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대구=문해청 기자] 사회적협동조합 ‘지식과 세상’ 이사장 김민남(경북대 명예교수)은 지난 11일 “우리 교육에 무엇이 문제인가? 페스탈로지의 사상으로 살펴보다”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다.
먼저 페스탈로지가 16세에 루소의 저서‘에밀’을 읽고 감명을 받고 삶을 방향을 결정한다. 페스탈로지는 청년기에 루소의 영향을 받은 생각으로 스스로의 재산을 던져 학교를 만들어 헐벗고 가난한 민중의 자식을 데려와 교육을 시켰다.
그동안 활동 경험을 토대로 그 유명한 ‘은자의 황혼’ 1780년 출간 한다. 은자의 황혼은 이렇게 시작한다. 인간은 옥좌에 앉아 있으나 초가에 누워 있으나 본바탕으로는 평등하다. 인간의 본성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목자도 양의 성품을 연구하지 않는가.
그대들 사람을 다스리며 사람을 보호하고 기른다고 자임하는 자여, 그대는 과연 농부가 소에 대해 바치는 정도의 수고를 하고 있는가. 그대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민중에 대한 지식인가.
민중교육이란 테마의 근원은 소를 키우는 나는 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내가 죽으면 나의 세계도 사라진다. 내 삶에 수치심이 배어들 틈이라고 없다. 인간은 교육을 필요로 하는 유일한 사회적 존재다. 따로 직업교육, 신분교육이 있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학교교육이 어떤 매체를 통하여 이루어지는가가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말하자면 그 매체는 교육과정이 아니라 학교(아이들 관계, 글쓴이 주)일 것이며, 심지어 학교가 아니라 사회일지도 모른다.
학습의 주도권과 자신감을 학습자에게 되돌려주는 문제, 다시 학습하고 싶어지도록 학습자 의욕을 자극하는 문제에 관계될 것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고 난 뒤에 다시 교육과정이 문제될 것이다. 이 때 교육과정은 교과내용이 아니라 지식을 학습하고 사용하는 전반적 접근방법을 가리키는 말로 쓰일 것이다.
페스탈로지교육론을 공부하는 이유는 교육문제에 관한 페스탈로지는 칸트 자신 보다 더 훌륭한 칸트주의자였다. 그의 사회적 이상이나 인간의 정신작용에 관한 일반적 관념은 그 위대한 철학자의 견해와 매우 유사한 것이 되었다.
칸트의 이론에서, 그리고 페스탈로지가 올바른 방법을 경험적으로 모색하는 과정에서, 아동의 본성에 상당히 합치하는 학교를 세움으로써 실제적인 명확성을 띠게 되었다.(보이드, 서양교육사, 474)
교육의 전통적 관점에 대한 도전으로 교육의 목적을 충량한 시민의 양성에 두는 관점이 있다. 교육을 개인 발달의 과정으로 보는 관점 아이의 정신작용에 관여하는 교육의 관점이 있다. 이런 요구하는 바에 따라 교육체제를 아동의 본성에 맞추기 위한 교육관이 필요하다. 이런 과정은 교육에 관한 모든 관행과 보통사람들의 편견을 뒤집어 놓지 않으면 안 된다.
앎을 통한 자기해방은 어느 누구도 인간과 역사를 꿰뚫는 선지자는 없다는 그 생각이 해방의 맛이다. (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 23-24). 누구나 지식형성의 ‘고통스런’ 경험을 겪도록 한다. 삶의 현장을 구성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식을 형성하는 학습경험을 쌓는다.
현실에 직면하는 사람들의 능력, 직관과 자발성은 삶의 현장에서 생각과 느낌과 땀을 흘린 사람의(민중의) 직관을 믿는다. 직관과 자발성을 열어주라. 직관의 능력이 뭐지 현재 있는 것 보다는 앞으로 있게 될 것, 가능한 것을 열어 놓는 눈, 시야이다.
인간의 능력과 사회에서 정치사회 경제사회의 규칙 규범에 적응하는 개인경쟁력의 다툼을 두고 그것을 ‘능력 사회’라고 규정할 것인가 그 능력 사회가 평화 공존의 힘이 될 수 있겠는가 대자연(생활세계)의 삶을 부정하는 교육체제, 그 교육체제에서 상정하는 인간능력과 사회는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관계적 사고를 보면 목적과 수단의 관계에 따른 교육론을 유보한다. 삶의 운동성을 인정하는 것, 그 운동성에 관여하는 교육론, 삶의 경험의 계속성을 성립시키는 조건으로서 배움의 자발성, 그 배움을 자극하는 것, 그게 뭘까 말이 아니다.
사람이 만든 것은 어느 것이나 이유가 있고 용도가 있다. 계단을 오르며 그냥 오르지 않는다. 왜 그것이 거기에 그렇게 있는지 묻는다. 배움은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니라 물음으로 이어진다.
어떤 방식으로 교육적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가르친다는 명분으로 사람한테 목표를 부과하고 목표 달성에 온 힘을 쏟는다고 도대체 인간형성에 목표라는 것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 목표를 어디서 구해오는가 인간 밖에서 그 목표를 끌어온다면 결국 그 목표는 도달점 같은 것으로 진술되지 않겠는가.
그 도달점은 누구의 것인가. 행위자 자신의 것이 아닌 그 도달점에 이르기 위해, 삶과 배움의 근본을 버려야 한다는 것인가.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규범을 가지고 그의 삶과 배움을 통제할 수는 없지. 인간형성은 차라리 ‘생장’이라고 비유해야 하지 않는가.
사랑은 가르치는 이의 프로그램으로 행동이 된다. 사랑을 구체적 행동으로 번역하는 방법 기술 프로그램이 필수적이다. 가르치는 방법을 가지고 가르친다. 그 방법이 방법임은 배우는 사람의 근본적 정신능력을 발휘하도록 이끄는 프로그램에 의해 검증된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드는 비인간적 권력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인간적 능력이다. 아이에게 사랑을 쏟는 다는 것은 방법을 가지고 아이에게 다가가는 지난한 과정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인간형성, 성격형성 교육은 한 개인이 비판적 판단력을 갖출 수 있게 되고 독창적이고도 창조적인 기여를 하도록 하는 성격 발달의 과정이다. 교육은 권리와 의무 그 본분을 다함으로써 사회에서 갖자 맡은 역할에 대해서 배우는 과정이다.
교육혁명을 마치 기적 같은 짧은 기간에 독일은 기사회생, 새로운 생명으로 우뚝 선 프로이센의 영도 하에 위대한 국가로 발돋음 하였다. 독일의 국가 지도자들은 사태의 긴박성에 걸 맞는 천재성을 발휘하여 새로운 교육을 창안하는데 집요한 노력을 기울였다(서양교육사,498).
교육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이해방식은 정보를 넘어 독자적 판단력 연마, 모든 것을 학문의 과점에서 생각하는 제2 천성을 길러주는 과정, 학문은 모든 사람이 갖출 수 잇는 자질이지만 그것은 성장하고 진화하고 역동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양의 개념이 핵심이며 무엇보다 교육적 의미에서 생성과정이다. 이런 사유체계에서 발견(연구)이란 다른 어떤 것 못지않게 도덕적 행위이다. (저먼 지니어스 344) 학문이데올로기, 19세기 경외심이 담긴 거의 종교적 지위를 부여 받고 독일대학의 공식이념이 되었다.
1770년부터 1840년에 이르기까지 독일철학자와 작가는 유럽의 교사였다. 그들 독일인 교사로부터 프랑스인 영국인 이탈리아인은 역사와 사회에 대해 단지 주지주의적 설명에 만족하지 않고 생생하면서도 발전하는 역사와 사회 자체의 소재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을 배웠고 사회연구의 기준은 무한히 풍요해졌다.( 의식과 사회,205)
페스탈로지는 온갖 장애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에 대한 사랑이라는 강력하고 불가항력적인 정조에 이끌려 온 세계를 뒤엎을 만한 위대한 지적 발달을 이룩하였습니다. 인류전체를 이 비참한 지경으로부터 구원해낼 수 있는 진정한 국민교육을 창안해냈다. -독일 국민에게 고함에서 발췌
임금이 보잘 것 없는데도 아주 낮은 부르주아지 층일 뿐인데도 교사직을 열망하는 젊은이들이 넘쳐났다. 칸트 피히테에서 도출되는 교육이론과 철학은 지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것이었고 페스탈로지의 실천은 건강한 매력이었다. 진정한 교육은 독일 국가체제의 중추가 되었다.
독일 교사들은 페스탈로지의 사상을 추종하여 교실에서 시대흐름의 변화를 일으켰다. 프랑스와 영국에서 공장과 철도가 그런 변화의 견인차라면 독일에서는 교실이 그 진원지였다. 페스탈로찌를 따르는 사범교육이 활기를 띠었고 독일 전역에 퍼져나갔다. (Bowen, 324). 하며 새벗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열매를 맺는 강의를 마무리하며 참교육을 시민이 참여와 향유하는 교육의 방향을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