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이 오랜만에 모인 자리에서 정치 얘기를 꺼내는 것은 일종의 금기를 위반하는 것과 같다.
화기애애한 만남이 순식간에 갈등과 비난, 그리고 원망과 증오의 도가니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얼굴을 대면하지 않는 인터넷 상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소설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표현되는 정치적 발언의 효과는 친구나 지인들의 인상을 송두리째 바꿀만큼 강렬하다.
실제로 지난 대선 직후 많은 SNS 이용자들이 정치적 갈등으로 인한 감정적 피로감을 호소하기도 했다.
심리학자 타이펠의 실험
대체 정치가 무엇이기에 가족이나 오랜 친구 사이도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일까? 왜 서로의 차이가 이렇게나 큰 것일까?
한국 사람들이 유별나게 정치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라거나, 정치에 관심을 끊으면 갈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다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심리학자 타이펠(H. Tajfel)은 다음과 같은 실험을 수행했다.
서로 전혀 모르는 실험참가자들을 유명화가인 클레(P. Klee)와 칸딘스키(W. Kandinsky)의 작품에 대한 선호도에 따라 두 집단으로 나눈 후에 보상(rewards)을 배분하는 과제를 부과했다.
결과는? 완전히 낯선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참가자들은 자신과 다른 집단보다 같은 집단에 속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보상을 배분했다.
취향이 같은 사람들이라면 어딘가 서로 유사해서 (서로 닮았다거나 헤어스타일이 비슷하거나)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예상하겠지만, 사실 실험 집단은 피험자들 모르게 ‘무작위로’ 나뉘어졌다. 따라서 집단 구성원간 유사성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음 빈칸을 ‘우리’와 ‘그들’로 채워보자.
______ 은(는) 탐욕스럽다.
______ 은(는) 무식하다.
______ 은(는) 게으르다.
______ 은(는) 근시안적이다.
______ 은(는) 신뢰할 수 없다.
아마도 ‘우리’를 채우는 것이 ‘그들’을 채우는 것보다 시간이 더디게 걸릴 것이다.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겠지만, 당신이 단어를 채우는 속도를 천분의 일초(millisecond) 단위로 정밀하게 측정한다면 결과는 분명 그러할 것이다.
마음 속 암묵적 연계 (implicit association)에 대한 연구를 보면 무작위로 나뉘어진 집단의 경우에도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내집단(in-group)과 긍정적 단어를, 외집단(out-group)과 부정적 단어를 더 빠르게 연결했다.
심리적 편향이 마음 속에 자리잡는 ‘속도’에 주목하자. 미처 의식하지도 못할 만큼 짧은 순간에 무의식 속에서는 ‘우리’와 ‘그들’이 나뉘어지고, 적개심과 증오의 씨앗이 뿌려지는 것이다.
편견, 우리의 자연스러운 일부
물론 심리적 편향을 무조건 나쁘게만 볼 수는 없다. 복잡한 세상을 모두 있는 그대로 인식해야 한다면 우리 두뇌는 밀려드는 정보로 인해 납작하게 찌그러질지도 모른다.
가능한 한 세상을 단순화하고 덩어리로 구분해야 이해하고 설명하기 쉬워지며, 편향은 이러한 연유로 발생한다.
‘우리’와 ‘적’을 구분하고, ‘안전’과 ‘위험’을 구분하는 것은 유기체의 생존에 필수적이므로 심리적 편향은 인류의 진화와 생존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나이와 성별, 지연과 학연, 우리는 집단을 형성하고 안과 밖을 구분하는 데에 능숙하다.
어디를 가도 비슷한 연령대의 남성이나 여성이 무리지어 몰려있는 광경을 접할 수 있다.
조금만 나이 차이가 나도 사람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일면식도 없는데도 같은 지역이나 학교 출신이라면 더 편하고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직원을 뽑거나 거래처를 결정할 때도, 심지어는 선호할 정당을 결정할 때도 나와 유사한 어떤 것이라도 있다면 붙잡고 만다.
지내기 편하고 유사한 사람들을 찾고 함께 하려고 하는 것은 인지상정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문제는 역사에 기록된 수많은 집단적 증오와 폭력이 실상은 클레와 칸딘스키 그림 선호도와 같은 사소한 차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차이는 미디어를 통해서 부풀려지며 사람들의 마음 속에 확고히 자리잡는다. 정치인들은 365일 내내 다투고 대립하는 것처럼 비춰진다.
안으로 굽는 인간의 마음
미디어는 사소한 편향을 확대하고 고착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한다.
정치적 보수와 진보, 남성과 여성, 부자와 가난한 자, 어른과 아이, 키 큰 사람과 작은 사람, 뚱뚱한 사람과 마른 사람,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 소재는 실로 무궁무진하다.
차이는 미디어를 통해서 부풀려지며 사람들의 마음 속에 확고히 자리잡는다.
정치인들은 365일 내내 다투고 대립하는 것처럼 (물론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비춰지며 대화와 타협의 여지는 전혀 없어 보인다. 차이를 부각하고 전형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미디어의 문법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을 종종 한다. 뼈의 구조상 팔이 밖으로 굽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인간의 마음이 밖으로 향하지 못하게 하는 불가항력의 존재를 적절히 표현한 말이다.
안과 밖을 나누는 무의식적 편향은 어느새 단단한 골격을 만들어 생각이 움직이는 공간을 제약한다.
편향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겠지만 스스로 자라고 두꺼워지는 생각의 뼈 속에 갇히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편견이 자리잡는 속도를 늦추고 생각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 지금 우리와 저들을 나누는 도저히 건널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강이 실상은 아주 작은 물줄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
세대 간의 불편도 결국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이름표 때문일 뿐 무작위 구분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미디어가 보여주는 다양한 이름표들 간의 차이와 경쟁도 온전한 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르지만 서로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다르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