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대구=문해청 기자] 송필경 위원장은 최근 쿠바 혁명연구를 위해 기행을 다녀왔다. 과거 베트남을 다녀와서 왜? 호찌민인가? 베트남의 진실이 위기의 한반도에 묻는다.(에녹스 2013)를 출간했었다. 그는 18일 경북대 북문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새벗도서관에서 왜? 체게바라인가? 쿠바 혁명을 강의했다.
2016년 겨울부터 2017년 5월 9일 대선 때까지 저항의 촛불민중혁명은 계속 되었고 민주3기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교육적폐 교육농단 사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이에 송필경 치과원장은 경북대 총장임용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구시민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새롭게 불의에 투쟁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강의를 시작하며 열정 청년 송필경 위원장을 소개하며 쿠바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사회주의 베트남과 쿠바의 가장 큰 공통점을 통하여 쿠바가 미국제국주의 경제 통제를 이겨내고 승리했던 경험을 강의했다.
베트남과 쿠바의 공통점은 제국주의와 한 판 싸움에서 승리한 경험이다. 이번에 쿠바에 대해 공부하고 보니 독특한 혁명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 쿠바만 유일하게 라틴아메리카에서 승리했을까? 그건 베트남의 역사처럼 나름의 아주 탄탄한 혁명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베트남과의 공통점은 확고한 정신적 지도자, 정치적 지도자가 있다는 점이다. 보통 쿠바하면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를 떠올리는 데 실제로 쿠바인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19세기의 위대한 인물인 호세 마르티다.
쿠바의 카스트로체제는 49년 동안 독재를 했지만 카스트로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체 게바라를 내세웠다는 것이 모범이다. 쿠바에 가보니 체 게바라 사진이 카스트로보다 10배 정도 많다. 카스트로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우상화하지 않았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낮은 자세로 권력을 행사했다.
베트남은 모든 기준이 호찌민 아저씨다. 베트남은 모든 것이 호찌민으로 귀결하고 호찌민을 내세운다. 그 점이 쿠바와 다르지만 그렇다고 호찌민도 스스로 본인을 내세우진 않았다.
우리는 정신적 지주라고 할 만한 인물이 있는가? 서울 광화문에 가면 세종대왕이나 충무공 이순신이 고작이다. 남북한을 통틀어 생각해도 오십보백보이다. 북한은 당연히 김일성부터 시작하지만 그 윗세대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나마 남북한이 공통적 존경하는 사람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라 한다.
우리의 일상적 정신에 들어와 있지 않으니까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라고 부르기 어렵다. 정신적 지주가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우상화하는 민족은 이들 나라와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한 사회에 대다수가 합의할 수 있는 영웅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고 그 사회 집단의 역사적 성과라 볼 수 있다. 엄중하게 말하면 영웅이라기보다 정신적 지주다. 베트남에서 영웅시 되고 우상화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정신적 지주, 존경의 대상이 필요한 시대다.
송 위원장은 한 사회에서 한 인물을 부각시키거나 부각되고 있는 것이 갖는 단점은 없는지? 밝혔다. 베트남에서 양심적 지식인이 그걸 많이 지적한다. 호찌민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생기면 호찌민 뒤로 숨거나 호찌민을 이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다.
일본제국주의 천황제 향수에 빠진 것과 비슷하다. 반역사적 극우적 전쟁주의 일본 정당정치가 발전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국민이 반발하거나 불리하면 천황을 내세우고 그 뒤로 숨는다. 천황제는 세습권력이다. 호찌민 아저씨는 자연적 형성된 권력이고 호찌민을 앞세우고 그 뒤로 정치인이 숨는 게 문제다.
쿠바는 미국과 대립관계로 소련의 도움을 받아 사회주의 혁명의 기초를 마련했다. 인간다운 삶의 조건에서 의식주 다음으로 중요한 게 교육과 의료다. 국가에서 책임지고 교육과 건강을 책임지는 무상교육 무상의료를 집행했다. 쿠바는 유기농사법을 개발하고 국민적 결속력으로 실행하여 무상교육 무상의료를 이루었다.
베트남은 전쟁 승리 후 소련하고 협력이 원활하지 못했다. 중국하고 원수 관계가 됐다. 90년대까지 미국에게 철저하게 경제봉쇄를 당했다. 80년대 말에 도이모이 정책을 시행하자 타락한 자본이 들어와서 국가가 뭔가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현재 의료는 말할 것도 없고 교육도 보장이 안 된다.
송 위원장은 베트남 관련 책을 세 권이나 섰다. 『제국주의 야만에 저항한 베트남 전쟁』 『지난밤 나는 평화를 꿈꾸었네』는 베트남 진료단 멤버들에게 자료로 나눠줄 목적이 있어 쉽게 빨리 썼다. 『왜 호치민인가』는 10년 걸렸다. 처음에 멋도 모르고 쓴 책이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읽기에는 좋다고 한다.
송 위원장은 최근 관심이 베트남에서 쿠바로 옮겨 간 이유를 밝혔다. 결국은 2가지인데, 쿠바는 적어도 GDP 3만 불인 우리나라도 해결 못하고 있는 의료와 교육 문제를 해결했다. 예를 들면 쿠바는 임신을 하면 상담해서 낳을 것이냐 묻고 기본 진료하고 필요하면 상급 병원으로 옮기고 모든 것이 무료다.
교육과 의료가 다 무료다. 내가 손녀를 보고 나니 감성적인 것이 생겼다. 우리 교육과 의료의 문제를 볼 때마다 손녀 얼굴이 떠오른다. 우리도 미래 세대를 위해 쿠바에게 배워서라도 꼭 해결해야 할 과제다. 쿠바를 공부하고 이론적으로 정리하고 글을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송 위원장은 쿠바 혁명의 책을 쓰기 위해 도서관을 이용하고 쿠바 관련 책 40권 정도를 샀다. 일본인 농업전문가가 쿠바에 생태농업 공부하러 갔다가 의료와 교육을 보고 감명 받아 쓴 책도 있다. 『교육천국 쿠바를 가다』, 『의료천국 쿠바를 가다』등 시리즈로 있다.
전교조나 인의협이 아직까지는 멀었다고 본다. 교육운동 의료운동 한다는 우리가 얼마나 이론이나 지식이 얕으냐는 것이다. 전교조가 지금까지 거의 30년 싸워오면서 감동을 주는 책을 한 권이라도 냈느냐? 인의협도 마찬가지다. 전문인만 읽을 수 있는 글이나 책만 냈다. 나도 소화하기 힘든 이야기다.
전교조나 인의협이라면 쿠바가 이룬 의료와 교육에 대한 성과의 우리나라 버전 정도는 책으로 만들어 내야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책 보면 “아! 우리도 하고 싶다. 이런 교육(의료)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나도록 말이다.
송 위원장은 베트남과 쿠바와 대립 되는 미국의 제국주의를 언급했다. 미국의 좋은 점 많다. 역사적으로 제국주의가 가장 발달한 모습이다. 그걸 견제할 양심적 세력, 다시 말해 뉴욕타임스(?) 같은 언론, 하워드 진, 노암 촘스키 같은 진보적인 지식인이 건재한 나라가 미국이다. 우리가 제대로 갖지 못한 정말 부러운 부분이다.
미 라이 학살, 관타나모 형무소에서 고문 그리고 CIA의 죄악 같은 폭로를 수많은 미국 지식인이 하고 있다. 다른 나라에 비해 미국이 독보적이다. 자기반성이 가능한 것, 미국 수정 헌법 1조 표현의 자유, 독립적 사법권 등은 우리가 소중하게 배워야 한다. 미국 지성이 인류에 남긴 어마어마한 유산이다.
한편 송 위원장은 베트남과 쿠바의 문제점으로 베트남은 역사를 보니 원래 평소에는 이기적이고 좀 얍삽하고 그렇다. 국가적 위기가 닥치면 단결하고 수많은 영웅이 탄생했다. 지금 베트남은 부패, 부조리가 만연하다.
베트남의 양심적 지식인은 우리가 이러려고 청춘을 받쳐 혁명을 했냐고 자조한다. 자본이 들어오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부분이 아쉽다.
쿠바는 인간의 행복을 어디까지로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준다. 교육비 의료비는 안 들지만 물자는 계속 부족하다. 생필품 사려면 몇 시간이고 기다려야 한다. 미국과 가깝고 친척도 많이 사니까 자본주의의 유혹에 흔들리는 것도 있다.
공공의 교육, 의료 등 지금 누리는 게 다른 나라에선 누릴 수 없는 행복이라는 걸 못 깨닫는 게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다.
송 위원장은 혁명의 시대에 대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새로운 방식에 대하여 소신을 밝혔다. 우리나라도 위대한 혁명을 3번 했다. 4. 19, 6. 10, 촛불시민항쟁, 30년 주기마다 혁명을 했다. 문제는 혁명 주체가 정권을 잡지 못했다는 점이다.
프랑스 역사가 혁명의 속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를 보면 박애를 강조한 대혁명을 하고나서도 19세기 중반 베트남에 쳐들어간다. 혁명 정신과 정반대인 식민지 정책을 폈다. 1954년 베트남에서 패배한 후 그 패배한 군대가 바로 알제리로 갔다. 반성을 전혀 하지 않았다.
1968혁명은 미국의 힘에 저항한 베트남전쟁에서 영감을 얻어 프랑스에서 불붙었다. 1968혁명은 성평등까지 요구하며 모든 권위에 도전했다. 이렇게 1968혁명 겪고 난 뒤 1970년대 들어 프랑스가 비로소 반성한다. 1980년대 미테랑이 집권하며 사회주의 정권을 세운다. 그 때서야 톨레랑스(관용) 정신이 나온다.
프랑스에 2006년, 2010년 파리에서 대규모 소요사태가 있었다. 2006년에는 대학 입시제도 변경에 항의해 고등학생들이 거리에 있는 자동차들을 방화하며 폭동 수준으로 시위를 했다. 2010년에는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에 반대하며 파리 시내에 주차한 차를 불태운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정부는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이 아니라 반성하고 정부가 잘못했다, 정부가 정책을 바꾸겠다고 한다. 이런 것이 민주주의다. 이제 우리에게 이런 가능성을 보여 준 게 촛불시민혁명이다. 다수의 민중이 원하면 필연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았지 않은가?
송 위원장은 촛불시민항쟁이 결정적이었지만 국회 탄핵 의결, 헌재 판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했다. 이번에 적폐제도에 있는 타락한 사람 다 보지 않았나? 촛불시민혁명을 경과하면서 보니까 사법부가 더 음흉한 놈이었다. 일반 법관부터 대법관까지.
검찰은 어느 정도 보이게 했지만 뒷구멍에서 법원은 음흉하게 숨어서 나쁜 짓을 했다. 보이지 않는 건 고치기 더 힘들다. 그게 드러난 것이 촛불의 저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촛불시민혁명의 주체가 집권해야 모두 적폐가 개혁이 가능하고 제대로 변혁이 되는데 현재 우리의 한계라고 속내를 밝혔다.
송 위원장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세상을 변혁해야 한다는 인생관을 만든 계기를 밝혔다. 아버지를 통해 사회 부정을 일찍 접했다. 아버지가 교직에 있었고 형제는 많다보니 집안 형편은 늘 어려웠는데 경북 교육청의 인사권을 쥐게 되자마자 수많은 선생들이 돈을 들고 왔다.
1970년대 공무원 중에 가장 막강한 게 인사권이다. 아버지가 그 자리에 들어가자마자 우리 집을 괴롭히던 빚쟁이가 사라지고 갑자기 부자가 됐다. 당시 집 한 채 200만원 할 땐데 6개월 만에 3천만 원이 뇌물로 들어왔다.
서울까지 유학 가서 연세대로 갈 수 있었다. 재수해서 75학번인데 재수하면서부터 서울 합정동 전셋집에서 살았다. 그 시절 방 세 개에 가스레인지를 놓고 살았다. 내가 누린 부를 보면서 이 사회에 부정이 만연하다는 것을 알았다.
내 생애에 또 하나 충격을 준 사건은 형이 멋도 모르고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것이다. 같이 간 900명 중 자기 혼자 대학생이었다. 좀 고지식한 사람인데 뇌물 10불만 주면 통역관 같은 비전투병으로 갈 수 있는데 전투병으로 갔다. 베트남에 함께 참전한 형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와서 베트남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미국에서 항생제가 엄청 들어오는데 부상병에게도 돈 안주면 약을 안주고, 여러 고가 약을 베트남에서 빼와서 국내 일반 병원에 팔았다. 미국이 전비를 10배 100배 더 써도 베트남을 못이길 것이라는 얘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베트남전쟁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시각이 생겼다. 그 당시에 일반적이던 반공 편견을 깬 계기가 됐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나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으면서 도 나는 남들보다 감동하지 않았고 오히려 시시해 보이기까지 했다. 실전에 참전한 형 이야기의 10분의 1도 못 미쳤다. 대학생의 눈으로 직접 베트남전을 본 형의 경험이 더 와 닿았다. 한참 더 지나서 리영희 선생의 탁월함과 그 책들의 진가를 알았다.
1975년 학교에 입학했을 때 데모를 해도 낭만이 있었다. 데모하면 교수가 수업에 안 나오기도 하고, 어떤 교수는 백양로 뒤에서 우리를 보고 있거나 데모를 방임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연세대는 기독교 개론이 교양 필수 과목이었다. 담당은 서남동 교수였다. 해방신학계통의 신학자로 우리나라 민중 신학의 개척자였다. 수업시간 5교시 점심에 막걸리 한 잔하고 오면 출석도 안 부르니 그냥 엎드려 자고 한 달쯤 지났다.
봄날, 4월 20일 경 곤하게 자는 데 서남동 교수님이 칠판을 꽝 때렸다. 깜짝 놀라 깨서 보니까 ‘희망’이란 두 글자가 칠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볼트만 교수(독일의 진보신학자)가 오는데 교내 게시판 곳곳에 강연 소식을 붙였다. 2시간 뒤 형사가 나를 찾아왔다. 떼라고. 아니 이럴 수가 있느냐” 분노를 내뱉으셨다.
“우리는 희망이 있기에 투쟁을 합니다.” 사자후를 남기고 교실 문은 나선 서남동 교수님을 학교에서 다시 볼 수 없었다. 그 뒤 4월 30일에 베트남이 통일되고 박정희는 이를 핑계로 5월 13일에 긴급조치 9호라는 극악한 조치를 발동했다.
서남동 교수는 그 때 해직당하고 1976년 3. 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구속당했다. 당시 “희망이 있기에 투쟁을 한다.”는 그 말의 의미를 몰랐다. 나중에 본 훼퍼 목사를 읽고 이해했다. 히틀러에 저항하다 감옥에서 죽은 그가 희망의 신학을 만들었고 이것이 남미로 가서 해방신학이 되고 서남동교수는 민중신학자가 되었다.
긴급조치 9호 이후 휴교했다가 복교하니 학교를 백골단(일명 사복조 전투경찰)이 점령해서 데모를 원천 봉쇄 했다. 요약하면 고교 시절 관행적 사회부정을 본 것, 실전에 참전한 형에게 베트남전쟁 생생한 진실을 들은 것, 대학교 1학년 서남동 교수의 칠판을 꽝 때리는 울림이 지금까지 나의 존재를 규정한 강한 기억이다.
본과 2학년 때 김영환 선배가 학생운동으로 제적당했다가 복학했다. 화려한 운동 경력에 말 잘하고 외모도 호감이 있어 많은 사람이 따랐다. 지금은 완전 변했지만 그때는 연대 운동권에서 스타 중에 스타였다. 복학한 그 선배와 실습실 맞은편 자리에 마주 앉아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날 미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며 나에게 반미사상을 주입했다. 다시 말해 의식화 작업을 시도한 것이고 당시에는 많은 영향을 받았다. 연대 치과대학 문학반이라는 서클에는 김진 선생, 권호근 선생 등 있었고, 존스홉킨스 대학의 사회주의 성향의 예방의학자인 빈센트 나바로의 『병원이 병을 만든다』 같은 책을 같이 읽고 토론했다.
전영찬 같은 친구는 페다고지나 모리스 돕과 폴 스위지의 『자본주의 이행논쟁』 같은 책도 봤다. 그러나 볼테르나 맑스 베버, 톨스토이 등에 더 관심이 갔다. 그러다가 1980년에 광주가 터졌다. 한번 낙제하고 본과 3년이었다. 5월 24일로 기억하는데 광주에서 문건이 왔다. 같이 학생운동하는 동료와 보는 데 섬짓했다. 처음 군부에 대해 진한 공포를 느꼈다.
송 위원장은 서울의 봄 이후 휴교하다가 전두환 대통령 취임하며 2학기가 시작했다. 며칠 지나서 점심시간에 학생회관에 모였다. 12시 여학생이 학생회관 식당에서 전단을 뿌릴 때 안 잡히게 보디가드 역할을 했다. 전영찬 등 5명, 치대 3명, 타 학과 2명이 주동했다. 도서관 본관 2층 창문을 깨고 “살인마 전두환을 죽여라” 현수막을 걸었다. 그때 나는 전단을 뿌린 여학생 팔짱을 끼고 같이 도망 나왔다.
도서관에서 시위한 친구는 다 잡혀서 감옥에 갔고 2년 살았다. 안타깝게도 주동했던 5명 중 전영찬 빼고는 나중에 다 뉴라이트 극우로 다른 길을 걸었다. 이럴 수가 있을까? 난 그 이후로 의식화 관련 책들을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1981년도에 졸업하고 바로 군에 갔다가 1985년에 대구에서 개업했다. 개업하고 결혼하고 애도 놓고 돈도 잘 벌고 평생 그렇게 잘 살 줄 알았다. 1987년 4월 말에 누가 보자해서 다방에 나갔다. 두꺼운 안경을 쓴 서울대 이재용 선배였다. 서울에서 대구 출신 치대생 모임하면 서울대 연대 경희대가 모였는데 여기서 이재용 선배를 만났다.
1973학번 경북고등학교 1년 선배인 이재용 선배가 보자마자 “호헌철페 운동” 하자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감옥에 갔던 친구였다. 그 부채의식 때문에 제안을 수락했다. 많은 치과의사가 “호헌철폐” “직선제 개헌” 운동을 했지만 서슬 퍼런 전두환 군사정부에서 조마조마했다. 6‧ 10항쟁이 터지며 상황이 싹 달라졌다.
이때부터 이재용 선배와 함께 대구에서 열심히 조직도 만들고 사회 문제에 대한 학습도 했다. 연세민주치과의사회를 청년치과의사회와 통합해 지금의 건치를 만들 때도 제일 앞장섰다. 대구에서 대표적인 재야단체로 전교조, 전농 등 7전이 있었는데 내가 이들과 연대 사업을 담당했다.
나중에 이재용 선배가 정계 진출(대구 남구청장, 의료보험관리공단이사장, 환경부장관)한 이후 환경운동연합 등 그가 하던 사회활동을 거의 다 받아 했다. 밥값 술값으로 돈도 많이 썼고 나중에는 감당이 어려워 빚내 큰 식당을 차렸는데 IMF 터지고 고스란히 수억 빚만 졌다.
평생 친구로 지내는 대구의 활동가 함종호도 만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끈질기게 다루어 혁혁한 성과를 낸 최봉태 변호사도 만났다. 최 변호사는 나를 베트남 참전을 사과해야 한다는 문제에 집중하게 하는 큰 자극제가 돼 주었다.
송 위원장은 산전수전공중전까지 겪으며 인생의 좌우명은 착하게 살자. 8만대장경을 3마디로 압축하면 바른 생각을 하고 악한 생각을 버리고 착하게 살자 인생에는 그 이상은 없다. 고 했다.
송 위원장은 취미로 진실을 기록사진촬영을 즐겼고 글을 쓸 때 도움이 많이 된다고 했다. 자신이 찍은 사진이 베트남 다낭 전쟁박물관에 걸려있다. 베트남 진료단과 참전군인 김영만씨가 포로 학살현장을 찾아 사죄한 사진과 2014년 이정우 교수와 빈호아 학살현장 무덤에서 무릎 꿇어 사죄하는 사진 2장이다.
송 위원장은 사회주의 베트남 호찌민 정신과 사회주의 쿠바 체게바라 정신을 가슴에 품고 자기 걸음이 마지막 갈 곳을 전태일 정신으로 쇄기를 박았다. 세계혁명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 베트남과 쿠바에 가서 혁명의 시야를 넓혔다.
결국 우리나라는 정신적 지주가 없다고 하지만 우리 세대는 전태일(대구 중구 남산동)이 있다. 그리고 전태일 정신을 기록해서 알린 조영래 변호사(대구 중구 대봉동)가 있다. 전태일이 대학생 친구를 그렇게 찾았지만 죽은 후에야 조영래 변호사(전태일 평전 저자)가 전태일을 친구로 찾은 것이다.
송 위원장은 한반도 평화와 우리나라 사회변혁운동은 언제나 청년노동자 전태일 열사, 조영래 변호사에게 돌아가야 한다. 사회주의 베트남 사회주의 쿠바 혁명 전문 연구가는 아니다. 나름대로 혁명의 역사를 정리하고 전태일 열사, 조영래 변호사에게 집중하고 싶다. 하고 담담한 소회를 밝히며 진중한 강의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