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다음 주에는 기자회견을 할 것 같습니다. 새해를 맞아 국정을 어떻게 운영
해 나가겠다는 구상을 밝히는 자리가 되겠죠. 청와대 내부적으로는 방식을 놓고 고민한 것
같습니다. 기자회견으로 할건지,
아니면 담화 형식으로 할 건지... 취임 후 2년이 다 돼가는 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지적이 소
통 부족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결국 지난해 신년 기자회견처럼 기자회견을 하기로 결정했다
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물론 아직 모든 내용이 구체적으로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몇 명의 기자에게 질문을 받을 건
지, 질문을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사전에 협의할 것인지, 질문 순서도 미리 정할 것인지 등등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위해서는 정말 준비할 게 많습니다.그런데 취임 후 2년이 다 돼가는 동
안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단 두 차례밖에 안된다는 것은 조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장소를 바꿔 미국 백악관으로 가보겠습니다.현지 시각으로 지난달 19일입니다. 오바마 대통령
이 지난해 마지막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재미있는 장면은 오바마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여
기자들의 질문만 받았다는 겁니다. 7명 모두 다 신문이나 통신, 정치 전문지 기자였고 방송
기자는 없었습니다. 오바마가 퇴장할 때 한 남자기자가 새해 결심이 뭐냐고 물었지만 오바
마는 그 질문을 무시하는 대신 다른 여기자 한 명의 질문을 보너스처럼 더 받고 브리핑룸을
빠져 나갔습니다. 기자회견을 하나의 이벤트로 활용한 것입니다.
여기서 참고해야 할 게 하나 있는데요, 백악관 기자회견의 질문은 철저하게 현장에서 이뤄
진다는 점입니다. 기자들은 수업시간에 "저요,저요!" 하고 대답하려 애쓰는 초등학생처럼 최
대한 손을 번쩍 들고서 대통령의 지명을 기다립니다. 대통령이 지명하는 순서대로 질문하
고, 질문의 내용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습니다.
물론 이런 무한자유 때문에 미국 대통령들은 기자회견 도중 불쾌감을 나타내기도 하고, 당
초 계획보다 기자회견을 축소하고 퇴장해 버리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때로 기자들과 언
론보도에 화가 나더라도 기자회견은 꾸준히 한다는 겁니다. 그 것이 바로 언론을 통해 국민
과 소통한다는 미국 대통령들의 전통적인 소통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 시절 시작된(처음에는 오프더레코드- 듣고 참고만 하고 기사는 쓰지 않
는- 스타일이었다고 하네요)대통령의 기자회견 횟수를 정리한 자료를 뽑아 봤습니다. 대공
황 시절 미국을 일으킨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재임 12년 동안 881번의 기자회견을 했
습니다. 일년에 72.66회, 한 달에 6.05꼴입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라디오를 통치와 소통의
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첫 대통령이기도 하죠.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정말 많이 했을 것 같은 이미지이지만, 재임 3년이 채 안
되는 동안65회를 해서 일년에 22.89회, 한 달에 1.91회꼴로 했다고 합니다. 위대한 소통가로
불리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도 의외로 기자회견은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재임 8년 동안 46
회, 한 달에 0.48회밖에 안됩니다.
검은 케네디로 불리는 오바마 현 대통령은 2009년 1월 취임후 지난해 말까지 121회, 일년에
20.75회, 한 달에 1.73회를 했다고 합니다. 전임자이면서 많은 미국인들에게 유머 소재로 등
장하는 조지 W.부시 대통령은 재임 8년간 210회, 일년에 26.25, 한달에 2.18회를 했습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재임 8년 동안 193회로 후임자보다 조금 덜 했네요.
미국 언론들이 이렇게 대통령의 기자회견 횟수를 정리하려면 자료를 찾아봐야 할 정도로 미
국 대통령의 기자회견 빈도는 높습니다. 그리고 미국 언론들은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중요하
게 생각합니다.
또 언론 입장에서는 늘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양에 차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자기가 선호하
는 매체의 기자에게만 질문 기회를 주고, 안좋은 기사를 많이 내보내는 매체는 외면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보수층을 대변하는 팍스 뉴스 같은 경우는 오바마 취임이후 상당기간 질문을 받지 못했다며
씩씩대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습니다. 미국 언론들은 무엇보다 하고 싶은 질문, 궁금한 것
에 대해 대통령들이 충분한 설명을 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불만을 토로하곤 합니다.
거꾸로 미국 대통령들은 기자회견 때마다 충분히 질문을 받는데 왜 기자들은 늘 부족하다고
얘기하냐면서 짜증을 내곤 합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백악관 출입기자들이 한 번에 질문 하
나만 하면 자세하게 대답할 텐데, 늘 질문 하나에 여러 개의 내용을 담아서 자신도 시간에
쫓기고 대답하다가 질문 자체를 잊어버리는 수가 있다고 불만을 터뜨리곤 합니다. 남아프리
카 공화국에 가서 두 나라 정상이 공동 기자회견을 할 때는 아예 공개적으로 백악관 기자들
에게 남아공 기자들 처럼 질문 하나만 하라고 얘기할 정도였습니다.
대통령이나 기자들이나 불만투성인데, 저는 워싱턴 특파원을 할 때나 지금이나 이런 백악관
브리핑룸의 풍경이 부러웠습니다. 기자회견 한다고 하면 미리 질문 순서와 질문 내용까지
정해서 청와대측에 알려주는, 그래서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인상을 지울 길 없는 우리 청
와대 기자회견과는 달라도 정말 달랐기 때문입니다.
언론 자유의 숨결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문화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기자회견 내내
왼 주머니에 왼손을 넣은 자세로 긴 오른 팔로 질문할 기자를 지명하는 오바마의 모습에서
는 권위를 앞세우지 않고, 격식을 따지지 않고 국가적 현안과 아젠다를 토론하려는, 언론 자
유를 존중하고 국민과 소통하려는 자세가 읽혀졌기 때문입니다.
질문 기회를 얻어내려고 사력을 다하는 백악관 출입기자들의 모습에서는 대통령의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국민을 대신해 대통령의 아픈 곳까지 서슴지 않고 긁어대려는 집요함이 느
껴졌기 때문입니다.
미국 대통령들 처럼 한 달에 두 번, 적게는 한 번 정도 하는 게 우리 정치현실에서는 쉽지 않
을 수 있습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천금처럼 무거워야 한다는 우리의 정치적 고정관념
도 작용하고 있고, 기자회견에서 자칫 본질적 내용보다는 말실수 하나가 더 크게 다뤄질 경
우에 대한 우려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언론을 통해 국민과 소통하려고 기자회견을 하기로 했다면, 질문에 대한 두려움과
부담감보다는 그 질문에 담긴 국민들의 궁금증과 답답함에 집중했으면 합니다. 화려한 말솜
씨가 아니라 진솔한 답변을 보기를 많은 사람들이 원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대통령들 역시 선거과정에서, 정치를 해오면서 예상치 못한 질문을 숱하게 받았고, 원고 없
이 상대후보와 TV토론도 했습니다.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는 거죠.
또 사전에 질문 내용 정하고 질문 순서 정하는 것도 예전에는 일반 국민들이 몰랐다 해도 이
제는 다 알려지게 됩니다. 일년에 한 번 정도는, 그 것도 새해를 시작하는 마당에 기자회견
을 통해서 국민들에게 그건 이렇고,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올 한 해 저는 이런 데 주력할테
니까 저를 믿고 함께 갑시다라는 말 정도는 시간을 갖고 충분하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싶
습니다.
* 다음 주, 박 대통령의 기자회견 내용을 뉴스에 보도하면서 바쁘고 힘들어도 재미가 있었으면
하는 것은 개인적인 소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