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어가 ‘유창한 것’과 ‘능통한 것’은 엄연히 달라
우리가 영어를 잘 한다는 것을 표현할 때는 ‘유창하다’와 ‘능통하다’라는 말을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그런데 냉정하게 말해 '유창한 것‘(fluency)과 '능통한 것’(proficiency)에는 차이가 있다. 우선 유창하다는 말은 메시지를 빠르고 능숙하게 전달할 수 있는 발화자(發話者)의 자질을 일컫는다.
유창하다고 할 때는 말을 흩트리지 않고, 매끄럽고, 원활하고, 자연스럽게 물이 흐르듯 하는 것을 지칭한다. 말을 버벅거리거나 더듬거리며 우왕좌왕하게 되면 유창하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이 말은 일반적으로 모국어가 아닌 새롭게 배운 언어나 외국어인 경우에만 적용된다.
그래서 모국어를 쓰는 사람더러 ‘유창하게 말한다’고는 하지 않는다. 즉 한국어를 쓰는 한국인에게도, 영어를 쓰는 미국인에게도 자기나라 말을 구사하는데 유창하다는 표현은 적합지 않다. 한국인이 영어를 완벽치 않게 하더라도 그것은 대견하게 생각되지만 미국인이나 영국인이 영어를 더듬거리면 그것은 언어장애라 할 수 있다. 한국어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모국어를 말하는데 ‘지체 현상’(Language delay)이 나타나면 이것은 병적 증세로 의학적인 치료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외국어를 말할 때 나타나는 지체는 학습과정의 자연스런 초기 현상으로 계속 배워나가면 유창한 단계에 이를 수가 있다.
흥미 있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한다.
미국에서 텔레비전 시청이 언어능력 개발을 지체시킨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영.유아들은 건강한 두뇌 성장과 적절한 사회적, 정서적, 인지적 기량을 개발하기 위해 부모나 보육자와 직접적인 교류가 절대 필요하다는 것이다. 혼자 텔레비전을 시청했던 어린이는 부모와 같이 시청했던 아이들에 비하여 8.47배 더 언어 지체가 나타났다.
그래서 <미국소아학회>(The American Academy of Pediatrics)에서는 2세 미만의 아이들은 절대 텔레비전을 보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2세 이상이라도 하루에 좋은 프로그램에 한해 1~2시간을 넘지 못하도록 한다. 또한 부모들은 아이들의 지능과 언어능력 개발에 영향을 주는 텔레비전 시청 대신에 대화 활동을 시킬 것을 권고하고 있다.
○ 젊을수록 ‘말하기’와 ‘듣기’ 능력 달성이 더 쉬워
영어가 유창하다고 해서 반드시 영어가 능통한 것은 아니다. 영어를 잘 하는데 있어 유창성이 필요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닌 것이다. 영어 원어민은 유창하게 말을 하지만 모두 능통하게 한다고 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제대로 교육을 받지 않은 원어민이라면 제한된 어휘력, 부정확한 단어 사용, 그리고 한정된 담화(談話) 기술을 가질 수밖에 없다. 나아가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일 수도 있다. 이런 경우는 사실 유창하다고 말하기도 그렇다.
영어를 능통하게 한다는 관점에서 유창성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포함한다.
- 독해 : 영어로 쓰여진 문장을 쉽게 읽고 이해하는 능력
- 작문 : 영어로 문장을 문어체로 구성할 수 있는 능력
- 청취 : 영어로 담화를 따라가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
- 회화 : 영어로 메시지를 표현해 내어 이해시키는 능력
어느 정도 앞서 말한 부문별 기량들은 각각 별개로 습득될 수 있다. 그래서 영어를 배울 때 위의 네 가지 요소들을 터득하는 수준에 분야별로 차이가 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영어교육이 그동안 독해와 작문 영역에 치중해 왔기 때문에 이제는 청취와 회화에 중심을 두자는 얘기가 나오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언어습득 이론에 에릭 레너버그(Eric Lenneberg)의 ‘결정적 시기 가설’(Critical Period Hypothesis) 이 있다. 그는 『언어의 생물학적 기초』라는 책에서 “언어가 완전하게 발달하기 위해서는 사춘기가 시작되기 전에 언어 습득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가설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수행한바 “어리면 어릴수록 더 좋은 발음을 습득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런 관점을 근거로 영어 조기교육의 당위성이 나올 수도 있겠다. 또한 3학년(8세)부터 시작되는 한국의 초등 영어교육은 발음 지도의 측면에서 볼 때 상당히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다.
○ 외국어는 일찍 접할수록 실력이 좋아져
레너버그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외국어를 배울 때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듣기 능력과 유창하게 말하는 능력을 획득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리고 어릴 때 체계적으로 모국어를 체득하는 과정을 거치고 난 다음에 외국어를 하게 되면 읽기와 쓰기 기량이 훨씬 수월하게 습득될 수 있다.
이 ‘결정적 시기 가설’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한 재미있는 내용들이 있다. 그 중에서 영어의 즐거움과 매력에 흠뻑 빠져 영어를 혼자의 힘으로 습득한 사람들의 입장으로는 일반론적으로 동의하는 대목들이 많다.
존슨과 뉴포트(Johnson, J. S. & Newport, E. L.)가 한국어 그리고 중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46명을 대상으로 외국어를 하는 연령과 학습과 실력 달성에 대한 상관관계를 실험 했다. 그 결과 얻은 결론은, 전체적으로 연령과 실력은 반비례하고 학습자의 나이가 15세 전에는 일찍 이민을 할수록 실력이 늘었다. 그러나 17세 이후부터는 나이가 들어도 그 실력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외국어를 일찍 접할수록 실력이 좋아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하지만 영어를 공부가 아니라 글로벌 세상을 살아가는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 활용한다고 하면 구태여 시기를 논할 필요는 없다. 언제 시작을 하던 간에 영어는 반복 훈련의 연속 과정이기에 딱 잘라 영어 학습의 첩경은 이거다라고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단지 영어를 배워야겠다는 학습 의욕과 동기부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