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죽음의 인문학(2)
어제에 이어 이언 김동수 시인의 <예술과 죽음의 인문학>을 보내드립니다.
【3)『천로역정』 -존 번연(1628-1688년)
이 책은 크리스천이 순례의 길을 떠나 천국에 들어가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성경 다음으로 많아 알려 진 기독교문학의 대표작이다. ‘죽음은 감옥에서 나와 궁궐로 들어가는 통로일 뿐, 폭풍의 바다에서 헤어 나와 안식의 항구로 들어가는 것’이니, 죽음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門)이라 했다.
4)『만복사 저포기』 -김시습
세조 때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인『금오신화』에 실린 소설이다. 남원 지방의 만복사를 배경으로 이승의 양생(梁生)과 저승의 여인과의 결합을 다룬 ‘시애소설(屍愛小說)’로 여기에서도 죽은 여인이 남자로 다시 환생하는 윤회사상이 담겨 있다.
4.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
이와 같이 대부분 문학 작품 속에서의 죽음은, 삶과 죽음을 단절로 보지 않고 하나의 연속성으로 보는 불교의 ‘윤회설(輪廻說)’과, 기독교의 ‘부활’과도 다르지 않는 연기론적 세계관을 보이고 있다. 그러기에 이승에서 착하게 살아야 죽어서 천당과 극락의 의 문(門)에 들어 갈 수 있다고 하니, ‘웰빙(well-being)이 곧 웰다잉(well-dying)’이라는 논리이다.
‘오늘 내가 점심을 대접하면 이것이 내게 아름다운 소문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 선행이 비록 형체가 없어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그게 다른 에너지로 변화하여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죽음은 궁극적으로 소멸이 아니라 그 결과에 따라 윤회(輪廻)를 거듭하고 있다는 결론이다. 만해도「임의 침묵」에서 ‘이별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만남의 시작’이라고 했듯이, 그러기에 죽음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며, ‘절망’이 아니고 ‘희망’인 셈이다.
세상의 모든 끝은 이처럼 새로운 시작을 가지고 온다. 춘하추동의 순환도 이러한 자연의 이법에 따라 봄의 씨앗이 가을에 열매가 되고, 그 열매가 떨어져 이듬 해 그 자리에서 다른 생(生)이 다시 부활한다. 이러한 연기와 윤회로 우주만상이 생멸을 거듭하고 있으니 삶과 죽음, 죽음과 삶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 그러기에 ‘태어나서 죽어가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순환적 과정’을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사생병로(死生病老)의 역순환’으로 ‘죽음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한 이가 있다.
“겨울을 일 년의 시작으로 볼 수도 있고, 겨울을 일 년의 마지막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겨울을 일 년의 시작으로 보는 농부는 겨울 내 객토도 하고 농사준비 기간으로 보내지만, 게으른 농부는 겨울 내내 움추리거나 사랑방에서 노름이나 합니다. 그러나 일 년 후 추수에서 두 농부의 차이는 엄청날 것입니다.” - 김덕권,「죽음보따리」에서
태어나서 죽어가는 허무적 생사관(生死觀)이 아니라,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생성적 사생관(死生觀)이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죽)어야 새로운 생명이 소생하듯, 잘 죽어야 다시 잘 태어날 수 있으니, 죽음은 새로운 탄생의 밑거름이 된다. 태어나 사라지는 ‘생사(生死)’의 세계가 아니라,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우주적 ‘사생(死生)’의 자연관으로 ‘내세에 대한 기쁨과 소망‘으로 남은 생(生)을 살아갈 때, 비로소 보다 경건하고 자유로운 노년의 축복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삶의 완성을 죽음’으로 보는 이들이 늘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나는 죽음에 대한 매혹을 느낀다. 사는 데까지 열심히 살고, 죽음으로 걸어가는 나를 스스로 예우하며 죽고 싶다. 그동안 땀 흘리고 씻고, 음악 듣고, 아무 것도 없는 식당에서 이렇게 떠드는 즐거움을 만끽하리라. 죽음이 ’끝‘이 아니고, ‘허무’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의 열정이라’고
5.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죽어도 죽지 않은 영생의 삶이 될까? 티베트의 배리커진 스님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업에 따라 다시 돌아오기에 현세에서 선행을 많이 베풀어야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기에 진정 두려워야 할 것은 ‘내일의 죽음’이 아니라 ‘오늘의 이 순간을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하다는 것이다.
‘인생은 그 날의 풀과 같고,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이’(시편),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으니’(야고보서) 죽지 않은 생명은 없다.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죽어간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이어져 가는 이 사생(死生)의 윤회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고귀한 존재로 거듭날 것인지 오늘 나의 삶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볼 일이다.
『사자의 서』에 나온 기도문
-파드마 삼바바-
「지금은 죽음의 순간의 바르도가/ 나에게 밝아오는 때/ 모든 집착과 갈망을 버리고/ 정신을 흩뜨리지 않고/ 가르침의 선명한 자각 안으로 들어가/ 이 살과 피로 이루어진 몸을 떠날 때/ 나는 그것이 덧없는 환상임을 알리라./ 모든 두려움과 공포를 버리고/ 무엇이 나타나든/ 그것은/ 나의 투영임을 알아차리며/ 그것이 바르도의 환영임을 알리라.」
『나이를 먹는다는 것』 -김동수-
「햇살에 스며드는 일이다/ 가을 날 물들어 가는/ 감나무 잎처럼/ 뜨겁고 어두웠던 마음들/ 널어 말리며/ 이제 온 힘 다해 살지 않기로 한다./ 싹이 돋고 잎이 자라/ 낙엽이 지는 사이/ 자박 자박 누군가 오고/ 또 누군가 가버린/ 이 이역의 순례에서/ 그대와 나의 발자국/ 하나로 포개보는 일이다./ 다시 한 번 천천히 햇살에/ 말리는 일이다./ 나를 꺼내 말리는 일이다.」】
어떻습니까? 이언 김동수 시인의 <예술과 죽음의 인문학>을 2회에 걸쳐 보내드렸습니다. 이제 죽음의 실상이 어느 정도 손에 잡히시는가요? 나이 40이 지나면 죽음의 보따리를 챙기라 하셨습니다. 그렁저렁 살다가는 ‘내 그럴 줄 알았어!’ 하고 뉘우칠 날이 있을 것입니다. ‘바쁘다 바빠! 어서 죽음의 준비를 시작해야 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 아닐 런지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8월 22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