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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공할 우주의 넓이에 내던져진 인간의 삶..
문화

가공할 우주의 넓이에 내던져진 인간의 삶

이민숙 기자 입력 2016/02/25 17:49
2015 연극 창작산실 우수작품제작지원 선정작, 연극 ‘우주의 물방울’



[연합통신넷=이민숙 기자]드라마로서 대중적 코드를 지니면서도 가공할 우주의 넓이에 내던져진 인간의 삶, 그 단 한 번의 유한함이 어떤 의미가 있는 지를 묻고 있는 연극 ‘우주의 물방울’이 오는 3월 6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무대에 오른다.

연극 ‘우주의 물방울’(연출 임후성)은 하루하루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복잡함과 무질서해 보이는 모순들 속에서도 이 모든 사태를 궁극적으로 밀고 가는 동력인 ‘사랑’에 대해 말해준다.

사랑 때문에 오늘을 살고 내일을 약속하고, 또한 어제를 속죄하고 오늘에 충실해지는 사랑의 속성은 무엇일까? 아마도 ‘맹목성’ 일 것이다. 이 작품은 매일 동쪽에서 뜨는 해처럼 그저 그렇게 지속되는 일상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물을 때 꺼낼 수 있는 가장 절실한 대답으로서 맹목성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 속에서 누에나방의 무수한 반복은 맹목의 사랑이 지니는 해석 불가능성과 숭고함을 보여준다. 누에나방은 검은 점처럼 보이고 작고 무수한 알들에서 시작해 뽕잎을 사각거리면서 먹어치우는 누에로 성장한 후, 오동통하고 실팍하게 부푼 몸에서 하얀 섬유를 짜내 자기를 에운다.

몸이 다시 작아지면서 하얀 실의 해먹 속에서 며칠을 살다가 마침내 살색의 보드라운 나방이 되어 나오면서 날아 갈일만 남았다. 하지만 성충이 된 누에나방은 입이 없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날지를 않는다. 진행되던 이야기의 대단원이 갑자기 사라지고 나방은 다시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간다. 나방은 검은 점처럼 보이는 작고 무수한 알들을 낳는 일에 골몰한다. 그리고 시작의 점들 사이에서 영원히 잠든다.

이 작품은 침통하다. ‘우주’는 있음과 없음을 순환시키면서 죽음과 삶을 가역적으로 움직이면서 거대한 무심함을 진행하고 있다. ‘우주’는 의인화하지 않으면서도 그러나 모든 의인화의 가능성을 실현한다. 단 한 번인 삶의 형식은 죽음이라는 모순개념과 대립된다. 이 두 개념은 그것을 포함한 상위의 무심한 순환, 즉 ‘우주’의 원리로 존재한다. 결국 우주 속의 삶은 무겁게 존재하지만, 다시 죽음의 궤도에 올라서는 순간 가볍게 날아간다.

한편, 인간에게 진정으로 비극적인 것은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삶의 끝에 도달한 존재의 의미를 소멸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일봉과 화수, 두 부분의 삶은 죽음에 의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비로소 해석된다는 관점을 얻게 된다.

극중 인물들은 누에나방의 삶을 관찰한다. 누에나방이 사는 것은 간단하지만, 누에나방의 죽음은 자신의 삶이 어떻게 시작됐는지를 말해준다. 그것은 마치 우주의 신작처럼 건조하고 단정하게 주어진 것이다. 이 극은 현실의 무거운 디테일을 견디면서 생의 마지막 순간에 도달하는 사람의 진실과 애정 속에서 우리의 삶이 처음에 무엇이었는지를 전하고 있다. 삶의 처음에서 우리가 삶의 끝을 알았다면 단지 무거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의 끝에서 처음을 바라보는 순간 그 무거움은 가볍게 허공에 들려 있다. 무거운 지구가 우주에 떠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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