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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 폭탄 투하 직후의 버섯구름. 단 몇 초만에 14만명..
기획

원자 폭탄 투하 직후의 버섯구름. 단 몇 초만에 14만명이 숨졌다.

김현태 기자 입력 2018/08/15 11:04 수정 2018.08.15 11:07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 상공을 비행하던 에놀라게이 호는 ‘리틀보이’라는 애칭이 붙은 폭탄을 투하한다. 이름답지 않게 너무도 위력적이었던 이 폭탄은 순식간에 히로시마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몇 초 만에 14만 명이 죽었고 35만 명의 사람들은 방사선에 노출되어 서서히 죽어갔다. 피폭자들은 머리카락이 빠지고 상처의 피가 멈추지 않는 이상한 질병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누구도 이 치명적인 질병의 이름을 알지 못한 채 단지 죽어가는 가족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첨단 과학이 피워낸 이 야만적 불꽃은 사흘 뒤 나가사키에 다시 타올랐고 7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트루먼 대통령은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망상에 사로잡혀 화를 자초했다고 비난했지만 이미 전쟁 능력을 상실한 일본에 굳이 원폭을 사용했어야 했는가는 의문이다. 그러나 원폭 투하가 히로히토 천황의 전쟁의지를 확실하게 꺾은 것은 사실이며 그로부터 불과 일주일 후 미국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라는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사흘 만에 20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낳은 재앙을 바라본 한 작곡가는 슬픈 노래로 히로시마를 위로한다.

폴란드의 작곡가 펜데레츠키(Krzysztof Penderecki 1933~ )는 1959년, 현악기의 기괴한 소음으로 이루어진 곡을 발표한다.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Threnody to the victims of Hiroshima)”라는 제목의 이 곡은 선율, 화성, 리듬, 박자와 같은 전통적인 음악적 요소들에 의존하지 않은 실험적 작품이었다.

곡엔 ‘애가’와 어울릴만한 슬픈 가락이나 화성진행이 없다. 대신 현악기의 미분음과 특수주법, 예컨대 음고가 정확하지 않은 최고음을 사용한다든지 혹은 줄받침과 줄걸이 판 사이의 현을 연주한다든지 아니면 활의 끝부분이나 손으로 몸통부분을 두드리는 등의 주법을 이용해 음의 덩어리(Cluster)를 만들어 낸다. 이 작품으로 펜데레츠키는 현대음악을 이끄는 아방가르드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된다. 

▲사진: 포털인용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는 요즘도 종종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의 참상을 표현하며, 사회적·정치적 혼란 속에서 빚어진 전쟁의 엄청난 피해를 고발하는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작곡가 자신은 “이 곡은 절대음악이기 때문에 여전히 음악사적 가치를 가진다”고 했다.

자신의 작품에 정치색을 덧칠하는 사람들을 경계해온 펜데레츠키지만 ‘히로시마’가 갖는 상징적 의미와 함께 ‘희생자를 위한 애가’라는 제목은 음악의 성격을 규정하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가 부정한다 해도 이 곡이 감상자에게 던져주는 청각적 심상은 분명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이글거리는 화염이다.

그러나 시종일관 쏟아져 나오는 기이한 음향의 자극들이 모두 히로시마의 상황을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말기 바란다. 필자가 느끼기엔 음악은 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작곡가가 말할 뿐이며 또한 청중이 상상할 뿐이다.

그의 창작 여정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드라마틱한 요소들을 꾸준히 보여주고 있지만 초기의 실험적이고 표현주의적인 소리를 결합시키려는 음층音層음악의 시도는 이후 전통으로의 회귀가 엿보이는 형식주의를 거쳐 보다 드라마틱하면서도 서정적인 스타일의 신낭만주의까지 이어진다.

50-60년대 실험적 아방가르드 음악이 다음 세대에 트라우마(Trauma)가 되었다고 말하는 그는 동시대 작곡가들에게 영감(inspiration)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간디는 남의 불행을 자신의 행복으로 삼지 말라고 했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의 기초가 되는 경우가 많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절기를 지키면서 자기들의 원수, 즉 홍해에서 빠져 죽은 이집트인들의 비극을 두고 기뻐하지 말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유대인들이 이집트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은 곧잘 우리의 광복절과 비교된다.

홍해를 가른 야훼의 손이 히브리 민족의 출애굽을 도왔듯이 히로시마를 불태운 ‘리틀보이’가 우리의 독립을 돕지는 않았을까? ‘덕분에’라는 표현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기쁨에 넘친 광복의 함성엔 어느 정도 버섯구름의 그을음이 묻어있다. 그러나 광복절에 히로시마를 생각하는 것은 마치 즐거운 크리스마스에 헤롯에 의해 죽은 아이들을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분위기를 깨는 일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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