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군사독재에 항거하여 민주주의를 쟁취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감시와 폭력, 고문을 당했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이 민주화운동을 기념할 만한 공간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기억의 상실'이 당연시되어가고 있으며 민주와 인권을 향한 항쟁의 현장은 훼손되고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1972년 남산에 중앙정보부가 들어선 이래 1995년 국가정보원이 내곡동으로 청사를 옮길 때까지 이곳 안기부는 독재권력의 본산이었습니다. 독재에 항거하던 많은 운동권 인사들, 정치인, 언론인, 문화예술인, 기업인, 교수 등이 이곳에서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1973년 최종길 교수가 이곳에서 사망했고 1974년 인혁당재건위와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이곳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지옥의 고문을 당했습니다. 1980년 계엄합수부에 의해 끌려왔던 민주인사들, 조작간첩 사건에 연루되었던 사람들, 1980년대와 90년대의 공안사건의 피해자들이 이곳에 끌려왔습니다. 눈을 가린 채 끌려와 음습한 습기로 가득한 지하실에서 물고문, 전기고문 등의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그 안에서 이뤄진 것은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군사독재정권의 공포에 의한 통치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었고, 이곳으로 귀결되었습니다. 그래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탱해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산 안기부는 독재권력의 상징이기도 하며, 그렇게도 모진 고문을 당하고도 끝내 민주항쟁을 성공시킨 역사와 결합된 소중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과거의 고통스러운 역사일수록 철저하게 기억해야 한다는 것은 어느 나라의 역사를 보나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 민족은 유태인 학살의 현장과 강제노동의 현장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후세들에게 역사의 교육장으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기념관, 중국의 남경대학살 기념관, 일본 히로시마의 평화기념관, 영국의 고문박물관, 베트남의 타이거 감옥, 캄보디아의 뚜얼슬랭 박물관 등은 모두 고통스러운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 현장을 보존하고 그곳을 역사교육의 장으로 만들어놓은 세계적인 관광명소이기도 합니다.
국정원이 내곡동으로 옮겨간 뒤 서울시가 이곳의 건물 27동 중 23동을 해체하였습니다. 다행히 본관 건물과 별관 건물은 남아 있으나, 예전 고문실로 사용되던 지하 벙커는 소방방재시설이 들어서면서 그 흔적이 없어졌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서울시는 본관 건물마저 유스호스텔과 청소년정보문화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8월 말에 사업자 선정공고를 내겠다고 합니다. 또한 녹지대이기 때문에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 서울시의 입장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이곳을 역사의 현장으로 보존하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동안 남산의 제 모습을 찾기 위해 애써온 시민들의 노력으로 그나마 현재만큼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서울시에 요구합니다. 남산 옛 안기부터를 민주주의와 인권을 기념하는 기념공원으로 보존합시다. 역사적인 기념공간은 상징성이 높은 현장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우리도 민주주의와 인권의 역사를 기억할 공간을 꾸미고 학생들이 찾아와 공부하고 시민들이 찾아와 토론하고 해외 관광객들이 찾아와 우리의 역사를 배우고 갈 수 있는 기념공원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사회에 명소를 만드는 일이기도 합니다.
역사의 현장을 한번 없애버리면 이후에 복원하려 할 때 그만큼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은 청계천 복원사업을 통해서도 확인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다시 한번 우리 인권사회단체들은 서울시에 정중히 요구합니다. 안기부 건물을 유스호스텔로 사용한다는 방침을 유보하고 이곳 안기부터를 보다 나은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대화와 토론에 나서줄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 인권사회단체들은 남산 옛 안기부터를 역사 보존하기 위해 뜻을 같이하는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게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해나갈 것입니다. 우리는 구체적인 기념공원안을 마련하여 서울시를 비롯한 정부, 국회에 우리의 뜻을 알려나가고 시민들에게도 우리의 계획을 적극적으로 알려나갈 것입니다.
"역사에 눈감은 자 미래를 볼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 군사독재권력의 탄압의 역사를, 그리고 끝내 그 탄압을 이겨내고 민주주의를 쟁취한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고 인권기념공원으로 만들기 위한 장정을 시작합니다.
2003년 8월 25일 옛 남산 안기부 터에서 특별한 모임이 있었다. 많은 시민단체들이 '남산 엣 안기부터를 인권기념공원으로 보존해야 합니다'라는 제목의 기자회견을 열고 있었다.
서울시는 이곳을 유스호스텔로 만들 계획을 하고 있었다. 동독 지역의 비밀 경찰로 유명한 슈타지는 지금 고스란히 박물관 또는 전시관으로 남아 과거의 고문과 학정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유스호스텔은 다른 곳에 지을 수 있지만 안기부의 흔적을 되살리는 기념공원이나 박물관은 다른 곳에 지을 수 없다. 참으로 역사에 무지한 소치가 아닐 수 없다.
이곳만이 아니다. 과거 보안사 고문의 현장인 서빙고 분실터도 비밀리에 이전, 해체되고 말았다 .장소의 문제만은 아니다. 과거의 기록도 사라졌거나 베일에 싸여 있다.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미래세대가 경계할 자료와 장소와 기념이 필요하다. 도서관과 자료보관소, 박물관을 만들고 그 속에 과거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담은 모든 기록을 함께 남겨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