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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김덕권칼럼] 예술과 죽음의 인문학(1)..
오피니언

[덕산 김덕권칼럼] 예술과 죽음의 인문학(1)

김덕권 (원불교문인회장) 기자 duksan4037@daum.net 입력 2018/08/21 08:07 수정 2018.08.22 09:41

예술과 죽음의 인문학(1)
이언 김동수 시인은 백제예술대학의 교수를 역임하시고 지금은 <미당문학회장>직을 수행하고 계신 대표적인 이 시대의 문호(文豪)이십니다. 제가 오래 전 <원불교문인협회장>을 역임하고 있을 때 이언 선생님을 초청하여 귀한 강연회를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부터 10년 전 [덕화만발] 카페를 창설할 때부터 우리 카페의 <이언 김동수 교수시문학> 방에 한 결 같이 좋은 글을 올려주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예술과 죽음의 인문학>이라는 글을 올려주셨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죽음’에 대한 수행을 해 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언 교수님의 글 <예술과 죽음의 인문학>이 저의 이 공부에 큰 공감을 불러 일으켜 2회에 걸쳐 널리 전 세계에 전합니다.

예술과 죽음의 인문학

 -김동수(시인)-

【1. 인생과 예술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이 말은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가 한 말이다. 이때의 예술(art)은 ‘뛰어난 기술, 곧 의술(醫)을 의미하였는데, 이 말이 ‘아름답고’ ‘진실한’ 오늘날 ‘예술’의 의미로까지 확대되어 쓰이고 있다. 원문이 Life is short, art is long, opportunity fleeting(인간의 수명은 짧고, 의술은 긴데, 기회는 급히 지나간다)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의술’이나 오는 날 ‘예술’이나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우리의 ‘삶을 치유’해 주고 있다는 데 있다. 의술이 인간의 몸을 치유하는 것이라면, 예술 또한 인간의 마음을 치유(therapy)해 주고 있기에 예술은 인생보다 항시 고상한 데를 지향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예술가를 일컬어 신(神)의 뜻을 지닌 무당이라고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생(生)의 의미와 이후 죽음의 문제를 예술과 관련시켜 생각해 본다는 것은 우리의 남은여생(餘生)을 보다 아름답고 경건한 시간들로 채워가는 데 유익한 시간이 되리라고 본다.

2. 인생의 끝

인생의 끝은 어디일까? 죽음일까? 아님 그 너머에 또 무슨 세계가 있는 것일까?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고 자탄한 버나드쇼의 묘비명처럼, ‘내 인생도 어느 날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고 마는 게 아닐까?’하고 생각하는 날이 있었다. ‘죽음’은 우리 인생의 가장 큰 화두다. 한 번 돌아가면 영영 돌아오지 않기에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남긴 이야기는 그래서 언제나 비범한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슬픈 눈으로 하늘을/ 쳐다봐도 알 수 있는 건/ 언제나 無 ..../ 우리가 살아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 또한 알 수 없는 것인가/ 아! 아! 존재 한다는 건/ 다른 삶을 예고하는 현실인가/ 뜻 없이 불어대는 새벽바람의/ 흔들림인가」  - 박순이, 「인생의 끝은 어디인가」에서

우리의 생(生)은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그 끝은 어디일까? 시작도 알 수 없고, 끝 또한 알 수 없으니 ‘하늘을/ 쳐다봐도 알 수 있는 건/ 언제나 無’ 아님 또 ‘다른 삶인가?’하고, 언제 닥쳐올지 모를 죽음 앞에서 불안의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3. 작품 속에 나타난 죽음의 세계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죽음을, 그림자(육체적, 色)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데아(영적, 空)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과의례로 보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그렇게 의연하게 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죽음에 대해선 크게 두 관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영혼 불멸설, 곧 육체는 사라져도 그 영혼은 살아 이어져 간다는 연기론(緣起論)적 관점과, 영혼필멸론, 곧 육체와 영혼이 죽음과 동시에 사라지고 만다는 유물론적 사고가 있는데, 이들은 주로 무신론자들로서 자칫 쾌락적 극단주의에 빠질 염려가 있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제까지 문학작품에서 드러난 대부분 죽음의 양상들은 영혼불멸설로 이어져 있다. 이를 요약하면 ‘죽음이란’

ㅇ. 육체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영혼의 여행

ㅇ. 고치에서 벗어나 나비로 다시 태어나는 탈태(奪胎)의 과정

ㅇ. 한 바탕의 꿈에서 깨어나 본향에 든 영원한 안식

ㅇ. 소풍 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귀천(歸天) -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1)『티벳 死者의 서』 -파드마 삼바바

티벳『사자의 書』는 불교 경전의 하나로 약 1200년 전 티벳의 파드마 삼바바가 임종 직후부터 환생에 이르기까지 49일 기간 동안, 사자(死者)에게 깨달음을 얻게 하여 ‘니르바나’의 서방 정토로 안내하는 임사체험의 내용이다.

저자는 그 49일을 ‘바르도(bardo)’라고 하고, 이 바르도를 죽음과 윤회 사이의 중간 단계라 보면서, 대부분 일반인은 죽음 이후 그들이 쌓아온 카르마[業]를 마음에 지니고서 그대로 다음 세상으로 간다고 한다. 이것이 환생의 굴레요 윤회인데, 욕망을 가진 자는 환생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2)『신곡神曲』 - 단테

『신곡』(1321년)은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 3부로 14년에 걸쳐 사후(死後死後)의 세계를 14,233행에 담아 노래한 대서사시이다. 인간을 상징하고 있는 단테가 이성(理性)의 상징인 베르길리우스와 하느님의 사랑을 상징하는 베아트리체의 안내를 받으며 지옥, 연옥, 천국을 순례하여 마침내 자기 구원 천국에 오른다는 내용이다.

현세에서 행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유혹과 본능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어야 하며, 영원의 행복을 얻는 길은 신의 은총에 힘입으면서 이승에서 경건하고 금욕적인 삶을 살아야 그것이 저승에까지 이어져 천국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사람이 행할 바 도(道)가 많이 있으나 그것을 요약하여 보면 ‘생과 사의 도’에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 때에 생의 도를 알지 못하면 능히 생의 가치를 발하지 못할 것이요, 죽을 때에 사의 도를 알지 못하면 능히 악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 아닌 가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8월 21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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