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의 진한 포옹, 평양시내 카퍼레이드, 화기애애한 만찬, 백두산 등정 등 2018년 9월 18일부터 20일까지 2박 3일 동안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함께 보여준 모습을 보노라면 한반도에 이미 ‘핵없는 평화’가 온 것 같은 착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아직은 여전히 착각일 뿐임을 깨우쳐주는 대목들도 많았다. 환영 나온 북한 주민들이 들고 있는 깃발에는 인공기는 있었지만 태극기는 없었고, 대신 정체가 불분명한 한반도기가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공동선언문을 읽으면서 한국 국민을 ‘남녂 국민’으로 호칭했다. 평양 정상회담의 결과에도 개운치 않은 구석들이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사회에는 호루라기 부는 사람들(whistle blowers)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제5차 남북 정상회담이 북한 비핵화와 남북상생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사회라면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에 수반될 위험성을 경고하고 대비책을 주문하는 사람들이 있어야하고, 이것이 바로 전문가와 언론이 해야 할 몫일 것이다.
필자들 역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이번 평양 정상회담이 진정한 북한의 비핵화로 결실을 맺을 것을 고대하고 있지만, 명색이 전문가들인지라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는 소위 ‘휘슬 블로어’의 역할을 자청하고자 한다. 국가안보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하고, 언제나 만전지계(萬全之計)를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언론이 이 역할에 소극적인 상황이라서 더욱 전문가들이 열심히 이 일을 할 수밖에 없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도 필요
필자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우리 국민들은 지금까지 다섯 번째, 현 정부들어서만 세 번째인 이번 평양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핵무기 폐기에 대한 확실한 내용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었다. 최소한 핵무기의 양과 위치에 관한 리스트를 제시하겠다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약속은 나오지 않겠느냐고 예측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회담 후 발표된 공동선언을 보면 그러한 분명한 내용은 없고, 여전히 남과 북은 한반도를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어나가기 위해 노력한다는 애매한 표현에 그치고 있다. 좀더 구체적인 내용으로 북한은 “동창리 엔진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를 유관국 전문가들의 참관하에 영구적으로 폐기하겠다”고 했지만, 이들은 6.12 싱가포르 회담의 결과로 이미 폐기하고 있던 시설들이다. 게다가 북한은 “화성-15형”과 같은 이동식 미사일로 전환한 상태라서 미사일 발사대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엔진시험장과 발사대 폐기는 단순히 물리적인 제거 행위로서 전문가의 검증이 그렇게 필요한 시설이 아니다.
북한은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적인 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용의가 있다”고 했지만 “미국이 6·12 북·미 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상응조치를 취하면”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미국이 북한이 원하는 종전선언이나 제재 완화와 같은 것들을 들어주지 않으면 폐기하지 않겠다는 말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북한은 고농축 우라늄(High-enriched Uranium)을 중심으로 한 핵무기 생산과 그 고농축 우라늄의 대량생산 체제를 구비한 상태라서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5MWe 발전소는 더 이상 핵심적인 시설이 아니다. 영변에도 우라늄 농축시설이 있지만, 북한은 다른 곳에 더 큰 우라늄 농축시설을 가지고 있다.
정부는 이번 회담을 통하여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더욱 분명히 했다고 말하지만, 실제는 그 반대일 수 있다. 북한은 ‘북핵 폐기’라는 분명한 표현 대신 계속해서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한반도’라는 애매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금년 4월의 판문점 회담과 6월 미북 정상회담에서 사용하였던 ‘완전한 비핵화’라는 표현도 없었다. 왜 그럴까? 핵무기를 폐기할 의사가 없다고 봐야 되는 것 아닐까? 핵무기를 폐기할 것이라면 그러겠다고 분명하게 말하지, 왜 계속 애매한 표현만 사용하겠는가? 슬프지만 이제 우리는 북핵을 머리에 이고 살아가는 상황을 가정해 보아야 한다. 이번 평양회담을 통하여 상당수의 국민들이 이와 같은 냉철한 생각을 갖도록 되었다면, 그것은 이번 평양 정상회담의 성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이 6.25 때처럼 기습공격을 감행한다면?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남한의 송영무 국방장관과 북한의 노광철 인민무력부장이 남북한 간 군사적 긴장완화 및 신뢰구축을 위한 다양한 군사적 조치에 합의했다. 합의서에는 모든 공간에서의 일체의 적대행위 전면중지, 비무장지대를 평화지대로 만들어 나가기 위한 군사적 대책, 서해 일대 평화수역 조성 및 안전한 어로활동 보장 등이 담겼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실질적인 이행방안들이 열거되었다.
문제는 한국에게 불리한 내용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기종별로 10-40km 내에서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고 있는데, 고정익 항공기의 경우 군사분계선으로부터 서부는 20km, 동부는 40km 범위를 비행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한국이 북한의 기습을 예방하는데 필수적인 공중정찰이 크게 제약되어 북한에 관한 세부적인 정보를 제대로 수집할 수 없다. 또한 비무장지대 내 감시초소(GP)를 철수하는 문제도 그렇다. 일단 동수로 11개 씩을 시범적으로 철수하고, 나중에는 모두 철수한다는 내용이지만, GP의 숫자가 북한이 한국의 2배 이상이기 때문에 동수 감축은 한국에게 불리하다. 북침을 할 수 없는 남한을 상대하는 북한에게는 GP가 중요하지 않지만, 북한의 기습공격을 미리 알아야 하는 남한에게 있어 GP는 참극의 징후를 탐지하는 촉수와 같은 존재이다. GP가 없어지면 북한은 비무장지대까지의 비밀리에 군사력을 접근시켰다가 기습공격을 할 수 있고, 땅굴 굴착을 재개할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에 그렇다는 뜻이다.
동서해 지역을 평화수역으로 만들어 사격과 훈련을 금지하고 공동어로 활동을 보장한다는 부분도 한국이 양보하는 수역이 더 넓어 불리하며, 백령도를 비롯한 서북 5개 도서의 군사활동도 크게 제약될 것이다. 북한군 특수부대가 평화수역 내에서 어로활동을 가장하고 있다가 한국의 서해안 지역에 침투하면 누가 어떻게 탐지할 것인가? 최악의 경우에 그렇다는 뜻이다.
또한, 군사분야 합의서는 북한이 6.25 전쟁과 같은 기습공격을 가하려 하는 경우 한국을 매우 취약하게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합의서에는 한강하구의 공동이용을 군사적으로 보장하는 대책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을 제기한 쪽이 한국인지 북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북한군이 제기하였다면 상당한 노림수가 있을 수 있다. 한강하구의 민간 이용을 군사적으로 보장하려면 해당 지역에 설치되어 있는 각종 장애물과 경계초소를 제거하고 군부대의 배치도 조정해야 하며, 결국 경계태세가 허물어지고 만다. 그러한 상황에서 민간활동이 활발해져서 감시가 느슨한 틈을 활용하여 북한군 부대가 기습적으로 도하할 경우 김포반도를 거쳐 남방에서 서울을 일거에 포위할 수 있다. 이 지역은 평야지대라서 축차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어려워 일단 도하를 허용하면 저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전략가들은 이 지역을 제2차 세계대전 시 독일군이 프랑스를 기습공격한 지역인 아르덴느에 비유하여 ‘한국의 아르덴느’라고 불러왔다.
북한이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철원지역 공동유해발굴 사업도 북한의 기습공격에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남북은 금년 11월말까지 발굴지역 내 지뢰와 폭발물을 제거하고 12월말까지 12m 폭의 도로를 설치하여 연결한 다음 내년부터 발굴사업에 착수하기로 했는데, 이 사업에는 적지 않은 기간이 걸린다. 그렇다면 그 기간 동안 남한은 북한에게 고속 접근로를 노출시켜 주는 것이 된다. 만약 북한이 기습적으로 이 도로를 활용하여 군사력을 기동시킬 경우 북한군은 순식간에 철원평야를 장악할 것이고, 남한의 중부지역을 관통하여 서울보다 더욱 큰 지역을 포위할 수 있다. 최악의 경우에 그렇다는 뜻이다.
북핵을 머리에 이고 살 준비를 해야
북한이 핵무기를 폐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핵을 머리에 이고 사는 수밖에 없다. 당연히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절망적인 것도 아니다. 냉전시대에 미국에서도 ‘핵무기와 함께 살기(Living with Nuclear Weapons)’가 심각한 토론주제였고, 그로 인하여 핵무기의 억제(deterrence), 대피를 위한 적극적이면서 민방위(civil defense) 대책들이 강구되었다. 그 결과 지금까지 핵전쟁은 발발하지 않았다. 비록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더라도 우리가 한미동맹을 강화하여 미국의 핵무기를 우리의 억제력으로 활용함으로써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를 유지한다면 북핵은 억제될 수 있다. 상황이 더욱 심각해지면 미국의 전술핵무기 배치를 요청할 수도 있다.
또한 전임 정부들이 추진했던 ‘3축 체제’를 잘 발전시키면 독자적으로도 북핵에 대한 억제력을 어느 수준까지는 보유할 수 있다. 북한의 핵발사 징후가 탐지될 경우 선제적으로 파괴하는 ‘킬체인(Kill Chain),’발사된 적 미사일을 공중에서 요격(interception)하는 ‘한국형 미사일 방어체계(KAMD),’도발시 응징을 가하는 ‘대량응징보복 체계(KMPR)’ 등을 강화해 나가면 된다. 미래에 가용해질 첨단기술을 최대한 활용하여 이러한 ‘3축 체제’의 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나간다면 북핵을 머리에 이고도 안전해질 수도 있다. 우리가 철저히 대비할수록 북한은 함부로 핵무기를 사용하지 못할 것이고, 그러는 가운데 북한 내부에서 어떤 변화가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문재인 정부가 발표한 ‘국방개혁 2.0’에는 전임 정부의 목표였던‘3축 체제의 조기 구축’이라는 표현은 실종되었다.
북한의 ‘나쁜 마음’에 대비하고 있나?
평양회담은 미국과 북한의 대화 재개를 견인하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국민이 원하는 북핵 폐기 방안은 담아내지 못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질적으로 앞서고 있는 재래식 군사력의 상당부분을 제약하는 양보 조치에 합의해버렸다. 국가안보는 낙관하기보다는 비관하고, 언제든지 최악의 상황까지 고려해야함에도 대부분의 언론들은 ‘휘슬 블로어’의 역할보다는 성과 홍보에 대부분의 노력을 사용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상당수의 국민들은 미결의 성격이 더욱 큰 북핵 문제의 본질을 망각한 채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된 것으로 들떠 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김정은 위원장을 비롯한 북한 수뇌부는 어떤 생각을 할까? 만만하게 보지 않을까? 6.25 전쟁 직전 김일성과 북한 수뇌부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기습공격을 가하면 바로 무력통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스타인(Arthur A. Stein) 교수는 전쟁의 발발과정을 연구하면서 공격적 성향의 ‘기회주의 국가’는 상대가 호락호락하게 보일 때 전쟁을 결심한다고 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도 기회주의 국가인 독일이 영국을 나약하게 인식하여 전쟁을 도발했고, 1962년 쿠바사태도 기회주의 국가인 소련이 미국의 대응의지를 과소평가하여 발생했으며, 1950년의 한국전쟁도 기회주의 국가인 북한이 남한을 만만하게 보아 발발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우리의 근거없는 낙관주의가 전쟁을 유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도 해봐야 한다.
글/ 박휘락 국민대 정치대학원 교수/ 김태우 전 통일연구원장 / 송대성 전 세종연구소장 / 신원식 전 합참 작전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