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통신넷= 김현태기자] 지난 17일 요절시인 윤동주와 그의 사촌 송몽규의 아픈 삶을 그린 ‘동주’가, 24일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아픔을 담은 ‘귀향’이 각각 개봉했다. 익숙한 소재이고 알 만한 이야기를 다룬다고는 하나 정작 일제강점기에 스러진 시인과 소녀들에 대한 영화는 그리 많지 않다. 1990년대 중반 변영주 감독이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 시리즈로 위안부 피해를 고발했고, 이를 소재로 한 저예산영화들이 드물게 나왔으나 대중성과 거리를 두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중 한 명인 윤동주도 마찬가지였다. 이준익 감독은 “해방 70년이 넘었어도 어찌 된 게 윤동주에 대한 TV단막극 하나 없다”고 통탄했다. 조정래 감독은 제작비를 어렵게 마련해 13년 만에 ‘귀향’을 완성했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영화라도 냉혹한 시장의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돈이 되지 않으면 만들어지지 않고 재미가 없으면 대중들이 선택하지 않는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들이 미국과 유럽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걸 보면 돈과 재미만을 탓할 수는 없을 듯하다. 2,200만달러라는 비교적 적은 돈이 들어간 ‘쉰들러 리스트’는 전세계 극장에서 제작비의 10배가 넘는 3억2,13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동주’가 23일까지 32만2,3576명을 모으며 손익분기점을 넘어섰고, ‘귀향’은 24일 오후 기준 예매율 28.4%(영화진흥위원회 집계)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두 영화의 선전이 반갑지만 씁쓸하기도 하다. 충무로에 팽배한 배금주의를 되돌아 봐야 할 때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영화 <귀향>(감독 조정래)이 개봉일인 24일 관객 16만명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국민 7만5270명이 제작비를 모아 만든 작은 영화가 <검사외전>은 물론 할리우드 대작 <데드풀>과 <주토피아> 등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것이다.
<귀향> 배급사인 와우픽쳐스는 이날 밤 “개봉 당일 <귀향> 관객이 16만을 넘었다”며 “예매율 또한 나흘 동안 1위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작은 영화인 <귀향>의 첫날 기록은 천만 영화인 <광해, 왕이 된 남자>(16만9516명)에 버금간다. <귀향>은 제작에 착수한 지 14년 만에 배우·제작진의 재능기부에다 제작비 25억원 중 12억원을 크라우드펀딩으로 모금해 완성될 수 있었다. 또 멀티플렉스 극장들의 외면으로 상영관을 잡지 못해 애를 태웠으나, <귀향> 상영관을 확대해달라는 온라인 청원이 이어지면서 이날 전국 333개 극장, 800개가 넘는 스크린에서 개봉하게 됐다.
<귀향>은 일본군에게 끌려가 가족의 품을 떠나야 했던 열네 살 정민(강하나)과 소녀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나눔의 집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조정래 감독이 강일출 할머니의 그림 ‘태워지는 처녀들’을 본 뒤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만든 작품이다. 영화가 상영되기 전부터 중국, 일본, 미국 등을 돌며 후원자들을 위한 사전 시사회를 연 조정래 감독은 “수십만의 여성들이 끌려가 살아 돌아온 사람은 200명뿐이었다. <귀향>이 한 번 상영되면 한 분의 영혼이 집에 돌아온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나라를 되찾은 지 7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할머니들의 넋을 그렇게 내팽개쳐 두면 안 되잖아요. 타국 하늘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을 영혼이라도 고향에 모셔 와야죠…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기획에서 개봉까지 무려 14년이 걸려 화제를 낳은 조정래 감독의 새 영화 ‘귀향’에서 일제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영옥’을 열연한 배우 손숙(73)은 “씻김굿이나 진혼제 같은 영화”라고 소개한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그토록 울어보기는 처음이었어요. 조 감독에게 ‘눈물이 줄줄 흐른다’고 문자를 보냈더니 곧바로 연락이 와 만나게 됐죠.”
그는 이번 영화에 출연료를 받지 않고 재능기부 형식으로 출연했다.
“과연 끝까지 촬영할 수 있을까…. 마음만으로는 안 되는 거잖아요. 일단 돈이 있어야 제작할 수 있는건데. 다 만들어 놓고서도 개봉 못하는 영화들이 종종 있으니 반신반의 할 수밖에 없었죠. 찍다 보면 ‘제작비가 떨어졌다’고 하고, 며칠 지나면 또 ‘돈이 들어왔다’면서 찍은 거예요. 그처럼 힘들게 작업했는데, 신기하게도 힘들 때마다 조금씩 하나씩 풀리더라고요. 어려운 형편이 알려진 다음 유명 스태프들도 돈을 받지 않고 일하겠다며 가세했어요.”
조 감독이 ‘나눔의 집’(생존 위안부 할머니 후원시설)을 처음 방문한 것은 2002년 봉사활동 때다. 강일출 할머니의 심리치료 그림 ‘태워지는 처녀들’을 보고 충격을 받은 조 감독은 곧장 시나리오를 완성하지만 투자 유치에 실패하고, 대신 전 국민을 대상으로 후원을 받는 ‘크라우드 펀딩’을 시도한다. 여기에 7만5270명(1월19일 기준)이 십시일반 참여해 긴 세월 동안 12억원의 제작비가 모인 것이다. 일본과 미국에서도 후원의 손길이 이어졌다. 영화는 10분이나 되는 엔딩 크레디트에 후원자 명단을 모두 올리며 피날레를 장식한다. 할머니들이 직접 그린 ‘14세 소녀 끌려가는 날’ ‘빼앗긴 순정’ 등의 그림들도 함께 소개해 그 의미를 더한다.
“대신 저는 런닝개런티를 요구했어요. 수익이 나면 ‘나눔의 집’에 기부하려고요. 힘들게 촬영했지만 참여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입니다. 해방이 늦어졌더라면 나도 끌려갔었을 거라 생각하니, 남의 일이 아니더라고요. 젊은 사람들이 많이 보고 ‘저런 일이 정말 있었구나’ 깨달아야 해요.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아야죠. 어떤 명분으로든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상영관을 늘려 모두에게 보여주어야 하고,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보아야 할 영화입니다.”
함께 출연한 후배 연기자들과 스태프들에 대한 칭찬도 잊지 않는다.
“현장에 가보면 힘든 여건에도 불구하고 스태프들이 똘똘 뭉쳐 일하는 거예요. 어린 배우들은 지난 1년 반 동안 조 감독과 함께 다니다보니, 어느 샌가 영화 속 그 인물이 되어 있었고…. 얼굴이 안 알려진 연기자들을 캐스팅한 게 오히려 관객의 몰입을 유도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익숙한 얼굴이 주는 선입견이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