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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 민족시인 이육사 순국 75주년 추모시민문화제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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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 민족시인 이육사 순국 75주년 추모시민문화제 열다

문해청 기자 입력 2019/01/17 16:05 수정 2019.01.17 18:00
경북, 안동은 정부 국비, 지자체 안동시 지원을 받아 이육사 시인 순국 추념행사를 한다. 한편 대구는 시민이 처음 자발적 참여한 추모시민문화제를 재능기부 및 후원으로 개최했다

독립투사 이육사 시인 순국 75주년 추모시민문화제 / 사진 = 문해청 기자

[뉴스프리존,대구=문해청 기자] 16일은 일제저항 독립투사 민족시인 이육사 선생께서 식민지 조국의 해방을 맞지 못하고 중국 북경(베이징) 지하 감옥에서 순국한지 75주년 되는 날이다. 이육사 시인 순국 75주년 추모시민문화제 제1회 준비위원회 소속 위원은 스스로 추모시민문화제준비로 수고했다하며 대구시민을 향해 선포했다.

식전 행사로 이현주 학생(대구가톨릭대학교 실용음악과)의 아름다운 음성은 이육사의 시(詩) “광야”를 연상하게 했다. 이어서 사회자 박소윤 아나운서는 쌀쌀한 날씨에 이육사 시인의 발자취를 기억하는 역사의 길에 함께하여 감사하다했다.

민족시인 이육사

1부 추념식으로 (1) 독립투사 이육사 시인에 대한 묵념 (2) 이육사 시인의 발자취 낭독(류돈하 역사학자) (3) 이육사 시인 추모 대형그림그리기(대구문화예술혁신포럼 대표 채정균) 

2부 이육사 시인 시(詩) 낭독 (1) “광야” 이해리 시인(공동부위원장, 한국작가회의대경지회 이사) (2) “청포도” 고경하 시인(한국작가회의대경지회 회원, 시민대책위 사무국장) (3) “절정” 김종련 대표(연인무대) (4) “자야곡” 문해청 시인(한국작가회의대경지회 회원) (5) 마무리에 “광야에서” ‘민중가’를 다 함께 노래했다. 

다음은 역사학자 류돈하씨가 이육사 시인의 발자취를 기억하는 글의 낭독 전문이다. 2019년 1월 16일 이육사(264 본명 이원록) 선생 서거 75주기에 즈음하여 엎드려 생각한다. 2018년 11월 4일 나의 고향 경북 안동을 대구시민단체의 기행에 참여하여 다녀왔다.

세 단락으로 이루어진 이 기행의 배경연대는 그야말로 한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것이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을 일대로 진성이씨 문순이공 퇴계 선생과 그의 14대손 민족시인 이육사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보았다. 퇴계도 육사도 이곳이 고향이다. 

무서운 규모가 키워 주었다는 육사의 고백(오행의 계절)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13대조 이준은 봉화현감, 12대조 이영도는 원주목사, 6대조 이구운은 형조참판, 5대조 이정순은 아산현감, 고조부 이휘빈은 통덕랑의 품계이다.

대대로 벼슬을 지낸 조상을 두었다 하여 무서운 규모라 한 것이 아니라 퇴계의 혈통과 그 학문을 이었음을 두고 그리 표현 한 것이다. 조선 최고의 대학자 퇴계는 이기호 발설을 사상의 핵심으로 하는 영남학파(퇴계학파)를 연 시조이다. 

독립투사 이육사 시인 삶의 발자취를 낭독하는 류돈하 역사학자 / 사진 = 문해청 기자

퇴계학은 이육사에게 있어 가학이며 그 학맥을 이은 다른 친척일가도 그 학문의 영향으로 구한말 을미의병으로부터 시작되는 항일독립운동에 나섰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서운 규모 아니겠는가? 

이는 이육사의 친가만이 아니라 경북 구미시 임은동을 고향으로 둔 이육사의 외가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 허은 부인은 13도 창의군 의병대장 왕산 허위 5촌 종질녀이다. 그 3촌 조카딸 허은 부인은 다름 아닌 가문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의 손자며느리이다. 

이러한 무서운 규모에 의해 이육사는 1944년 1월 16일 차디찬 중국 북경 감옥에서 순국 할 때까지 그 지극한 기개를 간직한다. 

이해리 시인 이육사 '광야' 시낭송 / 사진 = 문해청 기자

이육사선생은 17살 되던 1920년에 대구 중구 남산동 662번지로 가족과 함께 이사 와서 약령시장에서 시서화의 대가 석재 서병오 수하에 수학하고 일하며 대구를 누비며 조선일보기자로 의열단 단원으로 활약했다.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켜 2차 대전이 일어나기도 전 1939년 8월 이육사는 “청포도”라는 시를 지었다. 작품 중 “내 고장”은 “우리 조국” “조선”을 뜻하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을 뜻한다.

1943년 이육사는 청포도가 익어가듯 우리민족이 익어서 일본은 곧 끝장 날거라는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예언은 2년 후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으로 실현이 되었으나 이육사 자신은 해방이 되기 직전 1943년 초겨울 일본헌병에 의해 체포되었고 1944년 1월 16일 북경 감옥에서 순국한다. 

대구문화예술혁신포럼 채정균 대표 / 사진 = 문해청 기자

이육사 선생이 갓 불혹의 나이가 되었을 때 조선은 변절하는 시대였다. 조국의 광복이 영영 안 올 줄 알았다는 친일 변절자의 변명이 거짓은 아니다. 최남선 시인, 이광수 소설가, 노천명 시인, 서정주 시인 등 조선의 지식인은 그야말로 욱일승천의 기세를 가진 일본제국주의에 굴복하여 양심과 도덕을 팔았다.

그러나 민족시인 이육사 선생은 그러지 않았다. 41세의 짧은 생애 중 17 번이나 감옥생활을 했던 이육사는 오히려 그들과는 반대로 일본의 패망을 확신한 자주독립운동가이다. 선생의 슬하에는 순국 당시 4살이 된 딸 이옥비 선생 뿐이다.

고경하 시인 이육사 '청포도' 시낭송 / 사진 = 문해청 기자

중국 하남성에 지주라는 크고 우뚝히 솟은 바위가 있다. 황하가 범람하여 그 세찬 물결이 이 지주를 덮쳐도 굳건히 버티었다고 한다. 그래서 서애 류성룡의 친형 겸암 류운룡은 이를 두고 선비의 지극한 기개와 절의에 빗대어 지주중류로 표현하기도 한다. 

무서운 규모에서 자라나 민족정신과 웅혼을 대표하는 민족시인이 된 이육사 선생의 삶이 바로 지주중류가 아니겠는가! 이것으로서 대구. 경북을 포함하여 영남 정신을 논하라면 그 표상으로 삼아도 가하겠다. 라고 이육사 시인의 강단진 삶을 역사의 실사구시로 류돈하 역사학자는 밝혔다. 

문예미학사 대표 김대용 / 사진 = 문해청 기자

다음은 지난 12일 “민주당 e 데이”에서 미발표했던 “독립투사 이육사 시인 순국 75주년 추모시민문화제” 시민의 참가를 위한 문해청 시인 호소문 요약이다. 

자주독립운동가이고 역사학자이신 단재 신채호 선생은 ''발이 가는 곳에 마음이 간다.'' 했다. 독립투사 이육사 시인은 일제 식민지 조국에서 민족과 민중에게 비굴하며 순종하는 친일의 삶이 아니라 치열하고 냉철한 투쟁정신으로 조국에 헌신하며 선도하는 투쟁을 했다. 

2019년은 1919년 3.1독립운동 100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1904년 이육사 시인 탄신 115주년, 1944년 1월 16일 중국 북경(베이징) 지하 감옥에서 순국한지 75주년이다. 대구에서 최초로 독립운동가 민족시인 이육사 선생 순국 75주년 추모시민문화제를 1월 16일 14시 2. 28기념 중앙공원에서 한다. 

김종련 대표(연인무대) 이육사 '절정' 시낭송 / 사진 = 문해청 기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가고 일제저항 독립운동가 삶이 서려 있는 우리 역사유적을 찾아가는 첫 걸음을 이육사 시인으로부터 함께 내딛어 보자. 대구시민 여러분이 건강한 역사의 길을 우리 함께 걸어 갈 것을 동의하면 좋겠다. 

이제 대구에서 우리가 바른 역사의식을 갖고 세상을 바르게 바라보며 독립투사 이육사 시인 추모시민문화제에 참여한다면 건강한 대구지역사회공동체를 함께 만들어가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과거 친일파 자유당정권, 극우반동 군부독재정권 그늘에 묻혔던 독립운동가의 처절한 삶과 고결한 영혼의 자취가 어린 곳을 찾아내야 한다. 이제 우리 대구시민의 진심으로 일제저항 반외세자주독립유적을 찾고 자주평화의 정신을 계승하는 실천을 다 함께 할 때 대구지역은 큰 변화가 올 것이다. 

좌로부터 이대윤 위원, 박운규 위원, 강창덕 고문, 김우철 사무처장, 김옥순 위원 / 사진 = 문해청 기자

올해는 전국적으로 3. 1 자주독립운동 100주년기념사업을 더 크게 전개할 것을 바란다. 이제 과거 극우반동 군부독재문화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대구의 현재에서부터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독립투사 이육사 시인의 자주독립운동의 삶을 기억하고 되새김하는 시민운동으로 함께해야 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아직은 빼앗긴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 가?” 이상화 민족시인이 외쳤던 대구에서 이제 이육사 시인이 목 놓아 외쳤던 “광야”의 “백마 타고 오는 초인” 시민으로 ‘자주독립운동정신’으로 새롭게 거듭나야 할 것이다. 

대구에서 우리는 왜? 독립투사 이육사 시인을 찾을 수밖에 없는가? 과거 암울했던 일제 식민지로부터 현재까지 과연 “광야”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누구인가? 깨어있는 시민으로 민주시민의 소양, 건강한 꿈과 희망으로 살고 있는 우리가 바로 현실을 살아가는 “광야”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아닌가? 

문해청 시인 이육사 '자야곡' 시낭송 / 사진 = 문해청 기자

지난 100년 동안 한반도에서 선조의 일제저항 민족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 순국선열은 조선의 자주 민족 해방 민중 민주주의 평화 통일 및 인간 존엄과 존귀함을 지키려고 헌신하고 투쟁했다. 그런 의미에서 2019년 3. 1 자주독립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에 청년 학생 시민이 적극 참여해야 할 것이다. 

이제 3.1 자주독립운동 100주년 정신계승을 위한 연장선에서 ‘독립투사 이육사 시인 자주독립운동의 역사적 정신을 계승하도록 대구시민이 더 큰 마음으로 참여하길 바란다하며 ‘독립투사 이육사 시인 순국 75주년 추모시민문화제’ 참가에 대한 이육사 시인 대구 생거터 보존 및 기념관 건립을 위한 시민대책위원회(위원장 강정숙)의 호소문을 마무리했다. 

'광야에서' 합창하는 참석자 일동 / 사진 = 문해청 기자

김태용 대표(문예미학사)는 “보수적 대구에서 정치적 편견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가 이육사 시인의 삶과 정신계승을 대구시민의 집단지성으로 함께 갈무리 할 필요가 있다.”고 냉철한 소신을 밝혔다. 

이날 일제저항 식민지해방 자주독립운동에 헌신했고 친일파 자유당시절부터 군부독재정권까지 일관되게 저항했던 역사의 산 증인 강창덕 선생(민주화운동원로회의 회장)은 “독립운동가 이육사 시인이 탄생한지 115년이다.” “대구에서 처음 여는 이육사 시인 추모시민문화제가 이제 시작이니 만큼 앞으로 계속 열어 갈 것을 바란다.”고 담담한 소회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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