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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를 찍은 사람들에게, 버려진 사람들..
정치

박근혜를 찍은 사람들에게, 버려진 사람들

[시사] 김현태 기자 입력 2016/02/25 13:48
박근혜가 버린 사람들, 박근혜를 버린 사람들 문창극 “불러 주신 분도, 거둬드릴 분도 박근혜 대통령” 인사 발표 뒤 의혹일면 '나몰라라'…스스로 신뢰 깎아

문창극 전 국무총리 후보자가 지난 청문회중 자리에서 물러났다.
형식은 자진사퇴였으나 ‘나홀로’ 내린 결단은 아니었다.

청와대는 “(문 후보 측이) 기자회견을 하는 사실을 10시 전에 통보해왔다”고 말했다.
표현은 통보지만 실상은 교감, 나아가 적극적 권유가 있었을 가능성도 크다.

◆ “삼고초려 끝에 모셨다더니…” 의혹 나오면 수수방관 

 

박근혜 대통령의 ‘내치는’ 인사는 인수위 시절에도 있었다.
박근혜정부 출범 과정에서 최대석 이화여대 교수는 돌연 인수위원직을 그만뒀다.
최 전 인수위원은 박근혜 대통령의 주요 대북정책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구상한 인사로 새 정부 초대 통일부 장관으로 거론돼 왔다.

그의 사퇴를 둘러싸고 대북 비밀접촉 행위 및 국가정보원의 암투설 등 뒷말이 무성했지만 당시 인수위는 “일신상의 이유로 자진사퇴했다”고 밝힌 게 전부였다.

박근혜 대통령 스스로 삼고초려했다고 밝힌 인물도 끝내 지키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초대 미래창조과학부의 수장으로 김종훈 전 알카텔 루슨트 벨연구소 사장을 내정했으나 이중국정 논란에 밀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당시 박 대통령은 “미래 성장동력과 창조 경제를 위해 삼고초려 해 온 분인데 우리 정치의 현실에 좌절을 느끼고 사의를 표해 정말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했을 뿐이다.

김병관 초대 국방장관 후보자의 자진사퇴도 대표적인 인사 실패 케이스다.
인수위 시절부터 손발을 맞춰온 김 전 후보자는 “사퇴는 없다”는 뜻을 거듭 밝혔지만 악화된 여론에 결국 물러서야 했다.

지명 초기단계부터 증여세 누락, 육군 대장 출신으로 무기중개업체에 비상임 고문으로 일한 점 등이 논란이 됐으나 사퇴까지는 한 달 이상 걸렸다. 40여일 간 야권의 십자포화를 받아내며 버텼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결단은 더뎠고 무참했다.  

이밖에도 황철주 전 중소기업청장 내정자,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내정자, 한만수 전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가 검증 과정에서 중도 낙마했다.

 


◆ 진영 복지부 전 장관, 朴 대통령에 자진사퇴 선언

 

반면에 박근혜 대통령의 인사권에서 스스로 박차고 나온 사람들도 있다. 
초대 보건복지부 장관이던 진영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해 9월 전자행정시스템을 통해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이내 곧 ‘보건복지부 장관을 사임하며’라는 제목의 이메일을 직원들에게 띄웠다.

청와대에선 진 전 장관이 청와대와 상의 없이 사퇴 의사를 밝힌 데 대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박 대통령은 사표를 반려했지만 진 전 장관의 뜻을 꺾진 못했다.

정부가 대선공약이었던 기초연금을 계획보다 축소하기로 하자 진 전 장관은 이에 반발 “양심의 문제”라면서 자리를 박찼다.

진 전 장관은 박근혜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박근혜정부 주요 정책의 골간을 짠 주역이다.
그런 그가 박 대통령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른 것을 두고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 논란이 뒤따랐다. 측근인 장, 차관 및 청와대 수석 등과 소통이 부족하고 관리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 정치적 결별? 김종인서청원도 곁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명박정부 내내 차기 대권주자 1위였다. 문재인, 안철수 의원이 급부상 할 때도 이 자리는 내주지 않았다. 손에 잡히는 미래권력에는 인재가 몰렸고 새로운 정부를 꾸릴 시간도 충분했다.

대선을 1년 여 앞두고 당을 진두지휘하던 비대위원장 시절, 박근혜 대통령은 비대위원에 김종인 전 의원을 앉혔다. 비대위의 좌장 역할을 맡기고 당 쇄신과 정책 구상에 함께 힘을 쏟았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때 박근혜 캠프의 상임고문은 서청원 의원이었다. 이듬해 18대 총선 직전 친이계에 밀려 친박계 인사들이 이른바 공천학살을 당할 때도 친박연대를 결성해 박 대통령의 든든한 지지목이 돼 줬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의 곁에는 한 때는 정치적 동지였던 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김종인 전 의원은 대선을 목전에 두고 박근혜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며 스스로 멀어졌다.
새누리당 당 대표에 도전하는 서청원 의원은 당내에서 문창극 전 국무총리 후보자의 비토론을 가장 강력하게 내세웠다.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의 이 한마디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친박에서 ‘짤박’(잘린 친박) 처지가 된 다른 의원을 도우려다 맞은 레이저였다. 기분 좋아 보이던 박 대통령 뒤를 따라가며 ‘그 의원이 정말로 대통령님의 국정성공을 위해 사심 없이 노력하고 있다’고 용기를 내어 진언을 올렸지만, 잠시 뜸 들이다 돌아온 말은 특유의 짧고 단조로운 답변이었다. 가슴이 서늘해진 의원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박 대통령과 가깝다는 이들조차 “그럴 때는 정말 무섭다”고 말할 정도다. 몸은 자기도 모르게 부동자세로 굳어버린다고 한다. 자신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른 사람에게서 한 번 거둔 마음은 절대 다시 주지 않는 인간 박근혜의 ‘공포형 통치술’의 일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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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도 애국을 알아? ‘애국 힙스터’ 박근혜의 용인술

‘복박(친박 복귀) 윤허’를 구하는 장면도 사라진 지 오래다. 집권 첫 해부터 굳어진 박 대통령의 ‘나 홀로’, ‘불통’ 이미지는 더욱 심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요즘은 ‘당신들도 애국을 알아요?’라는 식의 ‘애국 힙스터’ 통치를 밀어붙인다. (힙스터란 비주류 하위문화에 대한 자신만의 애정과 감식안을 과시하며 그를 통해 남들로부터 자신을 구별 짓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통치 취향을 존중해주는 이들은 측근으로 남기고, ‘생각과 방식은 달라도 다들 나라 걱정한다’며 나서는 이들은 가차없이 내쳐지거나 거리를 둔다. 지난 3년 내내 [한국갤럽] 주간 여론조사에서 소통 미흡, 독선, 독단, 자기중심이 박 대통령 부정평가의 주된 이유로 꼽혔지만 고쳐지지 않는다.

20대 총선 공천을 앞두고 새누리당 친박-비박 간 싸움이 한창 시끄럽다. 주포 역할을 하는 친박근혜계 핵심은 10명 안쪽이다. 범친박계까지 박박 긁어모으면 50여명이다. 비박계 한 인사는 “10명도 무의미하다. 결국 최경환 의원 ‘원톱’”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정치적 중량감이 상당했던 친박 인사들은 꽤 있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박 대통령의 독선을 거스르는 생각을 내비쳤다가 내쳐졌다. “대통령 되기 전의 그가 아니다”며 스스로 떠난 이들도 있다. 계파가 복잡하고 분당과 합당이 반복되는 야당과 달리, 2007년 경선 캠프와 2012년 대선 캠프에서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전력을 다했던 핵심 인사들까지 등을 돌리는 상황은 분명 문제가 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자신을 돌아보는 대신, 자신이 내쳤거나 곁을 떠난 이들을 싸잡아 ‘배신’이라는 비정치적 용어로 단칼에 정리했다. 빈 자리는 황교안 국무총리처럼 ‘복사기’ 수준의 추종자들로 채워졌다. ‘진실 혹은 배신’은 21세기 대한민국 정부 문서에 등장하는 ‘공식 정치용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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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와 너무 다른 유승민…“그의 힘이 커지는 게 불안했을 것”

2005년 당 대표 비서실장, 2007년 대선 경선대책위원회 정책메시지총괄단장으로 박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원박’(원조 친박) 유승민 의원은, 본인의 뜻과 상관없이 이 정권 ‘배신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자기 정치’를 너무 앞세웠다는 당내 일부 평가도 있지만, 유 의원은 이미 대선 전부터 박 대통령의 역린이었다. 당시 친박계의 폐쇄성을 공공연히 비판하던 그는, 19대 총선을 앞두고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현기환 전 의원(현 청와대 정무수석)을 공천심사위원에 발탁하자 ‘불가론’을 읍소하며 박 대통령의 의중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자발적 탈박’의 길을 걷던 그는, 지난해 비박계 지원으로 원내대표에 당선되면서 박 대통령의 말 못할 ‘우환’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증세와 복지를 주장하며 박 대통령이 일찌감치 폐허로 만든 길을 다시 가겠다고 선언했다.

유 의원은 청와대의 공무원연금 개혁안 처리를 위해 야당이 요구한 국회법 개정안을 수용한다. ‘공무원연금 개혁’은 현재 박 대통령이 내세우는 몇 안 되는 업적 중 하나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의원 시절 자신도 유사한 법안발의에 이름을 올렸던 국회법 개정안이 ‘위헌’이라며 거부권을 행사하고는, 헌법상의 국정 최고 의결기구인 국무회의 자리를 빌려 사실상의 ‘유승민 방벌’을 지시한다. “배신의 정치”라는 서슬 퍼런 한마디로 여당 의원들이 투표로 선출한 유 의원을 원내대표 자리에서 찍어냈다.

‘조화 뒤끝’ 역시 박 대통령의 용인술이 얼마나 ‘협량’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 대표 시절부터 ‘박근혜’ 이름 석 자가 들어간 화환이나 조화는 ‘문고리 3인방’ 중 하나라는 안봉근 현 청와대 국정홍보비서관을 거쳐 ‘이름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지난해 11월 유 의원의 부친인 유수호 전 의원의 빈소에는 끝내 ‘박근혜 조화’가 도착하지 않았다.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박 대통령은 유 의원이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생각했고, 이어서 불안해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유 의원의 힘이 더 커지는 게 두려웠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아버지의 통치술을 보고배우며 2인자를 절대 두지 않는 박 대통령으로서는, ‘보수혁신’을 내세우며 퇴임 이후 자신의 정치적 지역기반인 대구에서 공공연히 반기를 들어올릴 유 의원을 그냥 두고 볼 리 없었다는 설명이다. 반면 친박계 핵심 인사는 “유승민은 원내대표가 된 뒤 너무 앞서 나갔다. 티케이(TK)에서도 결국 박정희에서 박근혜로 이어지는 큰 흐름에 던져진 작은 돌멩이에 불과할 것”이라고 했다. 박 대통령의 판단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구 동을에서 3선 관록을 쌓은 유 의원은, 진박 공세와 공천룰 변경 논란 속에 당내 공천 여부조차 마음 놓을 수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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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성, ‘한 번 찍히고’ 회복이 안 돼

친이명박계와 친박계가 내전 수준의 혈투를 벌이던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박근혜 캠프에 투신한 현역 의원은 32명이었다. 올해 20대 총선과 2017년 19대 대선을 앞두고 비박계를 대표해 친박계와 일전을 벌이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원조 친박’이었다. 2005년 박근혜 당 대표 시절 사무총장, 2007년 대선 경선 캠프에서 조직총괄본부장을 맡으며 박 대통령 곁을 지켰던 ‘정예 원박’이었다. 이 때문에 2008년 18대 총선에서 친이계의 보복 공천 칼날을 피하지 못한 김 대표는 ‘친박무소속연대’로 출마해 어렵게 배지를 달아야 했다.

눈물겨운 두 사람의 정치적 관계는 그러나,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 2년차인 2009년 자신의 만류에도 김 대표가 한나라당 원내대표 선거에 출마하자 박 대통령의 ‘불신’이 싹트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2010년 ‘원칙과 신뢰의 박근혜’라는 브랜드로는 수용 불가능한 세종시 수정안에 덜컥 김 대표가 찬성하고 나서자, 박 대통령은 그와 정치적으로 결별한다. 김 대표가 자신의 정치적 욕심을 채우려 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친박 내부의 ‘자기주장’이나 ‘일탈’을 용납 못 하는 박 대통령의 성격이 ‘개성공단 폐쇄하듯’ 김 대표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던 것이다.

박 대통령은 결국 ‘공천 뒤끝’을 부린다. 2008년과는 반대로 친박계가 공천권을 쥔 2012년 총선에서 김 대표는 굴욕적인 컷오프(물갈이)에 몰리다 결국 출마를 포기하며 ‘백의종군’을 선언하는 지경에 이른다. 박 대통령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지지율이 크게 흔들리고 나서야 어쩔 수 없이 김 대표에게 총괄선대본부장을 맡겼지만, 이후에도 김 대표와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고 있다.

김 대표는 비박계의 한숨소리와 비아냥을 참아가며 공천 방식 등 당 운영과 관련해 청와대와 친박계에 거듭 ‘양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거둬간 마음은 올 봄에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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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민주화 '소신' 이혜훈, '미운털'

“선교하고 승민이하고 이혜훈이하고 진짜 열심히 했는데, 다 멀어져가네….”

지난해 11월 대구 경북대병원 장례식장. 유승민 의원 부친의 빈소에서 한선교 의원을 마주친 김무성 대표가 이런 말을 던지고는 소주와 맥주를 섞은 잔을 돌렸다. 한 의원은 2007년 대선 경선 캠프에서 박근혜 후보 수행단장을 맡아 “함께 살고, 함께 죽는다”는 말을 남겼던 원조 친박이었지만 지금은 친박계와 소원해졌다.

이혜훈 전 최고위원도 마찬가지다. 당내 경제통인 이 전 최고위원은 2007년 대선 경선 캠프에서 박근혜 후보 대변인을 맡았다. 이명박 캠프 쪽으로부터 “그러다 18대 총선에서 공천 못 받을 줄 알라”는 공개 경고를 들을 정도로 열심히 뛰었다. 서울 서초갑에서 재선을 한 그는 2012년 총선에서는 ‘강남벨트 현역의원 배제론’에 걸려 공천장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새누리당 총선 종합상황실장을 맡아 이명박 정부 심판론을 뚫고 선거 승리의 밑바탕을 깔았다. 곧이어 열린 전당대회에서는 ‘경제민주화 실천’을 내세워 전체 득표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대선 승리 뒤 다시는 열어보지 않겠다며 박 대통령이 대못을 박아놓은 ‘경제민주화’를 계속 살려내려 한 것이 ‘화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전 최고위원은 박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경제민주화 공약이 후퇴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꿋꿋하게 밝히며 청와대를 불편하게 했고, 결국 짤박 신세가 됐다. 2014년 7·30 재보선 때는 국회의원이었던 시아버지의 연고지인 울산에 공천신청을 했지만, 결국 공천심사를 주도한 친박 주류 쪽에 ‘불공정 여론조사 방식’을 비판하며 자진 철회해야 했다.

그는 이번 총선에서 서초갑에 다시 공천신청을 했다. 경선 경쟁자는 박근혜 정부 청와대에서 정무수석을 한 친박계 조윤선 전 의원이다. 이 전 최고위원은 출마선언문에 “여당이라고 무조건 정부 편들지 않았습니다. 경제민주화 공약을 지키기 위해, 대통령께도 할 말을 했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진정으로 대통령을 위한 길이라면 저 개인의 유불리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대선 공약인 경제민주화 추진하겠습니다”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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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과 신뢰’ 강조하면서 공약 수정에 반대하면 “배신자”

진영 의원도 “대선 공약 수정 반대”를 외치며 스스로 탈박의 길을 걸었다. 2004년 박근혜 대표 비서실장을 맡았지만, 계파로 묶기에는 정치적 소신이 비교적 분명한 인사였다.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때도 적극적으로 박 대통령을 돕지 않았고, 세종시 수정안에도 찬성했다. 확고한 차기 대선 주자로 자리 잡은 박 대통령에게 사람들이 몰리던 2010년에는 오히려 ‘박근혜 주변 문고리 권력의 배타성과 폐쇄성’ 등을 이유로 곁을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대선 승리 뒤 박 대통령은 그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부위원장에 발탁해 새 정부의 밑그림을 그리도록 했고, 첫 보건복지부 장관에도 임명했다. 진 의원은 그러나 2013년 9월 청와대의 기초연금 대선 공약 수정에 “양심의 문제”라며 공개적으로 반대의사를 밝힌 뒤 장관직을 던졌다.

이혜훈 전 최고위원과 진영 의원 모두 대선 공약 폐기·수정 반대를 요구하다 박 대통령과 멀어졌다. 독선적 결정까지도 ‘원칙과 신뢰’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려는 박 대통령에게 대선 공약 파기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경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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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인·이상돈, 적으로 돌아선 ‘벽상공신’

이념과 계파, 공천과 권력이 아닌 경륜과 정책, 정치쇄신을 명분으로 박 대통령 쪽에 섰던 전문가그룹의 이탈은 ‘배신’이라는 1차원적 감정으로 설명되지 않는 근본적 물음을 박 대통령에게 던진다. 이들 전문가그룹은 박 대통령 당선 뒤 한결같이 “국민들에게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가장 극적인 이탈은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와 이상돈 국민의당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다. 두 사람은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영입한 이들이지만, 4년 만에 여당의 대척점에서 칼을 겨누고 있다. ‘처절한 배신’인 셈이다.

국민행복추진위원장 겸 경제민주화추진단장이라는 거창한 직함을 받은 김 대표는 경제민주화 공약의 기초를 다지며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야권으로 갈 중도층·무당파 표심을 잠식했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에 대한 완고한 반대론자였던 이 위원장은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으로 합류한 뒤 야권의 전매품인 ‘반엠비’, ‘정권심판’ 구도에 확 물을 타버렸다. 박근혜 정권 창출의 ‘벽상공신(조정 벽에 초상화를 그려넣을 정도로 창업에 공이 큰 신하)’으로 부족함이 없는 이들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대선 직후 사실상 ‘팽’ 당한다. 그들이 기초했던 공약들도 논란 속에 하나둘 없던 일로 돌아갔다. “그래도 이 정권의 변화를 기대한다”며 탈당하지 않던 두 사람은 경제민주화와 복지 공약의 기초가 사실상 무너지고, 국가정보원 대선 여론조작 사건에 대한 청와대와 당의 대처 방식을 보며 박 대통령에 대한 남은 기대를 모두 접는다.

김 대표는 “이 정부가 경제민주화를 더는 거론 안 할 걸로 본다. 국민들에게 굉장히 미안하다 생각한다”, “내가 너무 과욕을 부렸다”며 총선과 대선 때 박 대통령을 도왔던 것을 사과하기에 이른다. 이 위원장도 “박근혜 정부의 성공 가능성은 없다. 많은 책임감을 느끼며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박근혜 대선 캠프의 싱크탱크로, 집권 첫해 박근혜 정부 최대 인력공급소 역할을 했던 국가미래연구원의 김광두 원장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통령의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

”며 집권 2년 만에 사실상 박 대통령과 결별했다. 김 원장은 2007년 말부터 이혜훈 전 최고위원의 남편인 김영세 연세대 교수 등과 함께 박 대통령의 ‘경제 가정교사’ 구실을 했다. 2007년 대선 경선 때는 박 대통령의 핵심 공약이었던 ‘줄푸세’(세금 줄이고 규제 풀고 법질서 세우고)의 뼈대를 잡았다.

그러나 김 원장은 인사 참사가 끊이지 않던 2013년 집권 초기부터 “소통이 부족하다. 주변에 쓴소리 할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며 박 대통령의 ‘용인술’을 비판했다. 박 대통령이 질색하는 증세 문제에서도 “결국은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에게 실망한 이들은 “과거에는 지금과 달랐다”며 정말로 아쉬워한다.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을 오래 지켜본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지금의 모습은 상상이 안 갈 정도다. 그때는 얼굴 보며 차도 마시고 토론도 했다. 노래방에 함께 가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변한 것인가, 아니면 지금의 그가 원래 모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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