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 죄인가
얼마 전에 대한항공 총수의 부인과 자녀들이 부리는 사람들을 막무가내로 대하는 것을 보고 분노를 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가난이 죄인가요? 조선일보 8월 11일자에 우리의 눈길을 끄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기사 제목이 ‘탈바꿈하는 뉴욕, 가난이 죄로다,’였지요.
왜냐하면 제 큰딸애가 뉴욕에서 일하고 집은 뉴욕인근 ‘뉴져지 잉글우드 클립스’에 살기 때문에 더 신경이 쓰였나 봅니다. 맨해튼 재벌들은 “B&T 사람들은 안 들어와도 돼”라고 했습니다. B는 다리(bridge), T는 터널(tunnel)을 가리킵니다. 변두리인 뉴저지, 퀸스, 브루클린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맨해튼에 출입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요.
가난이 죄인가요? 흔히들 가난은 본인의 게으름에서 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의 걸림돌이 그들만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되기까지의 환경은 사회 전반적인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덕화만발] 카페나 여러 종교에서 저런 사람은 안 왔으면 하는 마음이 없는지 한 번 반성해 보면 어떨까요?
우리 카페나 종교에서는 교당이나 교회, 사찰 등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중죄인은 없을 것입니다. 원불교의《대종경(大宗經)》<제12 실시품 7장>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소태산(少太山) 부처님께서 영산(靈山)에 계실 때에 창부(娼婦) 몇 사람이 입교하여 내왕하는지라 좌우 사람들이 꺼리어 말씀을 올립니다.
「이 청정한 법석(法席)에 저러한 사람들이 내왕하오면 외인의 치소가 있을 뿐 아니라, 반드시 발전에 장애가 될 것이오니, 미리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을까 하나이다.」소태산 부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웃으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대들은 어찌 그리 녹록한 말을 하는가. 대개 불법의 대의는 항상 대자대비의 정신으로 일체 중생을 두루 제도하는 데에 있거니, 어찌 그들만은 그 범위에서 제외하리요. 제도의 문은 도리어 그러한 죄고 중생을 위하여 열리었나니, 그러한 중생일수록 더 반가이 맞아 들여, 그 악을 느껴 스스로 깨치게 하고, 그 업을 부끄러워 스스로 놓게 하는 것이 교화의 본분이라, 어찌 다른 사람의 치소를 꺼리어 우리의 본분을 저버리겠는가.
또는 세상에는 사람의 고하가 있고 직업의 귀천이 있으나, 불성(佛性)에는 차별이 없나니, 이 원리를 알지 못하고 다만 그러한 사람이 내왕한다 하여 함께 배우기를 꺼려한다면, 도리어 그 사람이 제도하기 어려운 사람이니라.」하셨습니다.
어떻습니까? 뉴욕 뿐 아니라 미국 전체는 가장 대표적인 자본주의 국가입니다. 미국에서 이미 인종 차별은 없어 졌는지 모르지만 자본 차별은 더욱 심해졌다고 합니다. 흑인이라고 출입을 금지한 식당은 없지만 가난하기 때문에 먹지 못 하는 식사는 많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이 “가난이 최로다.”인 것입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가난은 죄가 아닙니다. 다만 불편할 뿐입니다. 원불교의 기본 이념은 평등주의, 세계주의, 전 생령주의입니다. 그 까닭은 불성에는 차별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덕화만발] 카페나 종교에서는 어떤 중죄인이나 가난한 사람이라도 문턱을 넘을 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소태산 부처님께서는 창부들의 출입을 금할 것을 제의한 좌우 사람들에게 그들이 도리어 제도(濟度)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일침을 놓고 계십니다. 창부를 통한 이러한 가르침은 모든 종교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종교가 추구하는 것이 평등주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창부는 인생에서 가장 밑바닥이기 때문에 종교에서 창부들을 일반인과 동일 선상에 놓는 것은 바로 평등주의를 입증하는 증거인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는 창부 출신입니다. 하지만, 예수가 그녀에게서 일곱 귀신을 쫓아준 뒤에 헌신적인 신도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예수가 처형될 때 그 곁에 있었고, 예수의 시신이 매장되는 것도 지켜보았습니다. 천사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알린 것도 그녀입니다. 또한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한 예수를 처음 만난 사람입니다(마태복음 28:1~8).
성경에는 기록이 없지만 마리아는 요한복음 8:3~12에 나오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고 하여 구해 준 사마리아의 간음한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라는 라는 설이 있습니다.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최고경전으로 치는《화엄경(華嚴經)》은 선재동자(善財童子)의 구도기(求道記)입니다.
선재동자는 보리심(菩提心)을 일으켜 보살의 행을 실현하기 위하여 53인의 스승을 찾아다닙니다. 구도 중 어느 때는 불법(佛法)과는 상관없는 바라문, 노예, 장사꾼, 뱃사공, 소녀와 창부, 신(神)들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화엄경》의 진리는 창부뿐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불성이 갊아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유독 부자들만 인종을 차별하고 빈부를 차별하며 사는 곳을 차별하는지요? ‘목민심서’에는 권력자들이나 부자들이 아랫사람을 어떻게 대해주어야만 나라다운 나라가 되고 기업다운 기업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많은 담론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윗사람들은 흔히 형벌과 무서운 매질로써 아랫사람을 단속하는 근본으로 삼는다. 그러나 청렴하지도 못하고 지혜롭지도 못하면서 사나움을 위주로 한다면 그 폐단은 난(亂)에 이를 것이다”(束吏)라고 말합니다. 공자는 아랫사람들을 거느리면서 “관대해야만 아랫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寬則得衆)”라고 말했습니다.
권력만이 최고이고, 재산만이 가장 값이 좋은 것이라고 여겨, 권력에 도취되어 아랫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려먹는 독재자들, 재산의 위력에 정신을 잃고 아랫사람들을 하인이나 종들처럼 부려먹고, 그의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짐승처럼 대하는 예의나 염치를 상실해버린 사람들 때문에 우리 백성들은 고달프게만 살아왔습니다.
권력자이면서 관대하고, 부자이면서 예의와 염치를 지켜준다면 세상이 얼마나 밝아질까요? 가난은 결코 죄가 아닙니다.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고, 부자이지만 교만하지 않으며, 가난하면서도 즐겁게 살고, 부자이면서도 예의를 좋아하는 그런 세상은 언제나 올 까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8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