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버스킹)두 달 정도면 (세월호 사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끝날 줄 알았어요. 보통 사고가 생기면 누가 해결하려고 하고, 나라에서도 해결하려고 하고 그러니 두 달 정도만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안 되고 안 되고 하는데 그해 여름 되니까 너무 덥고 힘들고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고비 고비 때마다 힘을 주는 사람들이 같이 (세월호 진상규명)서명해준 시민 분들, 또 뮤지션 분들이 계셨죠”
오늘은 세월호 참사 5주기다. 바닷속에 약 3년간 가라앉아있던 세월호도 올라왔지만, 아직도 진상규명이나 책임자처벌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런 참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세월호를 계속 기억해야하고, 또 진상규명 및 책임자처벌도 완료해야 한다.
이를 완수하기 위해, 세월호 사건에 대한 전면 재조사를 하자는 청와대 국민청원도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은 세월호를 잊지 않고 있다.
세월호 관련해 지금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났다. 지난 4년간 젊은이들이 많이 다니는 홍대 거리, 정확히는 홍대입구 8번출구 앞에서 4년간 버스킹을 주도했던 김권환 씨다.
지난해 5월까지 페이스북 페이지 <잊지 말라 0416>에 세월호 버스킹 사진들이 올라왔다. 버스킹은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4월 16일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매주 일요일 오후 4시 16분에 시작됐다. 비가 올 때나 눈이 올 때를 제외하곤 한 주도 쉬지 않았다. 버스킹 공연과 함께, 세월호 진상규명 서명도 받았다.
지난 13일 밤, 김권환 씨를 영등포구 한 작업실에서 만나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는 세월호 사건이 났을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선 밥을 못 먹겠더라고요.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가 19일 진도 팽목항을 다녀왔어요. 사흘 정도 머물다 서울 와서 여기저기 수소문해보니, 세월호 관련해 알리려는 시민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그 분들 만나서 얘길 해보고, 그 때부터 할 수 있는 일들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월호 관련 스티커도 붙이고, 전단도 나눠드리고요.”
김 씨의 작업실을 방문하니, 벽 한켠엔 커다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지난 4년간 세월호 버스킹에 참여했던 뮤지션들의 사진을 한데 모아놓은 사진이었다. 그는 버스킹을 처음 시작한 날이 2014년 5월 11일 일요일이라고 밝히며, 그는 ‘사이’라는 뮤지션이 제안하고 많은 뮤지션들이 참여한 세월호 홍대 버스킹 중 8번출구를 맡아 진행하게 된 게 그 계기라 전했다.
“제가 음악 프로듀싱 일을 하니까 (세월호 사건을)뮤지션들을 통해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처음 버스킹을 시작한 건 제가 아니라 ‘사이’라는 뮤지션이에요. 그 분이 5월 초에 버스킹을 제안하셨죠. ‘세월호를 지켜보는 작은 음악가들의 선언’이라는 이름으로 홍대에서 추모공연을 하자고 했죠. 그래서 저는 ‘홍대입구 8번 출구 앞에서 하겠다’고 했고, 아는 뮤지션하고 버스킹을 진행했습니다. 저는 그 추모공연이 진행될 줄 알았는데 일회성이더라고요. 그래서 계속 진행해야겠다 싶었어요. 세월호가 해결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그 다음 주에도 버스킹을 진행했는데 세월호 서명을 받는 시민들도 오셔서 (세월호 진상규명)서명전도 함께 시작하게 됐어요. 서명도 함께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셔서요. 그렇게 자원봉사 하시는 분들도 버스킹에 합류하게 됐습니다”
김 씨는 지난 4년간 버스킹에 참여한 뮤지션 수가 약 150팀이라고 답했다. 그는 “처음 시작했을 땐, 제가 같이 할만한 뮤지션이 두 세팀밖에 없었다. 그 두세 팀도 매주 다른 일정이 있는데 매주 하려고 하면 어려우니, 홍대거리에서 버스킹하는 뮤지션들을 찾아다녔다”고 말했다. 초반엔 굉장히 섭외하기가 힘들었음을 설명했다.
“처음엔 (뮤지션 분들이 버스킹에) 회의적이셨어요. 왜냐하면 ‘세월호 때문에 사실 공연이 없어졌다’는 말씀들을 하더라고요. 세월호 (진상규명 활동)지지는 하지만, 공연하는 건 어렵다는 말씀들을 했어요. 그런 말이 맞고 안타깝지만 화도 났던 게 사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제대로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음악하시는 분들도, 또 장사하시는 분들도 피해를 본 거 아니겠어요? 본질은 구조적인 문제죠”
김 씨는 “그래서 오기가 생겨서 계속 여기저기 알아보고 수소문하곤 했다”며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했다. 그것을 계기로 약 150팀의 뮤지션이 세월호 버스킹에 참여하게 됐다는 것이다. 사실 나비효과가 불러온 기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우연치 않게 가다 보던 뮤지션들이 기타 내려놓고, ‘제가 연주 한 번 하면 안 될까요’라고 제안하더라고요. 그것도 그 뮤지션이 다음 주에 아는 뮤지션을 소개해주시더라고요. 그 뒤부터 조금씩 소개받고 그랬죠. 그러다보니 4년 동안 약 150팀 정도 공연했어요”
김권환 씨는 4년동안 버스킹에 함께 해준 약 150팀의 뮤지션들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저도 음악을 하지만 허허벌판에 무대도 없는 곳에서, 쓰레기 더미 옆에 있는데서 자기 직업을 내걸고 노래를 하는 거예요. 사실 이 사람들 돈도 빽도 힘도 없는데 참 존경스럽더라고요. 정말 대단하고 고맙습니다”
김 씨는 특히 불이익을 감수하고까지 참여해준 뮤지션들에게 정말로 고맙다고 했다. 당시 불이익을 감수하고까지 참여한 분들이 적잖다고 했다. 당시 세월호 진상규명 외치는 목소리를 ‘미친 듯이’ 탄압했던 박근혜 정권의 만행을 돌아보면. 세월호 유가족들도 마구 연행해가고, 또 캡사이신 섞은 물대포도 ‘미친 듯이’ 난사하지 않았나.
진상규명·책임자 처벌 외치는 목소리에 그렇게도 찔렸던 건지. 국정농단 사태를 돌아보면 왜 그리도 세월호를 ‘감추려’ 했는지 알 수밖에 없다. 특히 세월호 관련 목소리를 내는 문화예술계 인사들에게 ‘블랙리스트’ 딱지를 붙이고, 생계까지 힘들게 한 인면수심 작태를 어찌 잊으랴.
“실제로 버스킹 참여하신 분들 중엔 불이익 당한 분들도 많아요. 2014년 당시 분위기는 지금하고 달랐죠. 세월호를 외치면 빨갱이 좌파 이런 식으로 몰고, 정치적이라고 몰아갔죠. 예를 들면 클럽에 공연이 잡혀 있었는데 갑자기 며칠 전에 취소됐다고 연락와서 공연 못 하게 된 분들도 많아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어요. 그런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공연하신 걸 보면 너무 대단하고 존경스러워요”
김 씨는 지난 4년 동안 버스킹을 진행하게 된 원동력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여해주신 뮤지션들에게 대한 열정에 고마움을 가득히 전했다.
“버스킹 참여하신 뮤지션 분들에겐 그 해(2014년) 가을까지 밥도 한 끼 못 샀어요. 멀리 천안에서, 용인에서 본인 차비 들여 시간내서 오시는데 밥은커녕 차도 한 번 대접 못했어요. 그 분들이 이토록 너무 열정적으로 하시는 모습을 보고, 이거 계속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끝나고 나면 ‘오늘이 마지막이지, 다음주에는 안 해야지‘하다가도 그 분들이 힘주시고 하니까 그러다보니, 4년이란 시간이 흐른 거 같아요. 평생 갚지 못할 정도로 고맙습니다. 제가 그분들에게 많이 배우고, 많이 저분들이 저를 이끌어주셨습니다”
그는 또 함께 진상규명 외치며 피켓 들고, 서명 받으신 분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특히 가장 고마운 사람으로, 매주 버스킹 사진을 찍어주고 <잊지 말라 0416> 페이스북 페이지에 포스팅한 임진오 작가를 꼽았다. 그의 작업실 벽 한 켠에 걸려있는 뮤지션들의 사진들은 임 작가의 작품이었다. 해당 사진 제목은 <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끝으로, 김권환 씨는 세월호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이 밝혀져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언제든 사고는 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사고는 누가 냈고, 누가 구조를 하지 않았는지, 만약에 사고를 누가 이용하려고 했다면 누가 이용하려했는지, 그걸 알아야겠죠. 그래서 제대로 밝혀지고, 무언가 기준이 세워져야지 않겠어요? 만약 이런 식으로 대충 넘어가버리면, 사람들 마음속에 어떤 울분 같은 게 영원히 남아 있을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