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뉴스프리존

유언(遺言)을 잃은 사회
사회

유언(遺言)을 잃은 사회

백석기 기자 입력 2016/04/09 13:41



유언이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이며 미더운 언어라고 한다. 

 

인간의 언어로는 내면에서 솟아나는 깊은 사연을 다 담아낼 수가 없다. 적당량의 허식이나 과장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탄생이 인생의 아침이라면 죽음은 낙조 후의 적막한 밤에 속한다.

 

유언, 한 인간의 꾸밈없는 고별사

 

유언이란 돌이킬 수 없는 생의 종점에 서서, 그것도 혼자서 그 일생을 결산할 때 남기는 꾸밈없는 고별사이다.

 

따라서 유언에는 한 인간의 역사와 품성과 인격이 응집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의 환경이나 시대정신을 반영해 주는 경우가 많다.

 

특히 민족적 수난이나 남다른 역경을 헤쳐 오다가 드라마틱한 생을 마치게 된 인사들의 유언의 내용은 매우 감동적이면서 일정한 경향성을 띤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때에 당시를 대표할 만한 위인들의 유언에는 구국을 테마로 한, 미리 준비해 논 내용이 많다.

 

을사보호조약을 반대해서 자결을 택한 민영환의 유언이 그 대표적 예에 속한다.

 

“동포 형제들은…, 학문에 힘을 쓰고 한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우리의 자주독립을 회복”하라는 간절한 염원으로 가득 차 있다.

 

처형을 앞둔 안중근 의사의 유언도 민영환과 너무 닮아있다.

 

“2천만 형제자매는… 학문에 힘쓰고 산업을 진흥하며… 자유 독립회복…”

 

그러나 유언의 진실성이나 그 사람의 인품을 한번에 나타내주는 것은 임종의 순간,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육성에 의한 경우가 더 감동적이다.

 

“방패로 내 앞을 가리라”고 한 이순신 장군이나, “이제 내 의무는 끝났다”고 한 넬슨 제독의 유언은 두 위인을 얘기할 때 항상 따라다니는 명언이 되어있다.

  민영환 선생이 명함에 쓴 유서 /연합뉴스

 


성인들, 죽음을 담담하게 대면

 

성인(聖人)의 유언은 하나같이 인간을 증오하지 않고 죽음을 담담하게 맞이하고 있다.

 

석가모니의 열반 송은 “제행(諸行)은 무상(無常)… 부지런히 정진하라”

 

공자(孔子)의 유언에는 초탈자의 긍지까지 엿볼 수 있다.

 

“태산이 무너지려느냐, 대들보가 내려앉으려느냐, 착한 사람이 쓰러지려느냐.”

 

같은 성인이라도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고 난 다음에 클리톤에게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 닭 한 마리 바치는 약속을 부탁하는 여유와 평온을 보였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고통에 신음하며 하느님이 왜 자기를 버렸는가를 절규하면서도 박해자를 용서하는 뜨거운 사랑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또 유언은 장소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국난이 심할 때에는 싸움터에서 죽게 해 달라는 유언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가부장적 가족제도가 정착된 유교시대에 와서부터는 자기 집 가족이 보는 앞에서 편안하고 의연하게 임종하는 것을 수종정침(誰終正寢)이라 하여 이상으로 삼았다.

 

따라서 이때의 유언은 주로 가족 간 우애, 효도 등이 중심을 이루었다. 자기 집 밖에서 죽는 것을 객사(客死)라 하여 큰 불행으로 생각했고, 시신마저 본가로 되돌아오는 것을 꺼려 곧바로 장지를 향하는 습관이 생겨났다.

 

퇴계는 10여일 전부터 몸소 진지하고 빈틈없이 죽음을 준비해 왔다.

 

퇴계와 율곡 선생의 초연한 마지막

 

선비정신의 귀감이 된 비범한 임종의 예로는 이 퇴계와 이 율곡 선생이 있다.

 

이들에게서는 마치 한 폭의 신선도에서처럼 초연함과 장엄하기조차 한 기품을 가득히 느끼게 한다.

 

퇴계는 10여 일 전부터 몸소 진지하고 빈틈없이 죽음을 준비해 왔다.

 

학문적으로 미진한 내용을 정리하고, 남에게 빌린 책을 돌려보내고, 4일 전에는 제자들을 불러 고별의 유언을 남겼다.

 

장례는 간소하게 치를 것을 지시한 다음 묘비명도 다른 사람이 지으면 과장이 있을까 우려해서 스스로 짓고 관도 때맞추어 준비시켰다.

 

임종 당일 아침에는 평소 아끼는 매화 화분에 물을 주게 한 다음, 저녁 다섯 시쯤 드러누울 자리를 정돈하고 여섯 시에 조용히 운명하였다.

 율곡 이이 /연합뉴스

 


율곡은 죽기 며칠 전에 함경도로 부임해가는 관리에게 함경도 방비의 책략인 육조방략(六條方略)을 아우에게 구술로 받아쓰게 하여 나라에 대한 마지막 봉사를 했다.

 

임종일 새벽이 되자, 목욕하고 손톱 깎고 동쪽으로 머리를 향하게 하여 드러누운 다음 단정한 자세로 편안히 숨을 거두었다.

 

사람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그 힘든 순간을 놓고 멋을 따지고 질을 들추는 것은 크나큰 불경이다.

 

그러나 남다른 인간적 수난을 뛰어넘은 위인들의 고별사에는 낭만적인 멋과 진한 공감이 묻어난 경우도 있다.

 

불우시인 김삿갓(김병연)은 세상이 한스럽고 부끄러워 유언조차 달빛이 흐르는 “창문을 닫아 주오!”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독일의 괴테는 보람과 찬탄의 인생을 살아온 시인답게 “좀 더 빛을!” 으로 인생을 마무리했다.

 

유언에는 한 인간의 역사와 품성과 인격이 응집되어 있으므로 당시의 환경이나 시대정신을 반영해 주는 경우가 많다.

 

처형을 앞둔 안중근 의사의 유언도 감동적인 내용으로 기록됐다.

 

유언을 상실한 현대인들

 

‘로만 롤랑’은 나폴레옹과 베토벤 두 사람의 유언에서 누가 진정한 영웅인가를 평가했다.

 

한때 세계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나폴레옹은 임종에서는 의외로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였다.

 

그는 연인 ‘조세핀!’을 부르다가는 ‘진군!’, ‘군의 선두!’를 되뇌면서 애처롭게 죽어갔다.

 

반면에 헤아릴 수 없는 정신적 좌절과 역경을 딛고 꿋꿋이 일어선 베토벤은 운명의 극복자답게 승리의 유언을 남겼다. “희극은 끝났다. 제군들이여 갈채를 해다오.”

 

고통스러웠던 한평생도 높은 눈으로 바라보면 한낱 우스운 코미디에 불과한 것이다. 인생을 달관한 자신감 넘치는 영웅적 기개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피안의 세계에 대한 경건함이 있었으며, 사람마다의 체취에는 휴머니즘이 항상 훈훈하게 배어 있었다.

 

그러나 현대인은 마치 궤도를 이탈한 차량마냥 자기제어를 상실한 채 종착점을 향해 무턱대고 달리고만 있다. 이기주의, 기계적 편이주의가 만연되고 있다.

 

새로운 과학기술은 새로운 비약을 향해 스피드를 더해갈 뿐이다. 그래선지 예전 사람은 60살에도 여유 있는 긴 인생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80살을 살아도 수유처럼 느껴지는 짧은 인생을 아쉬워하고 있다.

 

현대인은 고향을 상실했다고 한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나 기다림, 꿈이 사라지고 있다. 꿈이 시들하니 가슴에 맺힌 간절한 염원도 흐릿하다.

 

그래서 현대인은 유언 상실시대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유언의 상실이란 곧 꿈과 이상, 싱싱한 삶의 목표상실을 의미한다.

 

정신지체에 빠져 사는 현대인의 가슴속에 뜨겁고 풍부한 감수성이 채워질 때, 비로소 우리는 숙연한 인생을 체감하면서 감동적인 유언도 남기게 될 것이다.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