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너무 슬픈 나머지, 서로를 위로하기 위해
지난여름부터 꼭 보고 싶은 영화가 하나 있었다. <암살>(최동훈 감독, 2015). 한국에선 1000만 명이 넘는 관객이 보았다지만, 해외에 사는 나로서는 예고편만 수십 번 돌려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수밖에. 그러던 어느 날 유튜브에서 '암살 풀타임'이라는 베트남어 자막 동영상을 발견했다. '웬 떡이냐.' 손에 땀을 쥐며 보고 있는데 이런! 중간에 갑자기 끊어져 버리는 게 아닌가. 보다 말아서 더 궁금해진 나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다. 그 반쪽짜리 동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그러다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갑자기 왜 이러지? 40년도 넘게 독일에 살면서 한국에 대한 향수도 별로 못 느끼는 내가 왜 이렇게 한국 영화 하나에 집착하는 걸까?
며칠 전, 뮌헨 광장에서 세월호 침묵시위가 열렸다. '뮌헨에서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주최한 집회였다. '뮌헨에서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무심코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모임이다. 2014년 어느 날, 온 국민의 눈앞에서 수백 명이 물속에 가라앉아버린 사건에 충격을 받은 친구들 서너 명이 뮌헨 이자르 강변 중국집에 모였다. 혼자서는 너무 슬픈 나머지 서로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울분을 토하던 중 다른 한인들도 지금 우리처럼 슬퍼하고 있을 거라며 그들과 함께 위로를 나누고 힘을 모을 수 있는 집회를 마련해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집회 신고를 하고 홍보 포스터라도 만들려면 단체 이름과 연락처가 필요했는데, 희생자 가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 사건이 잊히는 것이라고 하기에 '뮌헨에서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대표는 모인 사람들 중 가장 자녀 수가 많은 사람이 맡기로 했다. 한 번 하고 끝날 줄 알았던 집회는 대참사를 대하는 정부의 무능과 무관심을 지켜보며 20회를 훌쩍 넘겼고 '뮌헨에서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불어나기 시작했다. 멀리 있지만 우리까지 희생자와 유가족을 버릴 수 없다는 양심의 힘이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뮌헨 시내에서 세월호를 기리는 행사를 열고 있는데, 이번엔 열 명 남짓 모였다. 이미 낯익은 경찰관 두 명이 와서 집회신고서를 확인하고 "주의사항은 벌써 다 아시겠고. 혹시 방해꾼이 생기면 전화하세요. 그럼, 즐거운 집회 되시길…" 하며 자리를 떴다. 우리가 세월호 사진과 정보가 담긴 커다란 팻말을 들고 일렬로 서 있자 지나가던 뮌헨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발길을 멈추고 유심히 팻말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물었다.
"우리가 왜 여기 나와 있는지 설명을 드려도 될까요?"
나는 한국에서 세월호라는 배가 가라앉아 304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아직도 사고와 구조 실패에 관한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수학여행 가던 고등학생들이었다, 원인이 밝혀지지 않으면 그런 사고는 또 일어날 것이기에 유가족들이 나서서 철저한 진상규명을 정부와 정치계에 요구하고 있다, 이에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매달 정기적으로 집회를 열고 있다고 설명했다.
"세상에, 한국에서 일어난 일에 여기 사는 분들도 이렇게 열심히 하시는군요. 좋은 일 하시네요. 우리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
"여기 서명해주세요. 세계 시민들에게 천만인 서명을 받고 있어요."
어른들이 차례로 서명을 마치고 돌아서려는데, 눈을 반짝이며 어른들의 대화를 듣던 초등학생 꼬마가 엄마 옷자락을 잡았다.
"엄마, 나도 서명하고 싶어."
엄마가 아직 미성년자라 안 된다고 설명하자 꼬마가 이번엔 나를 보며 또렷하게 말했다.
"나도 서명하고 싶어요. 나는 이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어른들은 나를 쳐다봤다.
"엄마 아빠가 허락하시고 네가 옳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하렴."
부모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나는 꼬마에게 서명 용지를 내밀었다. 꼬마는 또박또박 제 이름을 적었다. 도시와 국가 이름은 스펠링이 어려워서 부모의 도움을 받았다. 도와주는 부모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동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옳은 일을 위한 당신들의 적극적인 활동에 저희가 감사해야죠. 진상규명 꼭 이루시기 바랄게요."
서로 인사하고 돌아서는데 한 중년 남성이 찌푸린 얼굴로 팻말에 적힌 내용을 읽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우리가 왜 여기 서 있는지 설명 드려도 될까요?"
그는 퉁명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아까 대화도 들었고 팻말도 다 읽었어요. 그걸로 됐어요."
그는 거칠게 몸을 돌리려다 말고, 갑자기 큰 소리로 화내듯 말했다.
"세상에는 부조리와 부정부패가 판을 쳐요. 한국에만 있는 일이 아니라 여기 독일에도, 어느 나라에나 다 있는 일이라고요. 그건 절대 바뀌지 않아요. 여기서 당신들이 이러고 서 있다고 한국에서 뭐 하나 변할 줄 압니까?"
그의 말투가 매우 도전적이어서 불쾌했지만, 한 사람이라도 설득하려고 그 자리에 선 나는 공손히 대꾸했다.
"변하지 않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뭔가 노력이라도 해야 변화를 기대할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어요. 원하지 않으면 서명하지 마세요."
"내가 원하고 말고가 아니라 효과가 없다니까요. 효과도 없는 서명을 내가 왜 해요?"
"그래도 알려줘야 하잖아요. 우리는 아직 잊지 않고 있다고."
"누구한테요?"
"억울하게 자식을 잃고 진실을 알기 위해 외롭게 투쟁하고 있는 유가족들에게, 그리고 한국 정부와 정치계에게."
"내가 서명한다고 한국 정부에서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아요?"
"그래도 알려줘야죠. 우린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싸우고 있다고, 그리고 그 싸움을 전 세계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다고."
"거참, 쓸데없다니까…."
그는 계속 툴툴거리면서도 "그거 이리 줘 봐요" 하더니 종이에 툭툭 서명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뒤도 안 돌아보며 한마디 던졌다.
"성공을 빌겠소. 거 참, 쓸데없다는데도."
그와의 설전에 난 기운이 쭉 빠졌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무심코 한 대답이 참 괜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디서 들어본 말이라는 느낌이 왔다. 아, 그래. <암살>이었다. 만주독립군 안옥윤이 그녀의 거사를 말리는 청부살해업자 하와이 피스톨에게 한 말이었다.
"둘을 죽인다고 독립이 되냐고? 그건 모르지. 그렇지만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아, 알겠다. 내가 왜 그렇게 이 영화가 보고 싶었는지. 인터넷에 돌고 있는 예고편 어디에선가 난 그 대사를 들었고, 그 문장이 큐피드 화살처럼 가슴에 박혀 나는 알지도 못하는 영화를 사모해왔던 것이다. 그 대사는 세계 곳곳에서 희망도 끝도 안 보이는 세월호 집회를 묵묵히 이어가는 보통 사람들이 늘 마주치는 질문에 대한 명쾌한 대답이었다.
뮌헨과 베를린에서 열린 세월호 행사
날씨가 화창한 덕분에 행인들의 걸음걸이에 여유가 있었고, 많은 이들이 우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서명을 해줬다. 뮌헨 구경을 나온 난민신청자 그룹도 사회복지사의 설명을 듣자 앞다퉈 서명 용지 앞으로 모여들었다. 사인을 하는 그들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도 했다. 진실을 요구하는 침묵시위 앞에서 세계 시민의 마음이 공명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이 후딱 지나갔고, 우리는 피켓과 현수막을 정리하며 서명을 많이 받았다고 기뻐했다. 서명 용지는 차곡차곡 모았다가 한국 416연대에 보낸다. '먼 나라에서도 세월호를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운 내시길 빌며. 한국에서 세월호 진실규명을 위해 싸우는 분들은 우리의 숙제를 대신 해주시는 분들인데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집회가 끝난 후 우리는 근처 카페에서 곧 다가올 2주기 세월호 추모제에 대해 의논했다. 베를린에서 세월호를 기리는 모임 '베를린행동'에서는 2주기를 맞아 한국의 독립언론사 <뉴스타파> 관계자를 초청해서 독일의 독립언론사 <코렉티브(correktiv)>와의 간담회를 열고 영화 <참혹한 세월, 국가의 거짓말>(송원근·박경현 연출, 2015)과 <업사이드다운>(김동빈 감독, 2015)을 상영한다고 했다. 또 세월호 유가족을 초청해 간담회도 열 계획이라고 했다. 작은 규모의 뮌헨에서는 큰 행사는 무리라는 데 의견이 모여 신부님을 모시고 조용하게 위령미사를 드리기로 했다. 베를린 행사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원정을 갈까 하다가 차비를 굳혀서 약소하나마 성금을 보내기로 했다. 행사에 돈이 많이 들 텐데, 버는 돈의 반을 세금으로 내는 독일에서는 베를린이고 뮌헨이고 오랜 시간 자기 호주머니 털어서 행사를 꾸려가는 사람들의 사정이 서로 빤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직후 뮌헨에서 현각스님을 모시고 치른 첫 추모제에는 100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해 "미안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그때는 아무도 세월호 집회가 장기화되리라는 걸 상상하지 못했다. 대한민국도 선진 법치국가인데, 이렇게 문제 해결이 미뤄질 리가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원인이 밝혀지기는커녕 의문점이 나날이 불어나는 상황이 펼쳐졌다. 우리는 매달 모여 침묵시위를 하고, 음악과 살풀이 공연을 곁들인 거리집회를 열면서 서명운동도 했다. 법륜스님의 해외 순회법회에 참석해 세월호 관련 말씀을 청해 듣거나, 앰네스티 국제기구, 416연대, 영화감독, 독일 현지기자를 초대해 <다이빙벨>(이상호·안해룡 감독, 2014) 상영회와 간담회를 열기도 했다. 그때 만난 인연으로 앰네스티에선 한국의 세월호 참사 이후의 상황에 큰 관심을 보이며 가끔 관련 논평을 발표하기도 한다.
< 다이빙벨> 간담회에서 어떻게 하면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우리의 노력이 언론의 주목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한 독일인 기자가 요즘 전쟁과 난민 등 너무나 굵직한 사건들이 많이 터져서 세월호 기사가 주목받기 어려워졌다고 설명했다. 다시 우리가 질문했다. 그렇다면 독일 언론이 주목할 만한 이슈를 우리가 만들면 되겠는가?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100회, 1000회 세월호 집회를 계속한다면 그건 이슈가 되겠는가? 그 기자는 그렇다고 했다. 그 말에 힘입어 우리는 이 행동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 나갈 것이라 다짐했다.
작년 세월호 1주기 행사 때는 뮌헨 사람들이 차를 대절해 베를린으로 달려갔었다. 교민 숫자도 적고 성향이 보수적인 뮌헨과 달리 베를린에서는 다양한 연령층의 한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희생자를 한 명씩 호명하며 붓글씨로 이름을 쓴 두루마리를 서서히 펼치는 퍼포먼스를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끝없이 풀려나오는 두루마리를 맞잡느라 삽시간에 기나긴 인간 띠가 생겨났고, 304명 목숨의 무게가 한눈에 감지되는 충격을 경험했다(그 숙연한 순간, 친구의 휴대폰 문자가 울렸다. 행사가 실시간 중계되고 있는지, 한국에 계신 보수적인 아버지가 "지금 어디냐. 즉시 응답 바람"이라고 문자를 보내신 것이다. 친구는 "선글라스 끼고 있었으니까 나 아니라고 잡아떼지 뭐…"라고 쿨하게 말했다).
해외에서 세월호 집회를 하는 이유 해외에서 2년 가까이 세월호 집회를 하면서 가장 큰 어려움은 "왜 이국땅에서 고국의 치부를 드러내느냐"는 동포들의 반감과 "취지는 좋지만 괜히 참여했다가 혹시 반정부 시비에 얽히지나 않을까?” 하며 몸을 사리는 것이다. 이 의혹과 불안감을 풀고 싶어서 나는 '해외에서 세월호 집회를 하는 네 가지 이유'라는 글을 뮌헨 한인회지에 기고했다.
첫째, 계속 세월호 집회를 하는 이유는, 참사에 대해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너무나 많아서다. 사고 40일 후, 정청래 국회의원이 정리한 '세월호 참사 110가지 의혹과 진실'에서 지금까지 몇 개나 밝혀졌을까? 의혹이 오히려 늘어난 건 아닐까? 진실이 밝혀지지 않으면 잘못을 고칠 수 없고, 고치지 않으면 이런 참사는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다. 세월호 집회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처해달라는 국민의 간절하고도 강력한 요구다.
둘째, 해외에서 시위하는 이유는 세월호 진실규명과 재발 방지를 원하는 사람들이 해외에도 이렇게 많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다. 그럼으로써 국내에서 세월호 참사를 기리기 위해 헌신하시는 분들께 힘을 보태고, 정부와 정치계에 국민의 의지를 뚜렷하게 보여주어 정책에 반영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국내외를 막론한 국민의 의무다.
셋째, '해외에서 집회를 하는 건 국가 망신이다'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지만 2년 가까이 정기적으로 세월호 집회를 주최한 경험에 의하면 우리를 대하는 독일인들의 반응은 대단히 우호적이다. 어느 나라에나 비리가 있기 마련인데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해외에서까지 행동하는 시민정신을 높이 산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 독일에서 후쿠시마 원전사고 관련 TV 방송을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정부의 원전 정책에 반대하면서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일본의 국민성이 독일인들의 눈에 얼마나 미숙하게 비치는지를…. 더구나 독일은 나치의 역사를 겪은 나라다. 국가 권력에 무조건 복종하다가 나라가 망하는 꼴을 겪은 독일인들에겐 국민이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는 일이 성숙한 행동으로 통한다. 요즘 같은 세상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것은 미개한 일이다. 그것을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국민들로 인해 대한민국 자체가 미개한 나라는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다.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요구하는 국민들이 있는 한, 그 나라는 해외 사람들에게 민도 높은 나라로 존중받는다.
넷째, '세월호 추모를 빙자한 반정부 집회는 아니냐?'는 의혹에 대해 명료히 답하자면 정부에 국민의 요구를 표현하는 것은 반정부와 전혀 상관없다. 국가의 궁극적인 이익과 발전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국민에게 절실한 사안을 해결할 의지를 보여주지 않으면 언젠가는 (선거나 의거를 통해) 물러나게 되어 있다. 정부는 이런 집회를 '민의를 파악할 수 있는 감사한 기회'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날 회의를 마치고 나오니 거리엔 벌써 어스름이 내려앉았다. 매달 만나다 보니, 어느덧 정이 들어 김장도 같이 해 나눠 먹는 사이가 된 사람들에게 내가 우는 소리를 했다. 꼭 보고 싶었던 영화 <암살>이 중간에 끊어져 버려 좋다 말았다고…. 그 말을 들은 한 친구가 며칠 후 온전한 영상을 구해줬다.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드디어 끝까지 다 보고 한 번 더 돌려보는데 눈물이 났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코앞에 다가온 죽음을 직감한 하와이 피스톨이 영감에게 "당신 말을 듣지 않아서 미안하다"고 하자 영감이 "사실 나도 불알 까이기 싫거든요"라고 대답하는 대목이다. 부드러운 고기가 되기 위해 거세당한 수퇘지를 가리키는 '불알 까인 돼지'란 표현은, 통치자에게 길들어 고유한 존엄성을 잃은 백성을 비유한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2년이 지나도록 해결한 게 아무것도 없는 지리멸렬한 국가의 행태를 보니, 한국 정부는 국민의 눈이 무섭지도 않은가 보다. 그렇기에 멀리 해외에서라도 더욱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다짐한다. 누군가가 왜 아직도 세월호 집회를 하느냐고 물으면 나도 "불알 까이기 싫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