던 김미화씨도 “영상을 보고 나니 더 그립죠?”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를 옆에서 지켜봤던 이들이 노 의원과의 추억을 되새길 때마다 오열하는 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상임장례위원장을 맡은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추도사에서 “낡고 닳은 구두를 신고 다닌 노회찬 대표님이 생각났다. 어떤 분이 멋지고 세련된 구두를 대표님 영정 앞에 두고 갔다. 대표님이 신으면 정말 잘 어울릴 거 같다”고 했습니다.

추도식장 앞자리에서 연신 눈물을 훔치던 유시민 작가는 노 의원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습니다. “회찬이 형! 늘 형으로 여겼지만, 단 한 번도 형이라고 불러보지는 못했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불러볼게요. 형! 다음 생에는 더 좋은 곳에서 태어나세요. 더 자주 더 멋지게 첼로를 켜고, 더 아름다운 글을 더 많이 쓰고, 김지선님을 또 만나서 더 크고 더 깊은 사랑을 나누세요.”

그의 30년 동지인 심상정 의원은 “여러분들이 많이 사랑하시고, 정말 멋진 정치인인 우리의 지도자 노회찬을 지키지 못해서 정말 죄송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수많은 번뇌의 나날을 지새웠을 우리 대표님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노회찬의원은 생전 인터뷰에서 자녀가 없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고 합니다. “둘 다 늦게 결혼했고, 또 제가 7년간 수배당하다가 교도소 갔다 오니까 첫 아이를 갖기엔 너무 늦은 나이가 됐습니다. 사실 그동안 아이를 갖기 위해 한약도 먹고 용하다는 병원에 다니면서 꽤 노력을 했지만, 지금은 포기했습니다.” 입양도 시도했지만 당시엔 국회의원 신분도 아니었고 수입이 일정치 않아 거절당했다고 하네요.

생활고를 고백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제가 감옥에 있는 동안 집사람이 제 옥바라지를 하면서 살림을 꾸렸습니다. 집사람이 ‘여성의 전화’에서 일을 하면서 ‘다만 얼마라도 좋으니 생활비는 꾸준하게 벌어다 달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매달 30만원을 약속했는데, 결국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생활고 때문에 옷은 아파트 단지 내 재활용품 모아놓은 데서 주워 입었고, 또 TV같은 것은 아예 살 생각도 못했어요. 결국 누가 쓰다 버린 걸 가져다 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시각 노 의원의 지역구인 경남 창원 시청 앞에서도 노 의원을 애도하는 추도식이 열렸습니다. 창원 시민분향소에서 열린 추모문화제에 모인 시민 대표는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프고 울컥울컥해서 무엇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을 하늘은 왜 이렇게 빨리 데려가는지 원망스럽다. 노회찬 의원이 이 세상에 남기고 간 향기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그가 우리 가슴에 새긴 아름다운 모습은 영원히 간직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김유철 시인은「당신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무쇠처럼 단단했고, 모두에게 공손한 사람/ 눈부셨지만 있는 그대로 소박하게 아름다웠던 사람/ 노회찬의 정의는 결코 지지 않으며/ 끝나지 않은 우리들의 길/ 진보의 길,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노회찬 의원 영전에 올리는 조시(弔詩) <진보의 길, 잊지 않겠습니다.>를 낭송했습니다.

27일 고(故) 노회찬 의원 장의위원회 위원장인 문희상 국회의장은 ‘노회찬 의원 국회장 영결식’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이라며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충격이 가시질 않는다.”라고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문 의장은 고인의 삶을 돌아보면서 “당신은 항상 시대를 선구했고, 진보정치의 상징이었다.”며 “정의를 위해서라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만류에도 거대 권력과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추도사를 마쳤습니다.

어떻습니까? 그를 향한 추모의 글을 다 열거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분명 이 시대에 ‘인자무적의 큰 울림’의 정치인이셨습니다. 노회찬 의원은 “정치의 본질은 못가진 자, 없는 자, 슬픈 자, 억압받는 자 편에 늘 서야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노회찬 의원은 인자무적의 정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문상(問喪)도 가보지 못하고 멀리서나마「永天永地 永保長生 萬世滅度 常獨露 去來覺道 無窮花 步步一切 大聖經」성주(聖呪)를 읊어 고 노회찬 의원의 완전한 해탈 천도(薦度)를 축원 드리네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7월 31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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