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대구=문해청 기자] 지난 3일 대구광역시 정책간담회(이육사 유가족, 시청 담당자, 재개발지역주택조합, 정당지역위원장, 문화문학계인사, 시민사회단체)를 통하여 남산동 이육사 고택 보존 및 정신계승 사업을 토의했다. 이를 대구시민사회단체와 문화문학단체 및 시민이 집중하고 있다. 대구광역시청 정책간담회가 12월 중 재차 개최할 예정이라 여느 때 보다 시민이 뜨겁게 주목하고 있다.
일제저항 민족시인 자주독립운동가 이육사(1904년~1944년) 시인은 경북 안동 도산면 원촌리 출생했다. 이육사 고택터(중앙대로67길 19-12 / 남산동 662-35)는 1920년(17세)부터 온 가족이 대구 남산동(622번지)에 이사 와서 살았다. 서울로 거처를 옮기는 1937년까지 청년기에 살았던 곳이다. 17년 동안 영천에서 혹은 일본 동경에서 대학생활도 했지만 대구에서 거주한 기간은 결코 짧지 않다.
이육사 시인은 청년기 17세 이후 지금의 중구 약령시 약전골목 석재 서병호 선생의 문하에서 한약점원(노동자)으로 일하며 시(詩) 서(書) 화(畵)를 배웠다. 이후 약령시인근에서 오랫동안 거주했다.
대구 약령시장을 일제가 강탈하려 할 때 약령시를 지키고 일제의 부당함을 알리려는 마음으로 기사와 평론으로 수차례 발표했다. 본명 이원록. ‘이활’ ‘이육사’라는 필명으로 시와 평론을 썼다. 문필활동은 또 다른 자주독립운동이었다. 이런 이유로 대구 중구 약령시 한의약 박물관 3층 역사전시관에는 이육사 시인의 삶을 소개하는 사진벽보를 보존하고 있다.
조선일보에 처음 시를 발표하는 이때만 해도 그는 '이활'이라는 필명을 썼다. 당시 조선일보대구지국 기자생활(1929년~1937년)을 8년 동안 했다. 광주학생운동 후폭풍으로 일어난 대구격문사건 배후로 지목되어 또 옥살이했다. 이 투옥 이후에 그는 스스로를 이육사(264)라 일컫기 시작했다.
대구교도소 수인번호 264에서 이름이 나왔다는 것이 이후 정설이 되었다. 그러나 속내는 여러 번 바뀌었다. 처음에는 역사를 도륙 낸다. 는 뜻의 육사(戮史)를 썼고 다음에는 "고기 먹고 설사한다."라는 뜻의 육사(肉瀉)를 썼다.
이육사 시인께 문학은 부차적인 일이다. 퇴계 이황 가문에서 출생한 15세 이미 흉중(胸中)에 5,000권을 품었다 할 정도로 공부에 자부심이 컸지만 일제식민지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20대에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베이징에서는 중국의 항일투쟁을 목도했다. 그리고 귀국하여 자주민족민중혁명운동에 투신했다.
1927년 ‘대구조선은행폭탄사건’의 장진홍 의거에 연루되어 1년7개월 감옥을 살았다. 다시 중국 난징으로 건너가 조선의용대장 김원봉이 세운 정치 간부학교를 다녔다. 그의 본업은 일제저항 자주독립운동이 되었다.
이육사 시인은 진성 이씨다. 우리나라 유학의 태두이자 일본까지 명성을 떨친 퇴계 이황의 후손이다. 그의 형제는 다섯이었고 육사 외에 문학적 이름을 남긴 이가 넷째 원조다. 원조는 소설 <태백산맥>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강조하는 공산주의문학가로 등장했고 순국한 이육사 시를 모아 유고 시집을 냈다.
1943년 가을, 이육사는 서울에서 일본 헌병대에 체포돼 베이징으로 압송됐다. 그리고 둥창후퉁의 햇볕 없는 지하 감옥에서 고문과 취조의 압살로 이듬해 1월16일 옥사했다.
경북 안동에서 출생하여 민족민중의 슬픔과 조국광복을 염원했던 시인 이육사를 기리는 이육사문학관이 고향에 설립 된 것은 2004년이다.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소박하게 지어진 문학관 뒷산에 묘소도 있다. 이육사 생가 옆에는 이육사 시비 동산도 만들어져 있다.<다음 인용 / 한국문학의 탐험2>
이제 사 대구에서는 일제저항 민족시인 독립운동가 이육사(본명 이원록) 시인의 청년기(1920~1937)를 17년 살았던 대구의 이육사 고택이 그 당시 초가로 복원이 될 전망이다.
대구광역시청은 지난 3일 정책간담회를 통하여 이육사 시인 고택의 역사문화제에 대한 중요성을 인정했다. 지금의 낡은 한옥을 허물고 이육사 시인이 청년기 살던 초가로 복원한다. 복원할 고택터는 지금의 고택 인근(?)에 한옥을 건축하고 이육사 시인의 역사 문학적 유품을 설치해서 대구 중구 골목투어 ‘근대로의 여행’ 5코스에 연계할 방침이다.
이육사 시인의 역사문화제 중요성에 대한 지난 언론활동을 보면 영남일보 박진관 기자가 경북대 국문학과 박현수 교수, ‘시간과 공간’ 권상구 이사 등의 도움 받아 항일시인 ‘육사의 집은 이곳에 있었다.’(2015년 4월17일)를 처음 보도했다. 이후 ‘철거위기 이육사 고택(2015.12.10.)’ ‘이육사 대구집 결국 철거수순(2018.10.16.)’ 등으로 문제를 계속 제기했다. <박진관 기자 인용>
지난 10월 13일 고경하 시인은 대구지역시민단체 ‘역사문화진흥원’이 주최하는 대구역사문화탐방에 참가했다가 이육사 시인 고택이 철거를 목격했다. 이날 오후 고경하 시인은 역사문화탐방을 중단하고 곧장 이육사 시인 고택터 역사문화제 보존을 위한 1인 시위를 했다. 이후 매 주 3~4회 계속했고 이런 사실은 중앙언론통신사 뉴스프리존에 4차례 기사로 올라갔다.
대구광역시청, 중구청은 지난 기간 동안 이육사 고택을 역사 문화적 보존가치가 없다고 했고 재개발업체가 고택을 절반 철거했다. 이후 대구광역시청, 중구청이 방관할 때 MBC대구방송, 지역 언론, 중앙언론, 시민의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다.
최근 고경하 시인은 12월 겨울 매서운 바람에도 불구하고 1인 시위를 계속하는 것에 대한 입장을 들어봤다. 그는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내가 먼저 실천하고 싶었다.” “이육사 시인 고택이 역사문학관으로 설립 되면 우리역사와 문화문학을 알리는 지킴이로 봉사하고 싶다.” 고 한결 같은 담담한 소회를 밝혔다.
이제 대구광역시청, 중구청이 그때와는 다른 이육사 고택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화 된 모습이다. 하지만 이육사 고택의 원래 고택터에 작은 역사문학관 설립을 보장하지 않는 인근(?)에 초가를 짓는 편법행정을 집행할 수 있음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이육사 시인의 고택(중앙대로67길 19-12 / 남산동 662-35번지)는 아파트재개발지역으로 묶여있다. 이육사 시인의 고택터 보존을 위해 대구광역시청, 중구청, 재개발지역주택조합은 예정 된 아파트건축설계를 통해 원래 고택터를 보장해야 한다. 이육사 시인의 역사문화제를 보존하고 공공의 이익에 복무하는 도시재개발설계로 집행 되어야 한다.
대구광역시청, 중구청이 적당하게 이육사 시인 고택의 인근(?)에 형식적 초가로 복원하는 집행은 안 된다. 이는 타 지역 대구 중구 골목투어 관광객과 시민과 청소년을 기만하는 것이다. 이육사 시인의 고택터를 덮어서 아파트를 짓고 이육사 시인의 고택터 인근(?)에다 초가로 복원한다는 발상은 진정성이 없다.
가령 고택터 인근(?)에 지은 초가를 이육사 시인의 정신과 영혼이 머무른 청년기 살던 고택이라고 할 수 없다. 이를 대구 중구 골목투어 관광객이나 시민과 청소년에게 역사문화제 해설사가 엉터리로 소개한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원래 이육사 시인의 청년기 고택터를 대구광역시청, 중구청이 시립공원(공유지)로 설립해야 한다. 특히 상업적 사적영리추구를 경계하고 공공의 이익과 역사문화제 보존에 복무하는 공정한 행정을 집행해야 한다.
대구 이육사 시인 청년기 살았던 고택터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하여 고경하 시인은 1인 시위를 지난 10월 13일부터 61일(12월 12일)째 하고 있다. 영남권에서 경북 안동은 이육사 문학축전을 39회, 전국육사백일장, 13회 전국육사시낭송대회를 개최했다. 영남권 대구경북에서 이육사 시인에 대한 존재를 공정한 행정집행을 통해 일제저항 민족시인 자주독립정신 역사문화계승을 실현해야 한다.
초가 복원은 1950년대 벽돌집이 개축돼 이육사가 살았던 당시 모습과는 다르다. 그러나 아파트 사유지공간에 ‘이육사 공원’을 건립은 적절하지 않다. 시립공원이란 공유지에 이육사 시인의 일제저항 민족시인 자주독립운동의 삶을 돌아 볼 수 있는 다양한 자료를 준비해야 한다. 이럴 때만이 대구 중구 골목투어 ‘근대로의 여행’은 타 지역 관광객과 시민과 청소년에게 올곧게 공감할 수 있다.
현재 남산동 재개발주택조합과 적당한 협의로 주상복합 30층 아파트 상가에 사적 영리추구용 이육사 시인의 역사문학관 초가 복원은 문제가 많다. 이육사 대구 고택터 소유권은 반월당 지역주택조합에 있다고 하지만 대구광역시청, 중구청이 다시 매입해서 대구시민의 공공이익을 위한 시립공원(공유지)로 초가 복원을 역사문학관으로 정의로운 행정을 집행해야 한다.
대구광역시청 담당자는 “이육사 집터가 재건축사업의 한가운데 있어 공원 조성에 어려움이 있다” “대구 중구 골목투어 ‘근대로의 여행’ 5코스와 연계하는 고증작업을 통해 이육사 거주 당시 형태로 재현하고 관련 콘텐츠를 전시하는 방안을 고려한다.” 고 했다.
한편 시청의 부실한 입장에 대구광역시의회 김동식 시의원(더불어 민주당 / 수성구2)은 일제저항 민족시인 자주독립운동가 이육사 옛집(터)을 매입해 보존하자고 강력하게 제안했다.
김동식 시의원은 지난달 26일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심사에서 “대구광역시의 한옥지원금이 매년 제대로 집행되지 않고 이월되고 있다. 이에 관련 예산을 활용해 이육사 시인 옛집을 매입해서 역사문화제를 보존하는 방안을 검토하자”고 밝혔다.
우리 시민의 역사문화를 위해 민족시인 독립운동가 이육사 시인의 역사문학관 설립과 대구 이육사 문학축제는 시민사회문화단체가 적극 참여해야 한다. 대구광역시청, 중구청이 문화진흥기금 등 예산집행을 비영리단체 우선지원원칙으로 행정을 집행해야 한다.
일제저항 민족시인 이육사 시인의 참여시와 자주독립운동과 다르게 그동안 경북 안동 이육사 문학축전을 모더니즘문학의 한국문인협회 안동지부가 주최하고 대구 이상화 문학제도 한국문인협회 대구지부가 주최하고 있다.
이번 이육사 시인의 고택철거사건을 계기로 참여시 성향의 한국작가회의대경지회와 참여예술의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및 대구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가 대구광역시청 정책간담회에 참석해야 한다.
앞으로 대구 이육사 시인 고택터 보존 초가 복원 역사문학관 설립과 대구 이육사 문학축제를 위해야 한다. 이에 한국작가회의대경지회,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를 중심으로 ‘문화분권’(대표 김용락 /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원장)이 연대하고 ‘전태일기념사업회’(전태일생가)와 연계해서 대구 중구 골목투어 ‘근대로의 여행’ 5코스에 포함한 정신문화 계승과 보존이 되어야 한다.
또한 대구시민사회단체와 각 정당위원회까지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모아 역사문화제를 보존하고 이육사 시인의 정신을 계승해야한다. 대구에서 청년기 살았던 이육사 고택터를 역사문학관으로 지자체(대구광역시청, 중구청)가 대구 중구 골목투어 역사문화제 ‘중구의 문화제 현황’ 29개에 추가로 공인해야 한다.
대구 남구 앞산에 몇 년 머물다가 떠난 왕건의 이미지가 지자체(남구청)가 공인하고 앞산순환로 충혼탑 지하도 벽화 등으로 공인 된 역사기념 문화관광이미지를 타 지역 관광객, 시민구민에게 공보하고 있다. 이제 이육사 시인의 역사문학관 설립과 문학축제를 통해 타 지역 관광객을 대구 중구 골목투어 ‘근대로의 여행’ 5코스로 찾아 올 수 있는 진중한 행정을 집행해야 한다.
더불어 민주당 북구 갑 지역위원회(위원장 이헌태)는 대구의 자랑 일제저항 민족시인 독립운동가 이육사 시인의 정신계승으로 대구의 저항정신과 자존심을 알리는 방향으로 가야한다. “미래 세대의 청소년교육과 시민교육의 산실로 이육사 시인의 역사문학관이 설립을 바란다. 주상복합아파트로 고택 인근(?)에 초가 복원하지 말고 현재 고택터 원래자리에 건축해야 한다.” 고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