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독립선언, 3.1운동에 가장 크게 영향 준 항일저항 운동, 100년 전 조선인 유학생들이 일본 도쿄 한복판에서 외쳤던 2·8독립선언이 조선뿐 아니라 일본의 역사와 대만, 중국의 독립운동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왔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기폭제가 됐던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행사가 8일 서울과 동경에서 동시에 열려 일제에 항거했던 선열들의 숭고한 뜻이 되새겨졌다. 오노 야스테루(小野容照) 규슈대 교수는 지난 9일 재일본한국YMCA(이하 도쿄YMCA)가 도쿄 지요다구 도쿄YMCA회관 한국문화원에서 개최한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2·8독립선언은 한 나라의 역사를 넘어 동아시아 국가들이 공유하는 '동아시아의 역사'라고 강조했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의 해지만, 100돌을 맞이하는 게 3·1운동만은 아니다. 기미독립선언 한 달 전에 동경에서 선포된 2·8독립선언과, 한 달쯤 뒤인 4월 11일에 중국 상하이에서 이루어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도 역시 100주년을 맞는다. 오노 교수는 "2·8독립선언은 제1차 대전 종결 후의 일본 사회에 '개조'를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며 "일부 지식인과 학생이기는 했지만 일본인들이 조선 지배 문제에 대해 처음 마주 보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2·8 독립선언은 1919년 2월 8일 일본에 유학하던 조선 학생들이 나라의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한 사건으로, 3·1 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도화선이 됐다. 당시 식민지 지배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나온 독립선언이지만, 3·1 운동 등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2·8독립선언은 일본 동경 한복판에서 우리 유학생 6백여 명이 조국독립과 항일투쟁 의지를 세계만방에 선포한 사건으로 일본에 유학하던 20-30대 조선의 엘리트들이 세계질서 속에서 기울어가는 나라와 민족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한 자주독립 선언이다. 오노 교수는 당시 선언에 참여한 유학생들은 1차 세계대전 후 제국주의의 타파와 민주주의를 추구하던 일본인들과 교류가 적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2.8독립선언서는 동경 유학생들의 토론의 산물로 한 개인의 작품 아니라 집단지성의 발로였으며 마지막에 합류한 춘원 이광수는 선언서의 문장을 다듬는 역할을 했다. 동경 유학생 700명 중 600명이 침략국인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부 동경에 모여서 한마음 한뜻을 모았다. 특히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가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교수를 중심으로 결성된 '여명회(黎明會)'의 경우, 선언 직후인 1919년 3월19일 모임에 선언에 참여했던 조선인 유학생들을 초청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은 선언의 취지를 설명하며 2·8독립선언과 3·1운동을 했던 조선인들의 심정을 설명했다.
당시 주모자 60여 명이 내란죄로 사형을 당하려 했으나, 일본에 대한 국제여론의 비난으로 다행히 1년 금고형에 처해졌다. 나라 잃은 우국의 청년들은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낭독하며 항일투쟁 의지를 불태웠고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 외에 세계평화, 인류문화의 공헌을 선언했다.
단순한 국수적 민족주의에 머물지 않고 세계주의와 미래를 조명한, 당시 기울어져 가는 풍전등화와 같은 조선 청년들의 깊은 통찰이 담겨 있었다. 중국에서는 2·8독립선언과 3·1운동 소식이 현지 언론 등을 통해 알려졌고, 이는 1919년 베이징대 학생들이 일으킨 항일 운동인 5·4운동이 발발한 계기 중 하나가 됐다.
2·8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아 3·1운동이라는 거족적인 민족운동으로 발전했고, 이는 다시 망명지 상하이에서의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국가의 초석을 닦는 계기로 이어졌다. 이날 심포지엄에서 윤경로 한성대 역사문화학부 명예교수(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장)는 "올해가 한국 근대사의 3대 사건인 2·8독립선언,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100주년이 되는 황금돼지해"라며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획기적인 진전이 생겨 100년 전 외쳤던 자주·독립의 정신이 실현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당시 주모자 60여 명이 내란죄로 사형을 당하려 했으나, 일본에 대한 국제여론의 비난으로 다행히 1년 금고형에 처해졌다. 나라 잃은 우국의 청년들은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낭독하며 항일투쟁 의지를 불태웠고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 외에 세계평화, 인류문화의 공헌을 선언했다.
단순한 국수적 민족주의에 머물지 않고 세계주의와 미래를 조명한, 당시 기울어져 가는 풍전등화와 같은 조선 청년들의 깊은 통찰이 담겨 있었다. 이날 심포지엄에서 윤경로 한성대 역사문화학부 명예교수는 "올해는 한국 근대사의 3대 사건인 2·8독립선언,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100주년이 되는 황금돼지해"라며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획기적인 진전이 생겨 100년 전 외쳤던 자주·독립의 정신이 실현되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2·8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아 3·1운동이라는 거족적인 민족운동으로 발전했고, 이는 다시 망명지 상하이에서의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국가의 초석을 닦는 계기로 이어졌다.
2·8 독립선언 100주년을 맞아 당시 장소였던 일본 도쿄 지요다구 재일본 한국 YMCA 한국문화회관에서 '2·8 독립선언 100주년 기념 전야제'가, 같은 시각 한국에선 서울 종로2가 서울 YMCA 대강당에서 '동경 2·8 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식'이 지난 8일에 열렸다.
100주년 “젊은 유학생들 최후의 일인까지 혈전 불사 의기…11명 모두 기억할 것”
문재인 대통령도 2.8 독립선언 100주년을 맞아 “100년 전 오늘 조선 유학생들이 도쿄에서 낭독한 조선청년독립선언서가 독립운동의 불쏘시개가 됐다”고 평가했다. 문 대통령은 독립선언을 실행한 11명을 모두 기억할 것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2·8독립선언을 기리며”’라는 글에서 “100년 전 오늘, 600여 명의 조선유학생들이 함박눈이 내리는 도쿄 조선YMCA회관에 모였다. 일본의 심장 한가운데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날 유학생들이 낭독한 ‘조선청년독립선언서’는 우리 독립운동의 화톳불을 밝히는 ‘불쏘시개’가 됐다”고 썼다.
문 대통령은 ‘2·8독립선언서’를 두고 “학생들에 의해 작성됐고 3·1독립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며 “젊은 유학생들은 민족의 의사를 무시한 일제의 군국주의를 규탄했고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 독립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문 대통령은 “정당한 방법으로 독립이 이뤄지지 못한다면 최후의 일인까지 열혈을 흘릴 것, 영원한 혈전을 불사할 것이라는 의기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정부여당이 3·1 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새로운 100년'의 초석을 놓겠다고 각오를 세우고 있는 만큼, 이 행사는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의 군불을 지피기 위한 전초전 성격이 짙다.
여당인 민주당에서는 홍영표 원내대표가 대표로 참석했다. 현재 2·8 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사업추진 위원장도 독립운동가 후손인 이종걸 민주당 의원이 맡고 있다.
홍 원내대표가 참석한 서울 기념식에선 올해 백수를 맞은 임우철(1920년생) 애국지사가 만세삼창을 선창했고, 조영진 한국독립유공자협회 회장(1922년생)과 승병일(1926년생) 애국지사도 참석했다. 독립유공자협회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 생존한 항일 애국지사는 35명이다. 이들의 평균 나이는 96세다.
이석하 서울YMCA 회장은 원종남 이사가 대독한 기념사에서 "2·8 독립선언은 단순히 한인 청년 학도들만의 쾌거가 아니라 동아시아는 물론 온 인류에 고하는 독립선언"이라며 "억눌리고 고통당하며, 압제당하고 자유를 빼앗긴 이들에 대한 해방의 선언이었다"고 평가했다.
이 회장은 "일제 식민지 잔재를 제대로 청산해내지 못한 우리의 현실은 자축하기에 부끄러운 일들이 많다"면서 "2·8 독립선언이 단지 과거의 사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미래를 창조하는 그 정신적 동력으로서 다시 조명되고 길이 계승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세균 전 국회의장은 이날 축사에서 "남북이 분단돼 있지만, 다행스럽게 남북 정상이 수시로 만나고 북미 정상도 두 번째 회담을 앞둬 핵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 찾고 있다"면서 "앞으로는 대한민국이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될 수 있는 새로운 100년을 준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2·8독립선언은 3·1운동의 도화선... 동아시아의 독립운동 역사에도 중요한 의미
100년 전 조선인 유학생들이 일본 도쿄 한복판에서 외쳤던 2·8독립선언이 조선뿐 아니라 일본의 역사와 대만, 중국의 독립운동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왔다.
오노 야스테루(小野容照) 규슈대 교수는 9일 재일본한국YMCA(이하 도쿄YMCA)가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 도쿄YMCA회관 한국문화원에서 개최한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2·8독립선언은 한 나라의 역사를 넘어 동아시아 국가들이 공유하는 '동아시아의 역사'라고 강조했다.
그는 "2·8독립선언은 제1차대전 종결 후의 일본 사회에 '개조'를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며 "일부 지식인과 학생이기는 했지만 일본인들이 조선 지배 문제에 대해 처음 마주 보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오노 교수에 따르면 당시 선언에 참여한 유학생들은 1차 세계대전 후 제국주의의 타파와 민주주의를 추구하던 일본인들과 교류가 적지 않았다. 특히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가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교수를 중심으로 결성된 '여명회(黎明會)'의 경우 선언 직후인 1919년 3월19일 모임에 선언에 참여했던 조선인 유학생들을 초청했다.
이 자리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은 선언의 취지를 설명하며 2·8독립선언과 3·1운동을 했던 조선인들의 심정을 설명했다. 오노 교수는 "2·8독립선언은 일본 사회운동가들이 처음으로 조선을 이해하게 된 계기였다"며 "마찬가지로 조선에서 온 유학생들도 일본인 전체를 적대시하는 시선에서 벗어났다"고 말했다.
오노 교수에 따르면 2·8독립선언은 대만인들이 국가주의를 자각해 자치를 요구하는 운동이 펼치는 데 영향을 줬다. 중국과 관련해서는 2·8독립선언과 3·1운동 소식이 현지 언론 등을 통해 알려졌고, 이는 1919년 베이징대 학생들이 일으킨 항일 운동인 5·4운동이 발발한 계기 중 하나가 됐다.
오노 교수는 "조선사의 관점에서 2·8독립선언은 3·1운동의 도화선이 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지만, 동아시아의 독립운동 역사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