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DJ)을 멀리서나마 처음 본 것은 1971년, 고교 3년생 때였다.
때마침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나선 그가 전주 공설 운동장에서 연설했다. 평일이었다. 학교에서는 "연설장에 가서는 절대 안 된다"고 단속했지만 극악한 유신 시절, 이미 세상 물정에 관심이 적잖았던 18살 고등학생 몇 명은 슬쩍 교실을 빠져나가 연설장으로 갔다. 평생 처음 들어보는 사자후였다.
그로부터 16년 후인 1987년 9월 동아일보 기자로서 DJ와 다시 만났다. 당시 동아일보가 발행하는 시사 월간지 <신동아>는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과 단독 인터뷰를 하고 10월호에 이를 대대적으로 다룰 예정이었다. 이를 알아챈 안기부(국가정보원)는 이 기사를 빼달라고 회유, 압력을 거듭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급기야 <신동아>를 인쇄하는 동아출판사에 요원들을 보내 봉쇄하고 출간을 막았다. 유례없는 인쇄소 원천 봉쇄인 셈이었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이에 저항해 신문사에서 귀가하지 않고 밤을 지새우며 '안기부 요원 철수'와 '자유로운 출간'을 요청하는 농성을 두 주쯤 벌였다. 결국 안기부는 물러섰고 매달 18일에 발간되던 10월호 <신동아>는 9월 30일에야 발간되었다. 소문이 퍼져서인지 무려 40여만 부가 팔려 우리나라 월간지 사상 전무후무한 판매 기록을 세웠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안기부와 싸우기 일주일쯤 지난 늦은 밤에 당시 DJ가 김진배 의원, 장기욱 의원, 배기선 비서관 등을 대동하고 동아일보 편집국 농성장(세종로)을 격려하려고 방문했다. 당시 농성에 주도적으로 나서고 있던 내가 어찌하다 보니 기자 대표로 DJ 일행과 악수했고, 그의 격려사에 답하는 짧은 감사의 말씀도 하게 됐다.
그 후 11년여가 지난 1999년 3월 나는 무너져가는 <동아일보>를 다시 세워보려고 사주와 싸우다 포기하고 DJ의 청와대에 합류했다. 그분 퇴임 때까지 국내 언론 비서관, 해외 언론 비서관, 춘추관장을 맡아 일했다. 청와대에서 대통령님 뵙고 인사드릴 때 1971년, 1987년 말씀도 드렸다. 인연이라면 꽤 뿌리가 깊은 인연이라고, 그는 파안대소하며 좋아했다.
최근 출간된 <기적은 기적처럼 오지 않는다>(메디치미디어 펴냄)라는 책을 막 읽었다. 김대중 자서전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삼인 펴냄) 1, 2권을 DJ 구술을 바탕으로 사실상 썼고 그 뒤 <새벽 : 김대중 평전>(사계절 펴냄)도 썼던 김택근 전 경향신문 논설위원(시인)이 지은 책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다시 김대중을 생각하는 사람이 느는 것은 세상이 편치 않다는 얘기다. 그가 걱정한 대로 민주주의, 서민 경제, 남북 관계의 위기가 오지 않았는가?"라며 "그가 다시 돌아와 우리 눈물을 닦아줄 수는 없지만, 그가 남긴 불멸의 유산인 그의 말들 속에서 희망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그를 아무 복선 없이 불러내 보자는 데 동참했다"고 밝혔다.
용기, 도전, 지혜, 인내, 성찰, 평화, 감사의 7장으로 나누어 DJ가 남긴 대표적인 어록을 소개한 뒤 저자가 자서전과 평전을 쓰기 위해 오랫동안 직접 들었던 육성과 모든 자료를 동원해 그 말의 의미와 배경, 오늘에 살릴 지혜를 설명하는 형식이다.
DJ에 관해서라면 알 만큼 안다고 여겼던 나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 여럿이다. 이명박(MB)의 악정을 보며 "이제 우리도 내각 책임제를 할 때가 되었다"라고 토로했다 할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목표를 이루는 YS(김영삼)에 대해 "부럽지는 않지만 대단하다"고 토로했다는 것 등이다. 서거 1년 전부터는 잠자리에 들기 전 이희호 여사와 '고향의 봄'이나 '사랑으로'라는 노래를 불렀으며, 아내와 윷놀이를 했는데 세 판 연속해 져서 30만 원을 잃은 적도 있다는 것도 그렇다.
"내 몸의 반이 부서진 것 같다"는 말씀의 배경도 가슴을 때린다.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 서거 후 장례 행사 때 김대중은 주최 측 요청에 따라 '추도사'를 준비했다. 그러나 정부 측에서 읽지 못하게 해 공개되지는 않았다. 저자는 김대중은 추도사 일부를 소개함으로써 김대중의 그 절절한 심정을 전한다.
"서거 소식을 듣고 나는 '내 몸의 반이 부서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 표현을 했는지 생각해 봅니다. 노 대통령 생전에 민주주의가 다시 위기에 처하는 상황을 보고 아무래도 우리 둘이 나서야 할 때가 머지않아 올 것 같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서거했으니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신은 죽어서도 죽지 마십시오. 당신은 저승에서, 나는 이승에서 힘을 합쳐 민주주의를 지켜냅시다."
안타깝게도 김대중의 병세는 그 이후 급속히 악화되었고, 석 달 만인 그해 8월 역시 서거한다.
김대중은 서거 7개월 전인 2009년 1월의 일기에서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역사에 일시적인 반동은 있을지라도 완전한 후퇴는 없을 것이라는 믿음의 소산이었다. 그런 믿음에 동의하기 어려운 오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겪었던 격동의 파노라마 같은 인생을 생각해볼 때 아름다운 풍경화 한 폭을 보는 듯하다.
DJ가 남긴 불멸의 유산인 그의 어록을 찬찬히 음미해 볼수록 그의 말과 글의 원천은 독서광에 가까웠던 그의 책 읽기였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희호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김대중은 5년 반의 감옥 생활 동안 600여 권의 책을 읽었다. 정치, 경제, 역사, 문학, 철학, 신학 등 모든 분야가 망라된 넓고 깊은 책 읽기였다.
대학을 다니지 못한 김대중에게 감옥은 책 읽기와 깊은 사유의 대학이었다. 기자들이 "받아쓰면 그대로 명문이 된다"고 말하는 김대중의 성명이나 연설, 그리고 논리정연하고 호소력 있는 글과 특히 대구법을 잘 활용하는 뛰어난 조어(造語) 능력은 모두 엄청난 독서량과 잘 정리된 사유에서 출발한다고 하겠다.
MB 정부이던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이 일어나자 당시 청와대 정정길 비서실장이 김대중을 찾아 의견을 구한다. 이때 김대중은 "현미경처럼 세밀하게 검토하되, 망원경같이 넓고 크게 사고하라"고 충언한다. 사건은 현미경으로 면밀히 보되, 남북 관계 전반은 망원경으로 보고 대처하라는 것이다. 대구법 조어의 절정을 보는 듯하다.
이번 책에서 또 하나 뚜렷이 느껴지고 인간적으로도 감동이 큰 것은 아내 이희호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사랑이다. 2008년의 한 일기에서 김대중은 "아내가 나보다 먼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내 없는 삶이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라고 토로했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아내를 더 찾았던 듯하다.
잘 알려졌듯이 김대중은 1962년 이희호와 재혼했다. 상처(喪妻)하고 두 아들을 둔, 더욱이 박정희 쿠데타 정권의 '정치 활동 금지법'에 묶여 있던 39살의 정치 룸펜의 청혼을 두 살 연상으로 당시 최고의 여성 지식인(YWCA 총무) 이희호가 선뜻 받아준 것부터가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인간 김대중, 정치인 김대중의 삶은 이희호를 아내로 맞으면서 완전히 달라졌다고 확신한다. 실제 김대중은 사형 집행의 위기에서 벗어나 1982년 미국으로 가 활동할 때 곳곳의 연설에서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내 덕분입니다. 아내가 없었더라면 제가 오늘날 무엇이 되었을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이희호의 남편으로 이 자리에 서 있고 그것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라고 말했다.
지난 2002년 5월 유엔 아동 특별총회가 유엔본부에서 열렸다. DJ가 기조 연설을 하도록 예정되었으나 고관절을 다쳐 거동이 힘들게 되었고, 이희호 여사가 대신 연설하도록 조정되었다. 내가 당시 청와대 공보 비서관으로 수행진을 이끌고 기자단과 동행해 유엔본부에 갔다. 귀국 항공기에서 나는 오랫동안 궁금했던 두 분의 연애담과 청혼 및 승낙의 순간에 대해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일부 알려진 대로 가슴 뭉클한 러브스토리였다. 이희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해주었다.
"그 똑똑하고 인간적이며 꿈이 큰 김대중 씨를 그대로 방치하면 망가질 것 같았어요. 내가 반려가 되어 서로 끌어주면 틀림없이 위대한 정치가가 되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파고다 공원에서 그의 청혼을 두말없이 받아들었지요."
비화 한 토막을 공개하자면 2002년 5월 10일은 김대중, 이희호 결혼 40주년 기념일이었다. 유엔본부 연설을 끝낸 이 여사에게 당시 수행진과 기자단 공동 명의로 간단한 글과 함께 결혼 축하 장미 40송이를 건넸다. 이 여사는 귀국하자마자 이 글과 장미꽃다발을 김대중에게 전했다. 김대중은 나중에 이때 크게 감동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1993년 육필 메모 하나를 소개하며 독후감을 끝낸다.
"우리의 정치, 아니 이 나라를 망치는 큰 책임자는 언론이다. 그들은 막강한 힘이 있다. 바꿔볼 길도, 고쳐볼 길도 없다."
23년 전 육필 메모의 일갈을 오늘 빈사 상태인 우리 언론에 대입할 때 단 1%라도 달라진 게 있는가? 가슴이 아려온다. 그분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