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뉴스프리존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자취와 독립운동 뿌리 구한말 의병..
사회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자취와 독립운동 뿌리 구한말 의병

고경하 기자 입력 2019/04/28 02:34 수정 2019.04.28 08:45
일제 해방은 절반의 독립이고 한반도 분단의 비극은 중국 대륙에서의 항일 투쟁, 정치세력은 크게 세 집단이다.
합동토론회 참석 기념 / 사진 = 문해청 기자

[뉴스프리존,대구=고경하 기자] 수성구 구립 용학도서관(관장 김상진)은 26일 강사: 김정계 명예교수(창원대, 정치학박사)와 정만진 소설가(전. 대구시 교육위원. 《대구 독립운동 유적 100곳 답사여행》 《소설 광복회》 등 장편소설) 등를 초청하여 "잊지 말아야 할 대구독립운동" 발자취를 찾아가는 합동토론회를 개최했다.

다음은 김정계 교수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자취 강의 요약이다. 1.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에 대하여 

1) 3.1운동과 임시정부 2) 상해(상하이 上海) 임시정부로 통합

2.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범에 대하여 1)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 조직 2)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시대구분 3. 태동기 1) 초기의 활동 2) 침체와 활로 모색 4. 이동시기 1) 가흥(자싱)-항주(항저우) 피난시기 2) 항주 이후-중경이전

5. 중경시기 (1940-1945) 1) 한국독립당 창당과 민족전선통일 달성 2) 광복군 창설과 활동 6. 환국과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의 1) 임시정부에 대한 영/미의 태도 2) 환국 3)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의 7. 절반의 독립, 분단의 비극 1) 중국 대륙에서의 항일 투쟁, 정치세력은 크게 세 집단 2) 남북한 분단을 살펴보았다.

4인 토론회 / 사진 = 문해청 기자

다음은 정만진 소설가의 독립운동 뿌리 구한말 의병(義兵) 강의 전문이다. (1) 의병

임진왜란 의병 궐기의 이유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 의병의 궐기는 향토와 동족의 방어를 위한 것이었고, 더 나아가 일본의 야만성에 대한 민족 감정의 발로였다. 유교적 윤리를 철저한 사회적 규범으로 하고 있었던 조선은 고려 말부터 왜구의 계속적인 약탈 행위로 인하여 일본인을 침략자로 여겼으며, 문화적으로 멸시하여 ‘왜’ 또는 ‘섬오랑캐’라고 불렀다. 이러한 일본으로부터 침략을 받아 민족적 저항 운동으로 일어난 것이 의병의 봉기였다.

임진왜란 의병의 의의 (‘합천 창의사’) : 120여 년간의 전국 시대를 끝낸 일본이 대륙 정복의 허황된 꿈을 갖고 16만 대군으로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국토를 유린하자 패퇴만을 거듭한 관군을 대신하여 우리 선조들은 붓과 호미를 던지고 분연히 일어났다. (중략) 세계 전사상 유례가 없는 의병군義兵軍의 맹렬한 반격으로 전의를 상실한 일본군이 전선을 축소, 남해안으로 물러났고, 이에 힘입어 관군의 재정비와 명군의 지원으로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함으로써 침략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하게 한 것은 우리 선조들이 펼친 의병 활동의 빛나는 공적이다.

참고 : 다음의 ①, ②, ③ 중 하나는 일본군 참모 본부가 1924년에 발간한 《일본 전사戰史 조선역朝鮮役(임진왜란)》에 나오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선조실록》 1601년 3월 17일자에 실려 있는 선조의 발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선조수정실록》 1601년 11월 16일자에 수록되어 있는 사간원의 발언이다. ① “의병들의 후방 공격에 시달리느라 일본군은 큰 병력을 전방에 집결시키지 못했다.” ② “조선 사람들은 한 것이 없다. 조선이 망하지 않은 것은 오직 명나라 군대 덕분이다.” ③ “변란(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 인심이 흩어졌는데 의사義士들이 한번 창의倡義하자 군민軍民이 호응하여 국가가 오늘날까지 있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의병들의 힘이었다.”

박은식 : 의병은 우리 민족의 국수國粹(나라사랑의 핵심)요 국성國性(나라사랑의 본성)이다.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

의병의 정의 (의령 ‘의병 박물관’) : 우리 민족 특유의 애국 애족 정신으로 국가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나 외세에 대항한 민군民軍 (중략) 특히 조선 말기의 의병은 항일 독립군의 모태가 되었다.

의병과 향병 : 관병官兵 - 의병 / 향병鄕兵 : 1592년 7월 1일 서사원이 격문 〈초집향병통문招集鄕兵通文〉 초안을 작성했다. 이튿날 초안을 팔공산 주변의 유력 가문에 회람시켰다.

‘義’의 의미 : 의병의 義에 내포된 의미를 단적으로 가늠하게 해주는 말은 견리사의見利思義이다. 나 개인에게 이利익이 되는 일을 보거든見 그것이 세상에 의義로운 일인가 생각하라思는 견리사의는 ‘의’의 사회적 의미를 갈파하고 있다.

질의하는 북구 갑 이헌태 위원장 / 사진 = 문해청 기자

(2) 문석봉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최초로 거의한(의병을 일으킨) 그의 봉기는 의병 활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기폭제의 역할을 한 것으로서 의병사에 큰 의미를 갖는다.’라는 기술이 있다. 그는 과연 누구인가?

그는 본적이 ‘현풍 상동(국가보훈처 표현)’인 문석봉이다. 문씨세거지의 문영박 지사처럼 문석봉文錫鳳(1851∼1896)도 문익점의 후손이다. 32세 때 조운漕運(세금으로 거둔 곡식 등을 배로 운반하는 일) 담당 관리로 있었는데, 목포와 무안 사이를 통과할 때 백성들이 굶주려 죽어가는 것을 보고 세곡을 풀어 구제했다. 그 일로 체포령이 떨어졌다. 문석봉은 정읍 방장산으로 도망가서 숨어 지냈다. 동생 문익봉文翼鳳이 형을 대신해 관아에 구금되었다.

문석봉은 “아무 죄도 없는 동생이 죽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면서 형조(법무부)가 발행한 양 가짜 공문서를 위조하여 동생이 풀려나도록 만들었다. 그 이후 현감 어병선 등이 조정에 상소문을 올려 문석봉이 백성을 구제한 것일 뿐 달리 죄는 없다고 진정하였다. 덕분에 문석봉은 산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이하, 문석봉 부분의 날짜는 음력 기준임)

문석봉은 경기도 과천군 포군장 등을 역임하던 18 93년 5월에 정식으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해 12월 진잠 현감이 되었고, 이듬해 11월 양호 소모사兩湖召募使(군사를 모으는 관리)가 되었다. 그 후 1895년 2월 공주부 신영新營(새 군대)의 영장營將(장수)이 되었다.

그의 임무는 군사들에게 신식 훈련을 시키는 일이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문석봉이 일본군을 공격하려 한다.’고 모함하여 서울까지 끌려가 투옥되었다.

4개월의 감옥살이를 마친 후 6월에 풀려나고 사면도 되었지만, 8월 20일(양력 10월 8일)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비극을 맞이했다. 문석봉은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9월 18일 공주 유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송근수, 신응조 등과 함께 창의한 조선 후기 최초의 의병으로, 이른바 ‘유성 의병’이었다.

10월 20일 문석봉은 200여 군사를 이끌고 회덕현을 급습, 무기를 다수 탈취하였다. 그 덕분에 300여 명을 무장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10월 28일 공주부 관찰사 이종원이 보낸 관군과 격돌했으나 대패하고 의병군은 해체되었다.

문석봉은 경상도로 내려와 재기를 모색하였다. 초계 군수 신태철은 ‘관에서 현상금으로 만금을 걸었으니 잠시 몸을 피해 뒷날을 도모하라.’고 걱정해주었지만, 고령 현감이 고변을 하는 바람에 11월 20일에 체포되고 말았다.

문석봉은 11월 24일 대구로 끌려와 옥에 갇혔다.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조선인 관찰사에게 문석봉을 빨리 죽이라고 압력을 가했다. 문석봉은 독한 문초를 받으면서도 의병을 일으킨 정당성과 큰 뜻을 당당하게 설파했다.

1896년 봄 문석봉은 처음 의병을 일으킬 때부터 동지였던 오형덕, 최은동과 함께 탈옥에 성공했다. 그들은 문석봉이 한때 포군장으로 재직했던 과천으로 갔다. 문석봉은 제천의 유인석 의병장과 힘을 합쳐 재기를 모색했다. 그러나 병이 깊어 활동이 불가능했다. 8월 12일 현풍에 돌아왔지만 11월 19일 46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최초의 의병장 문석봉,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눈물겹다. 그래서인가, 어렵게 찾은 그의 생가 터 앞에서 한없이 애잔해진다. 그의 생가 터에 독립운동의 정신을 현창하는 멋진 기념물이 세워지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아무런 표시도 없는 독립운동가의 유적지, 오늘도 문석봉 의병장의 생가 터에서 그것을 확인한다.

용학도서관 로비 / 사진 = 문해청 기자

(3) 의병 상황

을미사변, 단발령, 아관파천俄館播遷, 의병 ⌛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일본인들은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일본을 견제하려 한 민비를 살해하고 시신에 불을 질렀다. 그 후 일제는 김홍집의 친일 정권을 앞세워 을미개혁을 밀어붙였다. 양력 사용, 단발령斷髮令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단발령과 민비 시해에 충격을 받아 을미의병이 일어났다. 위정척사 운동을 하던 유생들과 농민, 동학군 세력 등이 중심이었다. 의병은 전국적으로 금세 확산되었다.

1896년, 일본의 움직임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俄 공관館으로 피신播遷했다. 친일 정권이 붕괴되고 친러시아 정권이 들어섰다. 단발령을 주도했던 김홍집은 길거리에서 민중들에게 맞아죽었다. 단발령이 철회되고 고종의 해산 권고가 뒤따르자 의병들은 자진 해산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을사조약, 을사의병 ⌛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대한제국은 개혁을 추진하였지만 집권층 자체의 보수적 성향과 열강의 간섭 때문에 큰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끝내 대한제국은 1904년 외교, 재정 등 각 분야에 일본인 고문을 두는 한일협약을 체결하였고, 러일전쟁 승리의 대가로 한반도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획득한 일제의 강요로 1905년에는 외교권을 넘겨주고 서울에 통감부를 두는 소위 을사조약까지 체결하고 말았다.

을사조약 폐기와 친일 내각 타도를 외치며 다시 의병이 일어났다. 을사의병 때는 최익현, 민종식 등 양반 출신 의병장들을 비롯하여 ‘평민 출신 신돌석 의병장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정미의병 ⌛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해산된 군인들이 가담함으로써 의병의 전투력이 높아졌다.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43》 : 신남의진은 우재룡을 비롯한 일부 해산 군인들이 의진에 가세해 와 전력이 크게 향상될 수 있었다.) 의병은 간도와 연해주 등 국외로까지 확산되었고, 비록 실패하였지만 1908년 1월에는 연합 전선을 이룬 전국 의병 ‘13도 창의군’이 서울로 진공하는 작전도 펼쳤다.

영남 의병 ⌛ 1906년 전반기 들어 영남 지역에서 특히 활동이 두드러졌던 의진이 이강년李康䄵 의병과 신돌석 의병이다. 대구와 가장 가까운 지역에서 창의한 의병진은 산남의진山南義陣으로, 정환직·정용기 부자를 중심으로 하여 위세를 크게 떨쳤다. 산남의진은 중추원 의관 정환직이 고종으로부터 의병 봉기를 독려하는 밀지를 받은 것을 계기로 편성되었다.

(4) 대구에서 보는 의병 유적

달성공원 ‘최제우 동상’ : 동학 농민 혁명 ⌛ 정부의 개혁 정책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어려운 국가 재정을 위해 농민 수탈은 심해진다.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내세운 동학에 쏠렸던 민중들의 반외세 사회개혁 정신은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을 중심으로 봉기했다.

1894년 전주를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보국안민輔國安民(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하게 한다)과 제폭구민除暴救民(폭정을 없애고 백성을 구한다)을 외쳤다. 외세의 침입을 우려한 동학군은 정부와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고, 스스로는 농민 자치기구인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개혁의 실천을 도모하였다.

민씨 정권은 동학군 진압을 위해 청에 파병을 요청했다. 하지만 청이 군대를 파견하자 일본도 군대를 출동시켰다. 양국 사이에 전쟁 기운이 높아지자 조선 정부는 두 나라 군대의 철수를 요청했다. 청은 이미 조선에서 정치적 지배력을 구축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받아들였지만 일본은 거부하면서 침략의 명분으로 조선의 내정개혁을 요구했다.

그러나 내정간섭이 거절당하자 일본군은 궁중에 난입하여 민씨 정권을 타도하는 한편,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군은 9월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하고, 10월 중국 본토로 진격하였으며, 11월 뤼순旅順을 점령, 시민과 포로 등 6만여 명을 학살하고 시내를 불태웠다.

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더욱 심하게 내정 간섭을 했다. 이에 동학군은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다시 봉기했다. 서울 진격을 계획한 후, 그에 앞서 공주 점령을 시도하지만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및 관군과의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면서 동학농민군의 꿈은 좌절되고 만다. 남은 동학군들은 의병에 가담하여 자주 국가 건설을 위한 반일 무장 투쟁에 나선다.

달성공원 ‘허위 순국비’ : 허위는 1895년 을미의병, 1907년 정미의병 등에 창의한 의병대장이다. 1895년 을미의병 때 허위는 김천에서 수백 명의 의병을 편성, 대구로 진격하려다가 1896년 3월 관군에게 패했다. 다시 남은 의병을 수습, 직지사에서 충북 진천까지 진격했지만, 의병 해산을 명하는 고종의 밀지를 받고 부대를 해산한 후 학문에 전념한다.

1904년 일본 규탄 격문을 살포하는 등 활동을 펼치다가 일본에 체포되고, 1905년 최익현 등과 함께 다시 일본군에 체포되어 4개월간 구금되었다.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맞아 경기 연천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전투를 벌이고 매국노들을 처단했다. 1908년 1월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격 때는 선봉장을 맡아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지원군이 늦어 서울 점령에는 실패했다.

그 이후에도 허위는 임진강, 한탄강 일대에서 일본군을 무찌르고, 매국노들을 처단했다. 이완용은 그에게 대신이나 관찰사 자리를 주겠노라 회유했다. 허위는 단연코 이완용의 회유를 물리치고 계속 투쟁했지만, 끝내 1908년 일본군에 체포되어 10월 21일 순국했다.

경북대학교 교정의 ‘장윤덕 의사 순국 기념비’ : 건립 일자 : 1956년 1월 1일 / 규모 : 부지 10평, 높이 3m / 장윤덕 의사는 경북 예천 출신으로 1907년 4월 서울에 상경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매국적신賣國賊臣들을 살해하려 하였으나 밀고로 실패하고 고향에 피신해 있던 중 같은 해 7월에 격문을 각지에 발송하고 300여 명의 의병을 일으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07년 9월에는 이강년 의병장 휘하 의병장으로 풍기, 봉화, 문경 등지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1907년 9월 16일 상주읍을 습격하여 일경과 교전하다 총상을 입고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지만 굴하지 않고 스스로 혀를 끊고 함구하며 항거하다가 그날 당일 상주 함창 구향리 뒷산에서 총살, 순국하였다.

앞산 큰골의 임용상 동상, 신암선열공원의 임용상·백남신·정상득 지사 묘소 : 앞산 큰골에 구한말 산남의진을 이끌고 일본에 맞서 싸웠던 임용상 지사 동상이 있다. 지사의 유택은 신암선열공원에 있다.

임용상 지사는 1877년 5월 22일 경북 청송에서 출생했고, 1958년 1월 5일 타계했다. 19 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임용상 지사는 경북 영덕에서 김재서金在瑞 등과 함께 창의군倡義軍(의병 부대)을 조직했다. 동해東海창의대장으로 추대된 지사는 포항 청하, 영덕 강구 등지에서 일본군의 주둔소를 습격하고 적군 다수를 사살하였다.

1907년 4월 정용기鄭鏞基의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결성되자 지사는 이에 합세하여 유격장 겸 도총장都總將으로 임명되어 청송, 영천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살하였다. 또한 1907년에도 의병 수백 명을 인솔하고 포항 흥해에서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전개했다.

1907년 9월 정용기 대장이 전사한 뒤 그의 부친 정환직鄭煥直을 다시 대장으로 추대하고 총장總將이 되어 청송, 청하, 영덕 등지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정환직 대장도 그해 12월 순국하였고, 산남의진은 1908년 여름 해산 상태가 되었다. 

1910년 봄 임용상은 옛 산남의진을 다시 정비한 후 의병장이 되어 군자금을 조달하고 무기를 획득하여 청송, 의성 등지의 일본 수비대를 공격했다. 그러나 안평 전투에서 마침내 일본군에게 체포되었고, 1910년 7월 25일 징역 10년형을 언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정상득鄭尙得 지사의 묘소에는 지사의 부인 ‘월성 이씨’도 함께 모셔져 있다. 정상득 지사는 18 86년 7월 1일 경북 영일에서 출생했고 1969년 9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나이 21세이던 1906년 산남의진에 참가하여 척후장으로서 활약하던 중 체포되었다.

그는 출옥한 후에도 1909년 의병장 민긍호閔肯鎬·김상태金尙台 등과 회합하여 적과 교전하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만세 시위 현장에서 체포되어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지사는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한 후인 1920년에도 ‘3·1 동지회’를 조직하여 3·1정신을 고취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백남신白南信 지사의 묘소 우측 전방에 세워져 있는 비석의 앞면에는 ‘山南義士水原白公南信之墓’라 새겨져 있다. ‘산남의사 수원백공 남신지묘’는 영천 일대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운 의병 부대 산남의진山南義陣의 일원이었던 수원 백씨 백남신 지사의 묘소라는 뜻이다. 그런데 국가보훈록 공훈록에 백남신 지사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의아한 마음에서 다른 자료를 찾아 확인해보니 백영촌白永村이라는 이명으로 등록이 되어 있다. 공훈록은 ‘생몰년도 : 1882.10.1. 2.~1964.10.12. / 출신지 : 경북 영일 / 운동 계열 : 군자금 모집 / 훈격(연도) : 애국장(1990), 공적 내용 : 경북 영일 출신이다. 1906년 4월에 산남의진 의병대장 정용기의 휘하에서 도포장都砲將으로 활약하여 영덕 강구에서 적군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그 후 정용기가 순국한 뒤 정환직 막하에서 영덕·흥해 등을 함락시킬 때 선봉장으로 활약한 바 있다. 1911년 7월 일제에 의해 소위 강도 살인 및 구타 등의 죄로 대구지법에서 7년형을 언도받고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두류공원 인물동산의 ‘우재룡 흉상’ : 18세(1902년)에 대구진위대에 자원입대한 우재룡은 1907년 한국군 군대 해산 조치가 내려지자 경북 영천 보현산을 본거지로 하는 산남의진에 참여해 의병으로 활약하게 된다.

우재룡은 정규군 출신이라는 점을 인정받아 산남의진에 들자마자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연습장의 중책을 맡게 된다. 또 우재룡은 성품과 능력을 인정받아 산남의진 의병대장 정용기의 의제義弟가 된다.

다른 대규모 의병진이 흔히 그랬던 것처럼(13도 연합의진 이인영 대장 격문 : 각도 의병을 통일하여 경기에 들어가면 온 천하는 우리의 물건이 될 것이오.) 산남의진 역시 창의할 때부터 강원도를 거쳐 서울로 진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추풍령이나 새재를 거치려면 강력한 일본군과 싸워 물리쳐야 하는 까닭에 상대적으로 적의 경비가 약한 관동을 지나 서울로 가려고 계획했던 것이다.

하지만 산남의진은 포항 죽장 전투에서 정용기 의병대장,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등이 전사할 만큼 대패한다. 고종의 명을 받아 아들 정용기에게 창의를 지시했던 정환직이 서울에서 내려와 아들 대신 의병대장을 맡는다. 

이때부터 우재룡은 24세의 젊은 나이로 산남의진의 선봉장을 맡게 된다. 하지만 관동으로 가던 도중 정환직은 순국하고, 팔공산 일대를 지키던 우재룡 역시 일제에 체포되어 ‘종신 유형(무기 징역)’ 처분을 받는다. 이때 그의 나이 25세(1908년)였다. (‘광복회’ 독립운동에서 우재룡을 다시 살펴볼 것이다.)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