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대구=문해청 기자] 30일 칠곡군 후원과 한국문인협회 칠곡지부 주최로 구상문학관 관수재에서 제15회 구상문학제 및 제24집 ‘칠곡문학’ 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먼저 본행사 1부로 제3회 전국 구상시낭송경연대회를 열고 2부로 제15회 구상문학제를 개최한다. 주최 측의 심사평 및 심사결과발표로 시상식을 하며 경기민요 축하공연과 초청 된 이정록 시인의 강연을 한다.
구상 시인은 1919년 9월 16일 서울 이화동에서 출생했다. 1953년 한국전쟁 중 경북 왜관 칠곡 미8군 캠프캐롤, 낙동강방어전투, 한국전쟁기념관이 버디고 있는 대표적 친미반공보수지역에서 제2의 삶을 인연 맺게 되었다.
구상 시인은 조부가 울산부사였고 백부는 각각 창녕현감, 현풍군수를 했다. 부친 구종진은 궁내부 주사를 했고 외조부는 백두 진사(과거 급제해도 벼슬에 나가지 않음)를 했다. 외가는 아산 이씨 가문의 전통적 천주교집안이라 부친도 결혼 후 천주교회에 다녔다.
구상 시인은 형님이 2명 있었다. 한 분은 가톨릭 구대준신부로서 광복 후에 북측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중 전쟁분단의 상해로 1949년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한 분은 일제식민지시기 동경 유학 중 동경대지진 때 전쟁주의 천황제 극우 일본인이 우물에 극약을 탔다는 조선인 모함 음해사건으로 조선청년을 대량살상 할 때 행방불명되는 비극을 맞았다.
구상 시인의 경북 왜관 칠곡 인연과 삶은 남다르고 특별하다. 북측에서 형님 구대준신부와 거주 할 시 응향필화사건이 났고 탈출하여 월남했다. 서울에서 일제식민지시기 카프(조선프로레탈리아문학동맹)문학의 맥을 이루는 민족문학가동맹 입회 참여로 활동했다.
구상 시인은 지병인 결핵이 재발했고 설창수선생의 주선으로 마산결핵요양원에서 치료 후 호전 됐다. 진주에서 활동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그 당시 원산 덕원에 있는 성베네딕도수도원이 왜관으로 피난을 온다는 소식을 듣고 현재 문학관자리에 안착했다.
구상 시인은 대구 달성공원 이상화시비 제막식(1948년)을 계기로 대구 문인들(박목월, 이호우, 김달진, 유치환 시인)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날 구상 시인은 당시 문총 회장 박종화 작가의 대리로 추모사를 읽었고 얼마 후 거기서 만난 문인 중 이호우 시인을 구출하는 주역이 됐다.
이호우시인은 1949년 전, 여맹원인 모 여성과의 교분 때문에 남로당 경북지구재건책으로 몰려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에 문총은 현지조사를 하고 구명을 결단함에 따라 구상, 조지훈, 김광섭 등 각계에 손을 쓴 결과 이호우시인은 사형직전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었다.
이사건과 관련해 훗날 이문구소설가의 흥미로운 고백이 있다. 그는 좌익활동가였던 부친 때문에 앞길이 막막하게 느껴졌던 청소년기에 이호우시인의 구명 이야기를 전해 듣고 문학인이 되어야 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쓴 바 있다.
세기적 사건인 남녘북녘 간 북미 간 정상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이다. 지난 73년 동족상잔의 세월은 역사의 뒤안길에 떠도는 먼지로 날라 갈 수도 있다. 냉전시대의 이념적 갈등 때문에 희생 되거나 피해를 본 무고한 이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회상하며 한반도 분단 73년의 과거와 현재를 씁쓸하게 되돌아보게 한다.
구상 시인은 경북 왜관 칠곡에서 22년간 거주하며 대구 매일신문 고문, 영남일보 주필, 효성여자대학교에 출강하며 생활했다. 노년에는 서울로 이거하여 영등포 여의도시범하파트에서 살다가 한국근대사 산전수전 우여곡절 한 시대의 수많은 사연을 품고 영면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