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변호사', '거리의 변호사' 박주민(더불어민주당 서울 은평갑) 당선인의 4·13 총선 당선 뒷이야기가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선거일을 한 달도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 전략공천 돼 쉽지 않은 상황이었죠. 하지만 큰 표차로 당선돼 세간을 놀라게 했습니다. 유가족들을 비롯해 세월호의 진상규명을 염원하는 시민들의 도움이 컸다고 합니다.
박주민 당선인은 15일 오전 오마이TV '팟짱'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분들이 자원봉사자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서도 드러내지 않으셨어요. 자원봉사자들 사이에서도 몰랐다고 하더라고요. 인형 탈을 쓰신 영석 아버님도... 아버님인지 몰랐어요. 쉬는 시간에 누가 제 어깨를 두드리시길래 인사를 드렸죠. 그리고 (인형 탈을) 벗으니까 영석 아버님이셨죠. 많은 감동을 받았죠. 경민이 어머님도 도라에몽 탈을 쓰시고..."
2년 전 세월호 희생자를 수습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김관홍 잠수사도 "뭐 좀 도울 일이 없느냐"고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는 선거 기간 내내 박주민 후보가 이동할 때 쓰는 차를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운전했다고 합니다. 박주민 당선인의 선거를 도운 최일곤 전 국회 보좌관이 쓴 총선 뒷이야기를 전제합니다. 모든 선거운동이 끝나고 유권자의 선택을 기다리던 4월 13일 오전 2시경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편집자말]
ㆍ이제 벌써 오늘(4월 13일 선거일)이다. 왜... 매번 선거는 이제 좀 할 만하면 끝나는 건지 모르겠다.
1. 그를 처음 만난 건 2년전 여름이다. 박주민... 이름만 들어봤던 사람이다. 처음 봤을 때 변호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외모 때문인지 그가 박주민인 걸 몰랐다.
며칠 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변호사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서야 그가 박주민 변호사인 걸 알았다. 그도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던 것 같다. 하긴 그때는 행색이 남루한 것이 피차일반이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인 얼마 전에야 그가 명문대 출신의 잘나가던 로펌 변호사였다는 걸 알았다.
2. 2년 전 여름, 세월호 국정조사가 여야의 대립으로 증인심문도 못하고 막을 내리자 특별법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특별법을 둘러싼 여야의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며 시간이 흐르던 중... 특별법이 졸속으로 합의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화가 난 그가 내게 따지듯이 물었다.
"안 그래도 힘든 유가족들은 세상을 바꾸려고 저렇게 힘들게 싸우는데, 당신네들! 너무하는거 아닙니까?"
나는 할 말이 없어 그냥 "미안합니다" 했다.
매일 그는 유가족의 곁을 지켰다. 날이 갈수록 초췌해지는 것은 그때 그곳에 있던 분들 모두가 같았다. 그래서 겉으로는 누가 유가족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고 박주민은 더더욱 그러했다.
며칠이 지나도 그날 화가 나서 내게 따지던 그의 목소리가 나를 괴롭혔다.
3. 그래서였을까?
얼마 전 출마하려는데 좀 도와달라는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그러겠노라고 답했다. 그가 걱정되었다. 사나운 정글에서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건 나의 기우였다. 그는 잘 해오고 있다.
은평에 오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자원봉사자들이 모여들었다. 가게문을 닫고 선거일까지 돕겠다고 오신 사장님, 일당을 벌어 생활하는 퀵서비스 기사님, 학생, 아이의 엄마, 며칠마다 한 번씩 귀중한 휴가와 반차를 쓰는 회사원, 취업준비생, 몸이 불편하신 분, 프리랜서, 예술가, 디자이너 등 다양한 사람들이 힘을 보탰다.
심심치 않게 늦은 시간에 사무실 전화벨이 울린다. 원래 늦은 시간 캠프로 걸려오는 전화는 주로 취객들이지만, 이 캠프는 해외에서 걸려온 전화들이 대부분이었다.
해외에서 후원금을 냈는데 확인해달라는 것이다. 후원회 통장에는 1만 원, 2만 원, 3만 원, 소액 후원자들도 많았다. 모두가 넉넉지 않은 사정이지만 조금이라도 보태시려 하신 분들이 보낸 것이다.
4. 주변에서는 세월호 이야기는 선거에 도움이 안 될 것이니 하지 말라고들 했다.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몰랐다. 아픈 현실이다.
더 가슴이 아픈 것은 매일 조용히 캠프에 나와 묵묵히 일하는 유가족들을 볼 때였다. 유가족들은 자신들이 선거에 악영향을 미칠까봐 묵묵히 주어진 일만을 하며 지냈다.
영석이 엄마는 아침 일찍 나와 밀걸레 질을 하며 청소를 했다. 그리고는 전화기 앞에 앉아 전화를 걸어 하루종일 박주민을 지지해 달라고 호소했다.
영석이 아버지는 투표독려 운동을 하기 위해 아침부터 길거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또 해가 질 때까지 인형탈을 쓰고 온몸이 땀에 젖도록 춤을 췄다. 그들은 그렇게 고된 하루를 보내고 말없이 근처 모텔로 돌아갔다가 다음날 다시 나왔다.
박주민은 자신을 위해 인형탈을 쓰고 춤을 추는 영석이 아버지를 보면서 가슴 아파했다. 2년 전 4월 16일 이후, 춤을 출만큼 즐거운 일이라곤 없었던 영석이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그것도 인형 탈을 쓰고 춤을 추는 것이 그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영석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박주민을 보면서 나도 가슴이 아팠다.
자원봉사를 온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사연이 있었다. 내가 여기서 거론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5. 늦은 밤 집에 들어가는 박주민의 어깨를 보면 그가 지고 있는 짐이 너무 무거워 보였다. 내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 더욱 마음 아팠다.
후보 어깨가 구부정하다며 한마디씩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사실 그는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길거리에서 노숙하느라 허리가 좋지 않았고 밤에는 그 통증이 더 심했다. 기껏해야 하루에 2시간 정도를 잘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난 아침부터 잔소리를 해야 했다. 하기 싫은 일이지만 해야 했다. 그에게는 질 수 없는 이유가 너무나 많았고 나는 그 이유들의 상당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6. 나는 그가 정치권에 들어온 이후 매일 상처 받았다는 걸 안다. 그리고 그가 받은 상처들은 매일 그를 돕겠다고 찾아오는 평범한 사람들이 치유해 줬다. 평범한 사람들이....
그런 박주민과 그런 평범한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치유되는 것 같았다.
오늘 밤, 그 결과가 어떻든 나는 박주민과 그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