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됐다, 어디서 그렇게 합니까? 정부에서 그럽니까? 참 못된 짓 하려고 생각하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남북통일이 안 되면 서훈도 못 받는가. 받을 수 있는 사람인데. 북한에 갔다고, 공산주의자라고 그렇게 생각해서…자기들이 친일파들 때문에 올라간 줄 알면서 그렇게 말하면 죄받죠. 죄받습니다, 그러면” (약산 김원봉 선생의 막내동생 김학봉 여사, 2015년 8월 19일 CBS 박재홍의 뉴스쇼 인터뷰 중)
지난 2015년 여름 1270여만명이 관람한 영화 ‘암살’로 약산 김원봉 선생의 독립운동이 재조명됐다. 항일무장 투쟁시기, 약산에게 일제는 100만원(현재 환산 320억원)의 현상금을 걸었을 정도로 두려운 존재였다고 한다. 임시정부의 수장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에게 현상금 60만원을 건 것보다도 훨씬 큰 금액이다.
약산은 해방 후 귀국했으나,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뺨을 맞는 등 최악의 모욕을 당했다. 그는 친일파가 장악한 곳에서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쫓기듯 월북했다. 그러나 남쪽에 남겨진 약산의 혈육들에게는 엄청난 시련이 닥쳤다. 바로 이승만-박정희 정권 시절 벌어진 ‘연좌제’ 때문이다.
약산의 부친은 연금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다. 또 한국 전쟁이 일어난 후 보도연맹 사건(이승만 정권의 만행으로 수십만명이 학살)으로 약산의 형제 4명, 약산의 사촌 5명이 총살당했다.
또 약산의 형제 중 생존자였던 김봉철씨는 보도연맹사건으로 처형된 형제와 사촌들의 시신을 수습하였다는 이유로, 5.16 군사반란 이후 벌어진 군사혁명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이 선고문에는 박정희가 직접 서명을 했다고 한다.
약산의 막내동생(11남매 중 막내)이자 유일하게 살아있던 혈육이었던 김학봉 여사가 지난 24일 세상을 떠났다. 김 여사도 약산의 월북으로 인해 종로경찰서로 연행돼 물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고인은 지난 2015년 8월 19일 CBS < 박재홍의 뉴스쇼 >와의 인터뷰에서 “경남여고 2학년 1학기에 전학을 갔는데, 그 이듬해 형사가 데리러 와서 물고문을, 팔도 묶어놓고 다리도 묶어놓고 얼굴에 수건을 덮고 계속 주전자 물을 부어서… 내가 손도 못 쓰고 이렇게 됐다. 그러고 나서 일어나라고 하면서 뺨을 때리면서 정신 차리라고 하면서…그래가지고 내가 나중에 학교로 돌아왔다.”며 연행 당시 상황을 언급했다.
또 “밀양에 있었던 오빠, 누이는 다 잡혀가서 암살당했다”며 언니 오빠들도 모두 목숨을 잃었음을 언급했다.
고인이 인터뷰할 시기는 박근혜 정권이 한창 ‘국정교과서’를 강행하려던 시기다. 당시 교과서에 약산이 주도적 역할을 했던 민족혁명당 활동이 제외될 수도 있다는 주장이 나오곤 했었다.
이에 분노한 김학봉 여사는 “참 참 못된 짓 하려고 생각하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남북통일이 안 되면 서훈도 못 받는가”라고 분개했다.
김 여사는 큰오빠인 약산에 대해 “민족주의자고요. 해방되고 오실 때 그렇게 환영을 받고 대청마루에 올라가서 인사를 하고 이렇게 했다”고 회고했다. 김 여사는 또 영화 ‘암살’에 대한 감상평에 대해 “(오빠에 대한) 말만 하면 눈물난다”고 말하며 꼭 약산이 이같이 후세에 기억되길 고대한다고 밝혔다.
“아주 훌륭한 사람으로서 동상도 세우고, 서훈을 받고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야 한이 없어요. 여한이 없어요”
5.16 군사반란 이후 연좌제를 강화한 박정희 독재정권 때문에, 김 여사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김 여사의 아들들은 모두 고아원으로 강제로 보내지는 등 모든 가족이 고통의 세월을 겪어야만 했다.
1980년 제5공화국 헌법에 ‘연좌제 금지’를 명문화 하면서 차남 김태영 씨는 군 제대 후 유학 비자를 받아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그 후 의류업에 종사를 하는 가운데 공부를 하면서 경영학 박사를 획득했다.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며 '의열단 약산 김원봉 장학회' 회장 및 '임시정부 건립위원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김학봉 여사의 빈소는 경남 밀양시 부북면 춘화로 60 밀양 희윤요양병원에 차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