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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배우 정호근, 신내림 받았다..
문화

악역 배우 정호근, 신내림 받았다

김현태 기자 입력 2014/12/23 08:03
그에게 아주 특별한 변화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만나러 가는 길. 택시기사는 비기독교인도 들으면 알 만한 이름의 유명 목사의 설교가 나오는 라디오에 채널을 고정하고 있었다. 어떤 질문부터 시작해야 할까. 막 무속인의 길에 들어선 악역 전문 배우 정호근에게.

죽음만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여겨졌던 ‘순간들’이 있었다. 정호근(51) 이름 석 자를 검색창에 치면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가족사’가 그렇다. 다섯 자식을 낳아 그 중 둘을 앞세운 아비의 속을 누군들 쉬 헤아릴 수 있을까. 하지만 이내 무대로 돌아와 세상에서 가장 싸늘한 가면을 써야 했다. 그는 세상이 알아주는 악역의 대명사였으니까. 정호근이 맡았으니 당연히 악역이겠구나 하는 그런 배우. 지난여름, 극중 캐릭터 임견미만큼이나 잔인하게 목이 잘리는 장면으로 안녕을 고한 인기 드라마 ‘정도전’의 여운을 채 누리기도 전에 그의 눈앞에서 노란 신호등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득, 자연스럽게
 
“이상하게 아프기 시작했어요. 여기저기 병원에 가도 나아지지 않고. 간, 위, 장, 콩팥 다 깨끗해요. 말짱하다가도 ‘이러다 죽는 거 아니야’ 싶을 정도로 아팠어요. 고통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무엇보다 정신이 혼탁해지고 황폐해지는 게 느껴졌어요. 두 달 동안 5~6kg이 빠진 거 같아요.”
 
2년 전 한 방송 프로그램 출연 이후 알게 된 (지금은 그의 신어머니가 된) 무속인은 너무나 느긋하게 말했다. “왜 이러긴, 신병이지.” 이른바 무병. 의약을 써봐야 소용이 없고 오직 무당이 돼야만 낫는다는 병이었다. 차기작이 예정돼 있었고, 주방용품 브랜드 론칭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그는 신의 선택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흔히 촉이 좋다는 얘기를 하죠? 사람을 보면 느낌이 오고, 또 제가 말하는 게 잘 맞는 편이었어요. 예전부터 이런 전조가 있었어요.”

결혼도 하기 전이니 20년 전은 됐을 것이다. 한창 강남 영동에 카페가 번성했을 무렵에 단골 카페에 새로 들어온 여종업원을 마주했는데, 그렇게 얼굴이 어두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다 취기가 오르자 옆자리에 갑자기 나타난 할머니가 그녀에게 전하라며 말을 걸어왔다. (그녀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할머니의 얘기를 그대로 전하자 여종업원의 얼굴은 사색이 됐고 금세 울음을 쏟아냈다.

“‘너 반지하방에 살지? 오빠가 죽었지? 밤마다 무서워서 잠을 못 잔다면서? 할머니가 무당이었지?’ 이런 말이 술술 나왔어요. 그러곤 ‘이렇게 계속 살래? 할머니처럼 만신이 돼서 명예도 얻고 사람들의 존경도 받을래?’라고 말해버렸어요.”

다음 날 아침, 후회가 밀려왔다. 상처를 준 것 같은 미안한 마음에 연락을 취했는데 답이 없었다. 그렇게 1년 반이 지난 뒤 연락을 해온 그 종업원은 손님으로 북적이는 신당을 지키고 있는 무속인이 돼 있었다. “우리 신령들께서 오빠한테 너무너무 감사하다고 한 상 차려드리래요.” 신내림을 받지도 않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세상이라는 생각에 그는 이후 발길을 끊었다고 했다.

그때와 비슷한 일이 신병을 앓을 당시에 다시 일어났다. 딸아이 선물을 사러 주얼리숍에 들렀는데, 처음 본 여자의 뒤에 서 있는 한 쌍의 아우라가 눈에 보이더란다. “집안에서 뭘 모셨구나?” 불쑥 건넨 그의 말에 놀라면서도 그 여자는 입을 닫았다. “3일 이내로 나한테 얘기를 할 거야!”라는 엄포를 놓은 지 이틀 만이었다. 그녀가 제 발로 찾아온 것은. “어떤 무당집에 가도 그걸 모르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어머니는 만신이고, 아버지는 스님이었다는 얘기를 하는데 저도 모르게 입에서 ‘너희 아버지 법명이 해월이시구나!’라는 말이 튀어나왔어요. 그러면서 그 친구와는 친해졌어요. 지금은 제 일을 도와주고 있죠.”


11월 14일, 새로 받은 생일
 


신내림을 받기에 앞서 태백산, 일월산, 계룡산, 대관령 국사당, 인왕산, 백마강, 문무대왕릉까지 다섯 곳의 산과 두 곳의 물을 찾았다. 명산대천을 찾아 신의 제자가 되겠다는 신고를 하는 것은 오랜 전통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찾은 인왕산 국사당에서 일종의 무당증이라고 할 수 있는 문고를 받았다. 지금도 예법을 지키는 만신들은 예로부터 국태민안을 기원하던 국사당에서 이 증서를 받으며 풍속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새벽 2시였다. 신어머니와 함께 찾은 국사당에서 그는 또 한 번 접신을 경험했다.

“나도 모르게 부채방울을 흔들면서 말을 하는 거예요. 이성은 살아 있고 자아도 있는데 신의 힘이 더 세니까, 그 말이 먼저 나와요. ‘어렸을 때부터 무당을 만들려고 키워왔더니 이제야 무릎을 꿇는구나. 지금이라도 잘 왔다. 네가 아니었으면 네 딸한테 가려고 그랬어’라고 하는데 다들 기겁을 했죠. 그동안 신이 온 게 맞는 건가, 의구심이 있었는데 그때 확신을 얻었죠.”

문고를 받고 3일 뒤인 지난 11월 14일, 양력 윤달 9월 22일 그는 정식으로 신내림을 받았다. 그는 그날을 새로운 생일이라고 표현했다. 인터뷰에 나서기까지 한 달여 고민했다. 당장 종교적인 신념이 다른 이들의 영향력으로 드라마 캐스팅에서 제외될 수도 있었다. 연기자로서는 물론 대중적인 입지가 좁아진다는 것은 자명했다. 수년 전부터 방송가에는 신내림을 받은 사실을 숨기고 몰래 점사를 보며 연기 활동을 하고 있다는 모 연기자에 대한 소문도 있다. 굳이 폭로가 이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를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어디 가서 점을 봤는데 탤런트 정호근이 보더라’는 얘기가 먼저 나오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또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살고 싶지도 않았고요.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일단 신을 받았으면 떳떳하게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배우도 하고, 무당도 하자는 결론이 나왔어요. 신내림을 받고 나서는 상담을 필히 해야 해요. 그건 신과의 약속이거든요.”

‘정호근의 커밍아웃’이라 써도 되겠다며 비로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굉장히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이에요”로 시작되는, 오래 묵혀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풍비박산’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왔다. 미숙아로 태어난 첫 딸이 생후 27개월에 눈을 감은 뒤, 세상을 등질 결심을 할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던 부부는 이후 미국행을 택했다. 거기서 두 아이를 얻었고 막내 쌍둥이의 탄생을 고대했지만, 그 중 아들을 또 잃는 시련에 맞닥뜨렸다.

“극과 극을 살아본 사람이에요. 인생 굴곡이 참 많았어요. 뭐든지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걸 느꼈고요. 운이 없으면 절대로 안 되더라고요. 주욱 올라갈 거 같다가도 뚝 떨어지고. 그런 경험을 많이 겪다보니 저 자신과 직업에 대한 회의도 많이 느꼈죠. 그러다 자식들도 잃게 되면서 피눈물을 흘린 날들도 많았고요.”

아주 묵직한 빗장을 풀어낸 듯한 편안한 표정으로 그는 친할머니에 얽힌 사연을 풀었다. 8남매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하루가 멀다 하고 깊은 산으로 치성을 드리러 다니던 할머니가 어느 날 신내림을 받은 뒤, 그의 아버지 사업이 불같이 일어났다고 했다. 대전 땅 대부분을 소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부친을 둔 덕분에 넉넉한 유년기를 보냈던 그는 하루아침에 망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됐다. 그 와중에 큰 누나에게 무병이 찾아왔고 집안은 합심해 기독교로 개종을 했다. 그렇게 잠잠해진 줄 알았던 신은 더욱 강해져 막내 여동생을 찾아왔다.

“아버지가 망했을 때, 제가 ‘아버지는 왜 그렇게 잘 나갈 때 신을 그렇게 홀대했어?’라는 얘기를 했었대요. 집안이 다 개종했을 때도 저는 왜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민족종교를 홀대하고 천시하게 됐는지 언젠가 밝힐 거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여동생이 무병으로 곧 죽을 것 같은 상황이 되자, 제가 내림굿을 받게 해줬어요. 오빠의 도리를 한 거죠.”


이제야 맞은 파란만장 인생의 퍼즐
 


여동생을 대신해 그의 집에 신당을 모신 지 벌써 6년째라고 했다. 무당은 점사를 봐야 하니, 주말이면 동생을 찾는 이들을 위해 집까지 내어줬다. 하지만 여동생은 그 운명을 곧이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던 중 미국 생활을 접고 한국에서 함께 지내던 아내와도 불화가 생겼다. 남편의 입장에서는 여동생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아내는 세 아이의 걱정이 컸다.

“은연중에 아내에게 ‘내가 사람들을 상담하면 어떨까?’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제발 참아달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이제 기사가 나가면 다들 알게 되겠지요. 집사람, 참 착한 여자예요. 당시 앉은뱅이가 된 여동생 살리겠다고 거금 들여서 굿을 할 때도 ‘막내아가씨 인생이 걸린 문제’라며 돈 얘기 한 번 안 했어요. 제가 성질이 불같아서 그 여자 가슴에 멍 들이는 짓을 많이 했었는데 정말 고생하고 잘 살고 있으니까, 앞으로 더 잘살게 만들어줘야죠.”

큰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텍사스에 살고 있는 3남매는 어느덧 17세, 16세, 13세가 됐다. 요리학교에 다니면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아내는 일주일에 3일 식당 주방에서 채소 써는 일을 하면서 기러기 남편에게 힘을 보태고 있단다.

“아이들은 5년 동안 같이 지내면서 아빠가 아침이면 신당에 옥수 올리고 절하는 걸 봤거든요. 아마 충격이 크지는 않을 거예요. 왜 그랬느냐고 물으면 ‘너희들 잘 되게 하기 위해서 한 거니까 너희는 열심히 공부만 하면 돼’라고 말해줄 거예요. 우리 애들 착해서 ‘네’라고 할 거예요.”

지난 12월 초 방송된 MBC-TV 드라마스페셜 ‘가봉’에서 그는 양복점 사장 역할을 맡아 실로 오랜만에 부드럽고 코믹한 이미지를 보여줬다. MBC의 몇몇 드라마 PD들조차 “그동안 그런 모습을 몰라봐서 죄송하다”고 할 정도로 악역의 선봉 정호근의 ‘변신’은 호평을 받았다. 중앙대 연극영화과 재학 시절에는 코믹 배우였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서 얼핏 아쉬움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그동안 악역하면서 욕 많이 먹었거든요. 밥 먹으며 제 연기를 보다가 밥상을 던져서 TV가 깨졌다는 댓글이 있지 않았나, 촬영장에서 돌을 던지는 사람은 또 없었나, 욕 들은 건 말할 것도 없고요. 그동안 신령들이 무장을 시키셨잖아요(웃음). 그러니까 어떤 얘기를 듣더라도 묵묵히 내 길을 갈 뿐이에요. 신기라는 건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가는 겁니다. 내가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하늘이 주신 탤런트라고 표현을 합니다. 재능이에요.”

지난 가을 그의 눈앞에서 점멸하던 노란 신호를 그는 경고가 아닌, 새로운 시작의 징표로 받아들이고 있다. 연극 무대에서 목부터 등줄기까지 떨림을 줬던 숱한 순간을 돌이켰다. 캐릭터와 배우가 혼연일체가 되는 순간 찾아온 찌릿찌릿한 전율이야 말로 연기의 묘미인데, 접신의 순간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이다. 할리우드에서도 한창 역사 속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들이 영매를 찾아가 접신을 의뢰하는 것이 유행이었을 정도로 배우들의 욕심은 한도 끝도 없다고 했다.

“방송국이나 언론사 사람들은 자기들 힘들면 제일 먼저 살려달라고 찾아가는 곳이 무당집이면서 왜 방송은 안 된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만약 나에게 임무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무당의 권익옹호와 사회의식 개선을 위해서 노력하라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명산대천을 다 다니며 치성드려 낳았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귀한 손자가 천둥번개가 치는 날 마당에서 실성한 듯 춤을 춰도 그저 조용히 쳐다보고만 계셨던 할머니의 얼굴이 기억난다고 했다. 큰 병원에 가서 뇌파검사를 하고 아무 이상 없다는 판정을 듣고서야 안심할 정도로 부모들은 겁을 먹었었지만, 정작 할머니는 어린 손자의 얼굴을 보며 앞으로 크게 될 거라는 말씀만 하셨다고. 정호근은 오랫동안 아귀가 맞지 않던 퍼즐을 푼 듯한 얼굴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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