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심종대 기자]‘역사’란 과거에 일어난 모든 일을 기록하고 실증적사료를 모으고 분류하는 행위가 아니라, 다음세대를 준비하는 현세 사람들의 적극적인 의미부여 ‘활동’에 가깝다. ‘기록’은 개인의 기억을 문서화시키면서 ‘개인의 기억’이 ‘집단의 기억’으로 , 나아가 ‘역사’로 나아갈 수 있게끔 하는 수단이다.
‘무엇이 기록으로 남겨지고, 기록 중 어는 것이 역사로 선택되는가?’ 이 문제의 답은 늘 정치 공학적으로 풀어졌고, 역사가의 펜 끝에서 완성됐다. 하지만 특정 계층이 ‘역사가’를 독점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여전히 크고 작은 장벽이 있지만 지금은 누구나 ‘역사가’가 될 수 있다. 파급력의 한계는 저마다 다르지만 적어도 형식상, 우리는 ‘누구나 말하고 듣고 기록하고 전파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시대를 타고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유기체적인 ‘사회’는 언제나 어떤 기억을 품고 미래를 향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이러한 시대정신은 그 사회가 합의한 집단의 기억, 즉 ‘사회적 기억’으로 결정된다. 출판 기록물에 있어 ‘사회적 기억’은 독자만이 할 수 있다.
신간 <1995년 서울, 삼풍>(부제:사회적 기억을 위한 삼풍백화점 참사 기록)은 그러한 출판의 본질적 의의를 되새김할 수 있는 첵이다. 세월호 참사 기록물이 한국 사회의 기록 문화를 풍부하게 했고, 이에 화답하듯 출판계에도 ‘기록’과 ‘당사자성’이라는 화두가 떠올랐다.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사고’ 혹은 ‘사건’은 결코 그 당사자만의 불행으로 그쳐서는 안되고 충분한 사회적 공감대가 공론장에 쳐져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본격적으로 움튼 것이다.
삼풍백화점 참사의 구술자(화자)는 무려 21년 전의 희미한 기억을 끄집어내야만 했다. 구술자(기억제공자)들의 상처는 하나같이 아물지 않았고 현재진행형이었기 때문에 ‘아픈 기억을 말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그러나 기록하는 사람(인터뷰어-기록수집가)들이 기꺼이 이들의 ‘청자’가 되어주었다. ‘들어주는 행위’가 매정한 망각에 빠진 사회에서 묵묵히 21년을 버틴 당사자의 기억을 매만져주었다. 화자와 청자, 이 관계성 덕분에 21년 전의 기억이 공론장으로 겨우 나올 수 있었다.
세월호 참사와 달리 삼풍백화점참사의 당사자들 이야기는 한데 모인 적이 없다. 서울문화재단이 기획한 메모리[人]서울프로젝트 ‘서울의 아픔, 삼풍백화점’은 재난의 당사자들을 직접 찾아 인터뷰하는 기록 프로젝트이다. 5명의 ‘기억수집가’가 지난 2014년 10월 7일부터 지난해 7월 30일까지 전국 방방곡곡을 돌면서 총 108명을 인터뷰했다. 책에는 59명의 구술이 실렸다.
#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무엇이 기억되고, 무엇이 잊혀졌는가?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57분, 서울시 서초구에 있던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책에 실린 구술자들의 표현에 의하면 “시루떡 형태로” “착착 포개져” “지하로 쑥 내려가” “폭격에 맞은 듯한” 모양이었다고 한다. 두 동짜리 건물이었던 삼풍백화점의 무너진 한쪽 건물 A동에는 5층 전문식당가, 4층 가정용품, 3층 남성의류.아동용품, 2층 여성의류, 1층 잡화.해외수입브랜드 매장이 밀집돼 있어 인명피해가 컸다. 한국전쟁 이후 단일 사건 최대 사상자를 초래한 이 참사로 502명이 사망했고, 937명이 다쳤다.
책의 1장-3장, 230여 쪽에 걸쳐 59명의 참사의 당사자 구술을 읽다보면 우리는 참사의 풍경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붕괴 현장에서 골프채를 훔치는 좀도둑을 잡은 경찰, 취재를 위해 자원봉사자로 위장한 기자, 자녀에게 끝끝내 참사 경험을 숨기고 마는 생존자, 매몰된 부상자에게노래를 불러주던 119구조대원, 소방 호스로 구조대의 옷에 밴 시신 냄새를 씻겨준 자원봉사자, 6백여 구의 시신 지문을 발췌하던 경찰, 토막시신이 널브러진 붕괴 현장에서 말을 잃은 민간구조대, 브래지어로 시신의 성별을 구분했던 의료진, 실종자 가족의 대표를 뽑는 절차를 만들었던 서울시 공무원, 꺼림칙한 기분에도 자리를 지키다가 목숨을 잃은 매장 직원, 적용죄명을 두고 치열하게 토론하던 검사, 난지도에 버려진 발가락 시체를 붙들고 울던 유가족, 딸의 보상금을 가지고 소식을 끊은 사위까지... 59명. 개인들의 기억으로 재구성된‘경험담’을 읽다보면 장마철이었다는 참사 당시의 축축한 공기가 코 끝에 닿는 듯 하다.
사진제공/동아시아 출판사
# 책 구성과 내용 엿보기
책의 가장 비중을 차지하는 <1장 우리는 삼풍백화점에 있었다:참사24시>에는 49명의 구술인터뷰가 참사 직전부터 시간순으로 담겨 있다.
<한낮의 붕괴 조짐>에는 “이러다 백화점 무너지는 거 아냐?”하는 농담을 주고받았던 삼풍백화점 직원들의 이야기와 무너진 건물 속에서도 금고를 지키고 있었던 경비원의 이야기 등이 담겨 있고, <오후 5시 55분 붕괴의 순간>에는 갑자기 다닥다닥 깨지던 백화점 유리창을 지켜보다가 불과 몇 초 만에 백화점이 무너지는 장면을목격한 삼풍주유소직원의 이야기, 그리고 붕괴 현장으로 달려가면서 전화로 속보 기사를 불렀던 기자의 사연 등이 있다.
<생사의 갈림길, 구조 현장>에는 좁은 틈 사이로 몸집이 큰 매몰자를 구조키 위해 식용유를 매몰자의 몸에 들이부은 사연과, 컨트럴타워가 없어 극심한 혼란의 와중에도 사람을 구하겠다고 나선 민간구조대의 이야기, 음식 장사를 접고 구조대를 위한 음식을 만든 자원봉사자, 또 강원도에서 수도방위사령부의 헬기를 타고 파견된 ‘광부 구조대’의 사연 등이 담겨 있다.
<제2의 현장, 병원>에는 삼풍백화점과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서울성모병원(당시 강남성모병원)에 아무 체계없이 무턱대고 이송된 환자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뤘던 응급실 풍경과, 이를 해결키 위해 환자 분산 작전을 벌였던 의료진들의 고군분투가 담겨있고, <붕괴의 책임과 처벌>에는 성수대교 붕괴사고 백서를 채 마무리 짓기도 전에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수사하게 된 검사와 삼풍백화점 이준 회장의 재산을 처분키 위해 그가 송치된 의왕구치소로 찾아간 서울시 공무원의 이야기 등이 담겨 있다.
사진제공/동아시아 출판사
특히 책에 실린 30여 장의참사 현장 사진은 우리 눈에 익숙한 구도의 보도사진이 아니다. 서초소방서와 구술자 이용관씨가 찍었던 참사 당시 ‘기록용 필름 사진’은 현장감 넘치는 다큐멘터리 느낌이 강하다. 독자들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참사 현장의 컬러 이미지를 볼 수 있다.
구술자들의 개성적 입말과 적절하게 어울린 이 현장 사진의 도움으로 1장에 실린 5명의 민간구조대, 5명의 경찰, 2명의 기자, 5명의 의사, 3명의 검사, 3명의 간호사, 3명의 소방관, 10명의 자원봉사자, 4명의 서울시 공무원 등의 구술은 독자들의 머릿속에 마치 재난영화의 한 장면처럼 막힘없이 형상화된다.
<부록:기억의 재구성>에는 상세한 사건개요와 사고에 관한 판결문, 보상금 및 사건발생비용 등의 객관적 자료가 있어 책이 단순 구술집의 장르를 벗어나 ‘기록’ 본연의 의미에 더욱 가까워졌다. 또한 독자들의 사건에 관한 일련의 객관적 자료에접근하는데 용이하다.
<2장 살아서 돌아오다. 생존자의 기억>에는 43쪽에 걸친 생존자 5명의 상세한 구술이 실려 있다. 삼풍 백화점 내 호화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삼풍 아트홀’ 관장이었던 주성근 씨의 구술을 읽다보면 당시 삼풍백화점의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한 눈에 그려진다. 피범벅이 된 삼풍백화점 유니폼을 입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온 생존자 박은희(가명)씨는 매장에서 일을 하다가 변을 당한 경우였다. 이후 구조 현장에서 다른 삼풍직원 생존자들과 지속적인 자원봉사활동을 하게 된다.
<3장 남겨진 사람들:유가족의 기억>에는 73쪽에 걸친 유가족 5명의 구술이 담겨 있고, <4장 ‘사회적 기억’으로 가는 길>에는 박혜천 동양대 공공디자인학부 교수의 <백화점 그리고 엘리베이터>와 정윤수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의 <망각의 골짜기에서 기억을 말하다>라는 비평의 글이 실려 있다.